얼마 전에 우리 회사에 있는 모든 복사기가 바뀌었다. 그리고 새로운 복사기 사용법에 관한 교육이 있었다. 처음에는 무슨 복사기 하나에 교육씩이나 필요할까 했었는데, 의외로 대단히 유용했다. 같은 회사의 제품으로 업그레이드를 했는데, 이제 복사기도 배지를 이용해 내 계정으로 연결한 다음에 사용을 해야 된단다. 그동안에도 불필요한 출력이나 복사를 해왔던 것은 아니었지만, 내 이름을 걸고 사용을 한다니 어쩐지 종이 한 장에도 더욱 신중해지는 기분이다.
모든 신제품이 그렇듯이 우리 새 복사기에도 새롭게 추가된 기능들이 많았다. 그중에 내 맘에 쏙 들었던 기능이 한 가지 있었다. 교육 중에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오~ 하는 감탄이 저절로 튀어나왔으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신분증 복사 기능’이었다.
복사기를 이용해서 신분증을 복사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신분증 앞뒷면이 한 장에 다 나오게 복사를 하려면 약간 까다롭다. 일단 앞면을 중앙에서 조금 위쪽으로 잘 엎어놓은 다음 일반 복사를 한다. 그다음에 출력된 종이를 다시 수동 트레이에 넣은 다음, 뒤집은 신분증을 아까 하고는 엇갈리게 놓은 다음에 다시 복사를 해야 한다.
그런데 이 과정 중에 흔히 발생하는 문제는 수동 트레이에 넣는 종이의 방향이다. 이 지점에서 항상 헷갈린다. 인쇄된 면을 위로 놓아야 하는지 아니면 아래로 오게 두어야 하는지 멍해지면서 길을 잃은 기분이 된다. 그 결과, 꼭 한 번씩 양면으로 찍어내는 실수를 하고 난 다음에서야 마침내 제대로 된 복사본을 얻는다.
그런데 이 새로운 신분증 복사 기능을 선택하면 상황이 아주 간단해진다. 이전처럼 앞면 복사를 하고 신분증을 뒤집어서 같은 위치에 놓고 그냥 시작 버튼을 한 번 더 누르면, 복사기가 앞면 뒷면을 위아래로 알아서 배치한 뒤 한 장의 결과물을 내놓는다. 나만 이런 기능을 모르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이거 완전 혁신 중의 혁신이다.
기계의 개발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또 끊임없이 더 나아지게 개선하는 업무를 하고 있는 입장에서 생각하건대, 이런 기능을 가능하게 하는 일이 생각처럼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기존 제품에 어떤 기능을 추가하려고 할 때는, 그 기능이 어떤 식으로든 수요가 있고 중요성을 가져야만 한다. 이 복사기가 민원 업무를 많이 하는 동사무소나 은행에만 팔리는 것도 아닐 텐데, 수천 장의 복사 업무 중 한 번 할까 말까 한 이 사소한 사용을 편리하게 하겠다고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 회사의 배려가 그래서 더 고마웠다.
매일 하루 종일 신분증 복사만 해대고 있지는 않지만 가끔 하는 이 일이 매번 까다로운 데다가, 내 옆자리 동료처럼 참을성 없는 사람들에게는 은근히 신경질이 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마치 별것 아닌 것 같으면서도 사용자들에게 상상보다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었다.
신기한 것은 이 기능에 대한 소개를 듣고 난 이후, 문득 이 복사기가 특별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생각하자니 좀 우스운데, 이 복사기가 뭔가 나를 위해 애써주는 느낌 혹은 도와주고 싶어 하는 친절한 느낌이랄까. 동시에 마음의 눈이 번쩍 뜨였다. 혁신은 반드시 세상을 구원할 만한 거창한 일이 아니어도 좋고, 감동은 아주 사소한 배려로부터 전해져 온다는 깨달음이 가슴속에 성큼 들어왔기 때문이다.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중에 잘 나고 똑똑하고 예쁘거나 멋진 사람이 널렸다. 이력서만 봐도 학력·경력이 화려한 사람들이 줄을 섰고, 사진만 봐도 모두가 연예인이 따로 없다. 그런 사람만 추리고 또 추려내도 끝없이 넘쳐날 것 같다. 그런데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차이를 만드는 것은, 어쩌면 사소한 배려 아닐까?
아주 오래전, 길을 가다가 멋진 바바리코트를 잘 차려입고 걸어가던 한 남자를 본 적이 있다. 키도 크고 옷을 입은 품새도 너무 멋져서 누구나 한 번쯤 뒤돌아보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거침없이 걷던 그 남자의 바바리 자락이 바로 옆을 지나가던 꼬마 아이의 얼굴을 스쳤던 모양이었다. 순간, 아이는 그 자리에 멈춰 섰지만, 그는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듯 친구와 계속 이야기를 하면서 지나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남자, 뭔가가 느껴졌는지 문득 멈춰 섰다. 뒤를 돌아보고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됐는지 곧바로 꼬마 아이 쪽으로 성큼성큼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 멋진 바바리코트가 땅바닥에 쓸리는 것도 아랑곳없이 아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이의 눈높이에 자신의 눈을 맞추고 작은 어깨를 두 손으로 감싸고는 아이가 괜찮은지 다정하게 살피는 모습이었다.
캬~! 이렇게 멋져도 되는 것인가!
바로 그런 순간이다. 아주 작은 진심 어린 배려로 인해 한 사람이 특별히 반짝이는 순간 말이다.
요즘 가을이라 매일 날씨가 촉촉한데도, 마음은 자꾸 건조해지는 느낌이 든다. 사람들의 좋은 점을 보는 대신 어설프게 판단을 하려 하질 않나, 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 맘에 안 든다며 미운 말을 한다. 그래서인지 오늘따라 유독 친절한 복사기 앞에서 머쓱해진다.
하지만 나는 우리 모두의 가슴속 어딘가에는 분명 감동을 출력하는 신분증 복사 버튼이 숨겨져 있다고 믿는다. 아주 조금만 더 세심하게 마음을 들여다본다면, 곧 내 마음 안에서도 이 아름다운 버튼을 찾아낼 수 있겠지. 그렇게 마음도 시선도 조금 더 포근해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