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궁

11.

by 최신글

우리는 말 없이 만경강을 따라 걸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강변에 놓인 벤치에 앉았다.

상철이 편의점에서 사 온 술을 자신의 컵에 따랐다. 많이 취한 듯 보였다.


상철아, 너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냐? 좀 천천히 마셔.

……

야야, 됐어, 됐어. 나는 안 마셔도 돼. 누구 한 명은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할 거 아냐? 음? 야, 너 뭐냐? 설마, 너 지금 우는 거냐?

크흐윽, 미안하다, 태영아. 울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크흑. 아이고야, 오랜만에 만난 친구 앞에서 이게 무슨 망신이냐?

아냐 아냐, 괜찮아. 남자는 뭐 어디 울지 말라는 법 있냐? 자자, 여기 손수건. 그거 너 가져라. 아냐, 됐어. 고맙기는, 내가 더 고맙지. 우리 어머니 장례식 말이야. 그래. 못난 자식 때문에 조문객 하나 없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친구 하나는 잘 뒀네.

아니야. 뭐, 나도 순수한 의도로 간 건 아니었으니까. 장례식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태영아, 나는 정말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죽는 거 말이야. 죽음이라는 거, 나랑은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라고만 생각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네 어머니 장례식이랑 준수의 죽음을 보고 나니까, 정말 다르게 느껴지더라. 현실로 확 다가온다랄까? 머리로만 알고 있던 거랑은 완전히 차원이 달라. 태영아, 나 솔직히 정말 무섭다. 만일 준수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거면 어떡하지? 응? 누군가 우리의 일을 알고 복수를 하는 거면 어떡하지?

대체 복수는 누가 복수를 한다고 그래? 좋아, 말 나온 김에 아까 하던 이야기를 계속해보자. 술집에서 네가 하려다만 이야기가 대체 뭐야? 대체 무슨 사정이길래 다 큰 놈이 이렇게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는 거야?

야 임마, 아까는 울어도 된다며? 이제 와서는 또 놀리냐?

아니, 상철아. 내 말은 그게 아니라…… 하, 그래―씨. 놀린다. 왜? 내가 너 좀 놀리면 어디 덧나냐? 응? 아니, 너 같으면, 양복이랑 점잖게 쫙 빼입은 다 큰 아저씨가 애새끼마냥 질질 짜고 있으면 한심해 보이지 않겠냐? 아하하. 알았어, 알았어. 그만할게. 야, 아까 전까지만 해도 친구 어쩌고 하더니만, 그 주먹은 또 뭐냐? 응? 한 번만 더 놀렸다가는 사람 한 대 치겠다, 너?

친구는 무슨 놈의 얼어 죽을 친구. 야, 네가 친구냐? 응? 아주 그냥 웬수지 웬수. 진짜, 친구만 아니었어도 진즉 쥐어팼어야.

하하. 알았어, 알았어. 미안해. 놀린 건 사과할게. 됐지? 자, 이제 감정이랑은 다 털어놓고 어른답게 이야기를 해봐. 내가 이해할 수 있게끔 말해보란 말이야. 한수아 사건이란 게 대체 뭐야? 너는 어떤 사실을 알고 있는 거지? 내가 모르는 게 뭐냔 말이야?

후, 좋아. 다 말할게. 미리 말하지만, 나는 네가 왜 이렇게 행동을 하는지 모르겠어. 정말 모르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을 하는 건지. 확실한 건, 너는 그때 나랑 같이 있었어. 그러니까 너도, 내가 봤던 걸 같이 봤던 거야. 너, 나, 준수. 우리 셋은 같이 있을 수밖에 없었어. 왜냐고? 그날은 매점 사건이 있었던 당일이었으니까.


이십여 년 전, 중학교.


야, 이준수. 어떻게 됐냐?

어떻게 되긴 이 형님이 다 알아서 잘 해결했지.

형님은 무슨 놈의 얼어 죽을 형님? 이게 다 니네 아버지 덕분에 산 거 아냐. 군의원이신 아버지 덕분에 살았으면서 무슨 놈의 형님이야? 애초에 네가 빵을 훔치자고 말만 하지 않았어도 이런 사달은 나지도 않았어.

그래도 이렇게 다 잘 풀려나서 어디야. 그렇지 않냐, 태영아?

우리야 당연히 그렇지. 그런데 준수 너는 집에 가서 아버지한테 줘 터지는 거 아니냐? 괜히 걱정되네. 하하.

그나저나 이런 시골의 군의원이라도 입김이 세긴 세구나. 그 성질 더러운 교장이 저렇게 고분고분해질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야, 군의원은 뭐 아무나 되는 줄 아냐? 다 남들보다 뛰어난 뭔가가 있으니까 하는 거 아냐. 안 그래? 참고로, 나도 나중에 정치나 해볼까 생각하고 있으니까, 미리미리 나한테 잘 보여놔.

오, 그래? 이준수, 네가 정치인 되면, 나도 좀 봐주는 거냐? 응? 우린 친구잖아. 하하.

그건 네가 앞으로 하는 거 봐서. 야, 김태영.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내가 정치인이 된다는데.

나야 뭐, 아무 생각 없는데? 네가 한다면 하는 거겠지. 그래도 다른 사람이 정치를 한다고 말했다면 웃었겠지만, 너는 이준수잖아. 네가 한다면야 가능하지 않을까?

하하하. 역시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좋아. 만약에 내가 정치인이 된다면, 우선 너부터 내 밑으로 넣어줄게. 넌 좀 쓸만한 거 같으니까.

야, 뭐야? 그럼 나는? 나는 안 넣어줄 거야?

너는 시험을 좀 먼저 봐야 해.

야, 이준수! 이놈이 조금 뛰어주니까 아주 사람을 뭐로 보고.

하하하. 그것 봐. 넌 그게 문제야. 마음이 너무 감정적이야. 조금만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발끈해버리지. 그 울컥하는 성격만 좀 어떻게 하면 좋을 텐데. 네가 그러니까 여자들한테도 인기가 없는 거야.

뭐? 야, 그럼 너는 뭐 인기 많냐? 응? 툭 까놓고 말해서, 여기 있는 세 놈 다 똑같이 모태 솔로 아냐? 안 그러냐, 태영아?

나야 뭐 그렇긴 한데. 설마 이준수, 너 혹시 여자한테 고백받았나?

뭐? 설마! 얘 맨날 우리랑만 같이 어울려 다녔잖아. 여자들한테 잘 보일 시간이 어디 있었다고?

쯧쯧. 하여튼, 사람 생각하는 수준하고는. 굳이 여자들한테 잘 보여야만 고백받을 수 있냐? 네가 인기 없다고 남들도 인기 없을 거라는 생각은 좀 고쳐줄래? 그런 노력은 안 해도, 뭐, 이 몸이 워낙에 출중하잖냐. 하하. 키도 되고, 외모도 되고, 집안도 되고. 그래서 나 좋다고 따르는 여자들도 좀 있지.

하하하. 난 또 뭐라고. 이준수, 이거 듣자 듣자 하니까 완전 관종이네? 오늘 좀 띄워주니까 온 세상이 아주 그냥 너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지? 응?

아 이 자식이, 맨날 속고만 살았나. 내가 넌 줄 아냐? 진짜라니까? 나 좋다고 따라다니는 여자애들 많아.

하하하. 태영아. 너는 지금 이놈 말을 믿냐? 응? 야, 이 세상에서 널 좋아하는 여자는 네 엄마뿐이겠지! 아니면 또 누구있냐? 네 할머니? 야, 야. 왜 갑자기 주먹을 쥐고 그러냐, 사람 무섭게. 넌 그게 문제야. 마음이 너무 감정적이야. 조금만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쉽게 발끈해버리지. 그 성격만 좀 어떻게 하면 좋을 텐데. 아하하하. 아, 알았어, 알았어. 이제 안 놀릴게. 오늘은 네 아버지 덕을 좀 봤으니까 믿어줄게. 암! 이 형님이 믿어주고말고! 하하.

아이 자식이 진짜, 사람 뚜껑 열리게 만드네. 야, 너 내가 증명할 수 있으면 어떻게 할래? 응?

뭐? 증명? 하하―! 만약 네가 이 세상에서 너 좋다는 여자애를 단 한 명만이라도 내 앞에 데려 온다면, 내가 그날부터 바로 널 평생 형님으로 모신다.

그래? 좋아. 너 그 말 취소하지 마라. 야, 김태영. 너도 상철이가 하는 말 들었지? 잘 봐라. 내가 어떻게 하는지. 아, 뭐, 금방 끝나겠네. 너희 둘 다 여기 숨어있어 봐. 이 형님이 금방 여자 친구 하나 만들어 올 테니까.

야, 태영아, 쟤 갑자기 어디 가냐? 어라? 쟤 지금 뭐 하냐? 야, 지금 체육 시간인데 교실에는 왜 가?

글쎄. 저렇게 자신 있게 나서는데, 뭔가 계획이 있지 않을까?

계획은 무슨. 야야야, 근데 교실에 쟤는 누구냐? 혼자 교실에서 엎드려 있는데? 아, 걔네 걔. 그 누구였더라? 맨날 혼자 다니고. 아, 그래. 한수아. 아이고, 쟤는 앞머리가 저게 뭐니? 응? 얼굴도 안 보이게. 답답하지도 않나? 누가 언뜻 봤는데, 얼굴은 이쁘다더라. 그러면 뭐 하냐? 저렇게 음침해가지고. 저녁에 마주치기라도 하면 귀신이라고 해도 믿겠다. 어라? 근데 준수는 왜 쟤한테 다가가냐? 설마? 설마, 설마. 이준수를 좋아한다는 얘가 쟤였어? 아―, 갑자기 뭔가 불길한데? 너도 그렇지 않냐? 갑자기 느낌이 쌔―하잖아. 그치? 와, 이거 완전히 기울어진 운동장 아니냐? 아무리 내기라지만, 다 이긴 게임을 하는 건 좀. 야야, 태영아. 지금 준수가 뭐라고 말하는 거냐? 응? 쟤 지금 상대가 만만하다고 간도 안 보고 바로 고백 때리는 거냐? 응? 그런 거냐?

아이씨, 좀 조용히 해봐. 잘 안 들려.

아, 이거 좀 이상한데? 야, 태영아. 갑자기 어디선가 사기 스멜이 솔솔 나는 것 같지 않냐? 응? 난 말이야, 사기를 치는 새끼들을 보면 아주 단박에 알아맞추는 능력을 타고났다 이거야. 저저, 이준수 저 개새끼 하는 것 좀 봐. 응? 저놈 하는 거 보니까 딱 이네 딱. 저것 봐, 저거. 우리한테 인기 많다고 구라친 거 걸릴까 봐 일부러 만만한 여자애 고른 것 좀 봐. 안 그러냐?

하하. 야, 곽상철이. 넌 평생 속고만 살았냐? 본인이 진짜라는데, 진짜일 수도 있지. 뭘 그래? 우리야 뭐, 맨날 어울려 다니니까 모를 수도 있겠지만, 남들이 보면 우리 중에 준수가 제일 잘 생겼다고 말할걸?

이, 이놈이 또 무슨 헛소리를. 네놈은 합리적인 의심이란 것도 모르냐? 응? 뭐야, 가만있어 봐. 하,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김태영이, 네놈이 벌써부터 권력의 개가 되기로 결심한 거냐? 응? 저놈이 나중에 정치질 한다니까 벌써부터 좋다고 꼬리 쳐주는 거야? 뭐야?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줄 잡는 데는 아주 선수였구나, 선수. 야, 어떤 미친놈이 준수가 잘 생겼다고 말해? 눈깔이 뒤통수에 달리지 않는 이상, 그럴 일은 절대로 일어날리 없어. 암, 그렇고말고. 그건 나 곽상철이가 보장한다!

하하. 생각보다 많을걸? 저것 봐. 쟤도 준수의 말에 반응하는 것 같은데?

어라? 진짜네? 야, 근데 무슨 말이 들려야 돌아가는 상황을 알겠는데, 아무 소리도 안 들리니까 답답하다. 아이참. 수아 쟤는 표정도 안 보이게 머리카락을 저렇게 길러가 지고. 어, 어라? 준수 저놈은 또 왜 갑자기 발끈하냐? 얼씨구? 이제는 여자 어깨를 잡아서 힘으로 일으켜 세우네? 하하. 야,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면, 그게 꼬시는 거냐? 협박하는 거지. 이놈 이거 완전 개 쌍 또라이 아니냐? 응? 야야, 저건 좀 심한 거 같은데? 태영아. 우리가 들어가서 좀 말려야 하는 거 아니냐? 저러다 사고라도 나면, 으악―!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던 걸까?

나와 상철은 교실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야, 씨발, 이준수! 너 미쳤어?

아, 아니. 나는, 나는 이러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싯팔, 이러려고 한 게 아니긴. 저리 비켜봐. 아이 씨발. 야, 이거 어쩌지? 얘 지금 숨을 안 쉬는 것 같은데? 김태영, 너도 이리 와서 한 번 확인해봐. 얘 지금 숨 쉬냐? 숨 안 쉬지? 안 쉬는 거 맞지? 아아악! 씨발 이준수, 이제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아, 아니야. 난 아니야. 난 그냥 살짝 밀었단 말이야. 얘가 사람 말을 우습게 보는 거 같아서, 좀 열 받아서, 살짝 밀었던 것뿐인데. 자기가 그쪽으로 넘어졌단 말이야. 내가 안 했어. 내가 안 했다고. 너희도 봤잖아. 그렇지? 자기가 스스로 넘어져서 머리를 부딪친 거란 말이야. 그렇지?

야 이 싯팔 새끼야! 그 말을 누가 믿어? 너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응? 아이 시발, 진짜―! 이제 어쩔 거냐고. 응? 야 이 개새끼야, 네가 사람을 죽였어. 네 손으로 사람을 죽였다고! 이게 지금 실수로 넘어갈 일이라고 생각해?

곽상철! 조용히 말해. 조용히 말해도 다 들리니까, 큰 소리 좀 치지 마. 정신 사나워.

아이 싯팔, 김태영이! 너 지금 내가 조용조용 말하게 생겼어? 응? 이제 곧 체육 시간도 끝날 거고, 사람들도 우르르 몰려들 거야. 걔들이 이걸 보고 뭐라고 생각할까? 응? 수아가 사고로 죽었어요. 라고 말할 것 같아? 이건 매점에서 빵을 훔친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라고. 알아? 아이 씨발―! 이준수. 너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응? 또 니네 아버지 부를 거냐? 너네 잘난 아버지가 이것도 처리해 주신다디? 어? 지금 이게 니네 아버지가 오신다고 해결될 것 같아?

야 이 싯팔, 거기서 우리 아버지가 왜 나와?

야 이 시발놈아, 그럼 왜 상황을 좃같이 만들어놔서 이 지랄인데? 야 이 개새끼야, 누가 언제 사람을 꼬시랬지, 이래 쳐 죽여 놓으랬냐? 응? 너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뭐라고 말 좀 해봐, 이 씨발놈아. 아이씨팔! 어쨌든 난 몰라.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야 이준수, 이 사건은 전부 네 잘못이다. 그러니까 네가 다 짊어져. 알았어? 이 일에 나랑 태영이는 아무 상관도 없는 거다.

야, 곽상철이. 이 시발놈아. 네가 그러고도 친구냐? 어? 네가 친구야? 그리고 네가 무슨 아무 짓도 안 해? 너도 지켜보고 있었잖아. 일이 이렇게 잘못될 줄 알았으면, 왜 진즉 나서서 말리지 않았었냐? 응? 왜 나서지 않고 지켜 보고만 있었는데? 그럼 너도 어느 정도는 책임이 있는 거 아니냐? 뭐 이 시발놈아, 여기서 나 혼자만 죽을 것 같아? 내가 죽으면, 너희도 다 죽는 거야. 알았어?

이 미친 새끼가 돌았나. 야 이 싯팔새끼야, 그럼 네가 친구냐? 어? 혼자 죽기 싫다고 친구를 사지로 잡아끄는 새끼가 친구야?

…… 자살로 만들자.

뭐 임마?

넌 또 뭐라는 거야? 김태영.

자살로 만들자. 그러면 되잖아. 아직 사람들도 안 왔으니까 이 사건은 아직 우리밖에 몰라. 어차피 수아는 평소에도 음침한 성격이었으니까 자살을 한다 해도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지는 않을 거 아냐? 그냥 평소에 우울증을 좀 앓고 있었다고 생각하겠지. 우리야 걸리지만 않으면 상관없잖아. 안 그래? 그러니까, 우리만 입 다물고 있으면 이 세상에서 사건의 진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져. 안 그래? 왜? 그러면 안 돼? 왜 안 되는데? 지금 이거랑 빵을 훔치는 거랑 뭐가 달라? 그거나 이거나 전부 우리의 이득을 위해서 하는 거잖아.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하는 거잖아. 안 그래? 사람 목숨이라서? 사람 목숨이 뭐가 그렇게 특별한데? 뭐가 그렇게 중요한데?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거였으면, 그렇게 특별한 거였으면, 애초에 사람을 죽이지 말았어야지. 이제 와서 후회할 거였으면, 처음부터 그런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안 그래, 이준수?

으, 응? 그, 그래. 그렇지. 그러면 되겠다. 태영이 말대로 하면 되겠다. 자살로 꾸미면 되겠어. 여, 역시 태영이는 내 친구라니까? 확실히, 우리만 비밀로 하고 있으면 아무도 모를 거야. 우리만 입 다물고 있으면 아무 문제 없어. 그렇지? 우린 친구잖아. 그러니까, 우리 비밀은 절대로 깨질 리 없어.

좋아. 곽상철이, 너는 어때? 너도 우리 친구지? 그렇지? 우린 친구니까 준수네 아버지가 우리까지 돌봐주셨겠지. 안 그래? 만일 우리가 친구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남남이었다면, 그래도 준수네 아버지가 우리를 도와주셨을까? 아니지? 당연히 아니겠지! 준수네 아버지가 미쳤다고 너를 왜 도와줘? 자기 아들도 아닌데. 이미지가 생명인 정치인이 스스로 위험부담을 안으면서까지 너를 도와줄 이유가 어디있어? 뭐? 자기 아들이 관련된 사건이라서? 그래, 네 말대로 그럴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이유가 어떠하든, 결과적으로 보면 너도 혜택을 받은 건 사실이잖아. 준수네 아버지가 대신 사건을 처리해준다고 나섰을때, 네가 거부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잖아. 안 그래? 그러니까 생각을 좀 해봐. 너는 네가 어려울 때는 좋다고 친구의 도움을 날름 받아먹고는, 그 친구가 이제 조금 불리해졌다고 내빼겠다는 거야? 너 혼자만 살아남겠다고? 너를 도와주었던 친구가 지금 너한테 도와달라고 손을 내미는데도? 그렇게 해서 살아남는다 한들, 네가 마음 편히 발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아?

야 이 시발, 김태영이. 아무리 그래도, 그때랑 지금이랑은……

다르다고? 뭐가 다른데? 말해봐, 뭐가 다른지 말을 해 보라고. 없지? 당연히 없겠지. 왜냐하면, 너한테는 다를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너는, 똑같이 우리만 믿고 따라오면 돼. 알겠어? 곽상철이?


내 얼굴에서 귀신이라도 본 걸까?

상철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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