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박영희―!
상철아! 곽상철! 정신 좀 차려봐! 야, 곽상철!
시끄러워. 누구 덕분에 아직 죽지는 않았어.
박영희…… 정말 너였구나.
뭐야? 알고 있었던 거 아니었어? 찍었는데 맞았다는 건가? 뭐, 어찌 되었든 상관없어. 왜 다시 온 거야? 네가 시내버스를 타고 가는 것까지는 확인했었거든. 도중에 내려서 다시 온 건가?
그래, 맞아. 버스에서 내려서 엄청 달려왔어. 여긴 시골이라 교통편이 많지가 않잖아. 못해도 세 정거장은 달렸던 것 같은데? 하하. 인생 참 웃기지? 어렸을 땐 아버지가 싫어서 죽어라 달렸던 경험이 이렇게 친구의 목숨을 구하기도 하네.
후후, 그래. 네 말을 듣고 보니 생각난다. 너는 어렸을 때부터 늘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었어. 같은 마을에 살았었으니까, 그런 기억도 나네. 그때 이후로 이십여 년만인가? 내가 여기 있을 줄은 어떻게 안 거야?
감이야.
감?
그래. 이런 말을 하면 네가 웃을 수도 있겠지만, 만일 누군가 상철이를 죽이려고 계획했다면, 분명 오늘 밤이 제격일 거라고 생각했었어. 왜냐하면, 상철이 술에 취해 있어야만 사고사로 만들기 편할 테니까. 게다가 상철을 데려다준 사람이 나였으니 범인은 일석이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상철이 죽는다면, 경찰은 가장 먼저 나를 용의자로 의심할 게 분명할 테니까. 설령 경찰이 의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부에 있는 누군가가 의심하도록 만들겠지. 뭐, 달리기가 빠른 덕분에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었지만.
흠, 감이라. 좋아, 김태영. 나는 웃지 않아. 요즘 아무리 과학수사가 발달했다 해도, 경찰도 결국은 감이란 거에 의존하기 마련이거든. 이성과 오감에 기인하는 감이라면 나름 쓸만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네 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내가 오늘 상철을 죽이러 온 이유는, 단지 오늘이 내 비번이었기 때문이야. 알리바이를 만드는 건 쉽지만, 근무시간을 맞추기란 정말 어렵거든. 공무원이니까. 물론, 오늘 네가 상철과 술을 마셔준 덕분에 일이 좀 더 수월할 뻔했던 건 사실이야. 솔직히 깜짝 놀랐었어. 네가 다시 돌아올 줄은 몰랐거든. 소설가한테도 그런 감이 있는거야? 몰랐네?
뭐?
뭘 놀래? 내가 모를 줄 알았어?
…… 너도 내 책을 읽은 거야?
그래. ‘미궁’ 맞지? 훗, 내가 그 책을 읽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너는 감히 상상도 못할 거야. 경찰이 되어서도 못 찾았던 사건의 실마리를 서점에서 발견하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어? 그때 받은 충격은 정말이지 이 세상의 어떠한 말로도 다 설명할 수 없을 거야. 서점에서 네 책을 읽는데, 눈물, 콧물이 다 줄줄 흘렀다니까? 어찌나 충격을 받았던지 점원이 와서 괜찮냐고 물어보고 나서야 내가 울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었어. 훗, 웃기지? 나만큼 네 책을 감명 깊게 읽은 독자가 또 있을까?
글쎄. 그래도 왠지 고맙다는 말은 별로 하고 싶지가 않네.
흥. 뭐 어쨌든 난 말이야, 중학생 때부터 수아의 죽음과 관련된 진실을 쫓고 있었어.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나도 모르게 조금씩 지쳐가더라. 세상일이라는 게 열정만으로 되는 게 아니잖아? 그래서 이대로 그만 포기를 해야 하나 싶었는데, 네 책을 만났던 거야. 나는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평소라면 못 보고 지나쳤을텐데, 하늘이 도왔다고 해야하나? 네 책, 꽤 유명했었잖아. 남들 따라 그냥 한 번 읽어 본 책에서 인생의 의미를 다시 발견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책을 읽는 내내 세상이 밝아 보이더라고. 그래서 이건 내 정성에 감동한 하늘이 나에게 내려주신 기회구나, 라고 생각했었어. 정말이야. 책 한 권이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는 말에 이런 경우도 포함될 수 있으려나? 후훗.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어. 저자가 모르는 사람이었던 거야. 그래서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었지.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책의 내용만은 수아와 관련된 사건이라고 확신했었어. 네가 말했던 감이었던 거지.
그래서 준수를 죽인 거야? 내가 쓴 책을 읽고?
아니.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어. 그 책이 아무리 하늘이 내려주신 계시라 하더라도 그 내용은 어디까지나 소설일 뿐이잖아. 그러니까 확인을 해야만 했어. 이 책의 내용이 진짜인지 아닌지. 그러다가 좋은 생각을 떠올린 거야.
동창회 말이지?
그래, 맞아. 동창회야. 동창회라면 사람들이 경계심을 풀고 좀 더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었거든.
하지만 다들 모이기를 꺼려했을 텐데? 수아의 일이라면, 오랜만에 만난 동창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함께 추억할 만한 그런 기분 좋은 사건은 아니었잖아.
그것도 맞아. 그래서 한가지 꾀를 냈지. 동창회의 성격을 우리 불쌍한 수아를 추모하는 형식으로 갖자고. 그랬더니 이번에는 자기들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또 안 모이네? 그 빌어먹을 새끼들이. 지들이 친구라고 말 할 때는 언제고, 자기들한테 조그마한 이득이라도 없으면 금세 고개를 돌려버리잖아. 그래서 뭐, 이번에도 또 꾀를 내야만 했어.
황지선?
그래 맞아, 황지선이! 어쩜, 우리 좀 통하는 게 있는가 본데?
아니야, 됐어. 그런 말은 사양할게.
흥. 뭐 어쨌든, 나는 남자 세 놈을 어떻게든 동창회에 불러내려고 노력했었어. 그놈들만 나오게 만들 수 있다면, 나는 미인계뿐만 아니라 어떠한 짓도 마다하지 않았을 거야. 그 세 놈이 누구냐고? 누구긴 누구야? 이준수, 곽상철, 그리고 너, 김태영이지.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그중 두 놈이 다음 동창회에 바로 나타났지 뭐니? 하여튼 남자들이란. 아, 참고로 황지선이는 진짜 황지선이 아니야. 황지선이 역할을 대신한 배우였지. 실제 연극배우 말이야. 오랜 기간 동창회를 열었더니 대충 동창들 신상 파악이 되더라고. 그래서 연락이 닿지 않는 사람들 중의 한 명의 신분을 빌렸었어. 이것도 알고 있었으려나?
글쎄. 설마 하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걸 네 입으로 직접 들으니까 왠지 소름 돋는데? 너 어디 영화 찍니? 현실에서 그런 일을 한다는 게 말이나 돼?
어머, 영화를 찍다니? 그게 무슨 개뼈다귀 같은 소리니? 친구의 죽음과 관련된 진실을 파헤치려고 자신의 모든 인생을 바친 사람한테. 아 그리고, 황지선이 역할을 맡았던 배우도 사정은 알고 있어. 내 직업이랑, 매년 동창회를 여는 취지를 설명했더니, 자기 혼자 사명감에 불타오르더라? 시키지도 않은 일도 스스로 나서서 알아보던데? 뭐, 덕분에 나는 더 많은 정보를 손쉽게 알 수 있었어. 그렇게 얻게 된 여러 정보를 조합해보니까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더라. 첫째, 준수나 상철은 책의 작가가 아니다. 둘째, 하지만 그 책과 관련된 내용은 알고 있다. 그리고 셋째, 수아의 죽음과 관련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그 무언가라는 건 이미 책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말이야. 그래서 작전을 좀 더 구체화하기로 했어. 그래서 그 배우분에게 준수나 상철에게 좀 더 접근해보라고 시켰었지. 그래서일까? 준수, 그 개새끼가 어찌나 업되었던지, 어떻게든 배우랑만 따로 2차를 가려고 애를 쓰지 뭐니? 하하하. 마지막에 외제 차를 타고 사라지는 배우를 보고는 그놈이 비 맞은 개새끼마냥 축 처지는 꼬라지를 너도 봤어야 했는데.
아냐. 안 봐도 알 것 같아. 준수는, 우리랑 많이 어울려 다니긴 했지만, 사실 걔는 여자들 사이에 있어야 더욱 활기를 띠는 타입이니까.
흥, 꼴에 친구라고 지금 포장해주는 거니? 뭐 어쨌든,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긴 했었지만, 전혀 초조해하거나 지루해하지는 않았어. 오히려 하루하루가 즐거워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니까? 이제 모든 진실이 밝혀졌으니 복수만 하면 되는 거 아냐? 그래서, 어떻게 복수를 할지, 네놈들을 어떻게 죽일지, 어떻게 죽여야 우리 수아가 마음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지, 매일 밤잠을 설쳐가며 고민했었어. 너한테 고맙다고 말해야 하나?
너 미쳤구나.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 틀림없어. 너 경찰 아니냐? 경찰이 그래도 된다고 생각해?
시끄러! 나쁜 짓을 한 놈들에게 벌을 준다는 데 그게 뭐가 그렇게 나빠? 응? 하여튼, 그놈의 경찰 타령은. 나쁜 놈들이 꼭 지들 불리해지면 법이니, 경찰이니, 아주 그냥 떼를 쓴다니까? 세상 참 편하지? 착한 놈이든, 나쁜 놈이든, 법 앞에서는 모두가 공평하니까.
법이 공평한 게 무슨 잘못이냐? 국가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당연한 거 아니야? 응? 공무원 시험은 대리로 쳤니?
흥, 백수 새끼가 말은.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런 게 시스템이겠지. 국가라는 시스템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시스템 자체가 그 안에 있는 모든 구성원을 포용해야 하는 거겠지. 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국가란 대체 뭘까요, 김태영 작가님? 응? 누군가 그러더라, 국가라는 건, 선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공동체라고. 흥, 말은 좋지. 아무리 좋은 취지도, 아무리 좋은 집단도, 규모가 커지면 너희 같은 프리라이더가 생기는 법이야. 법꾸라지가 생긴다고! 너는 내가 지금까지 수아의 죽음과 관련해 얼마나 많은 의혹들을 제기했는지 알기나 하니?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도, 어느 누구도 내 말에 귀를 기울여주지 않았어. 진실을 찾아 발버둥을 칠수록,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그러니까 더욱 국가 시스템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해야지!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우니까, 아예 법은 무시하고 자경단이라도 설립하겠다는 거야? 응? 설마 지금 반정부주의로 가겠다는 거야? 그런 단체가 인류의 발전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잖아. 너도 처음에는 시스템 내부에서 변화를 만들어 내려고 경찰이 된 거잖아. 어렵게 공부를 해서 경찰이 된 것도 다 법에 맞게 사회 정의를 실현하려고 했던 거잖아. 합법적으로 진실을 좇으려고 했던 거잖아. 아니야?
맞아, 처음에는 그랬었지. 그러고 싶어서 경찰이 되었지. 그런데 말이야, 아무리 내가 사회 정의를 실현하려고 해도,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과거는 바꾸지 못하겠더라. 한 번 흘러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겠더라. 경찰 내부에서도 이미 종료된 사건을,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서 증거조차 남지 않은 사건을, 되살릴 수는 없겠더라.
그래서 뭐야? 시간을 과거로 되돌릴 수 없으니까, 진실은 알아도 법정에서는 이길 자신이 없으니까, 결국 자기 손에 피를 묻히겠다는 거야? 그렇게 하면 뭐가 달라지는데? 네가 그렇게 하면, 죽은 수아가 살아서 돌아오니? 과거가 되돌려지니? 죽은 친구를 생각하는 네 마음은 충분히 알겠어. 하지만 수아가 지금의 네 모습을 본다면 뭐라고 말할까? 응? 잘한다고 박수라도 쳐줄 것 같아? 좋다고 웃어줄 것 같아? 수아는 네 친구라며? 친구가 지금 스스로 파멸해가는데, 기뻐할 것 같아?
나도 알아!
그런데 왜?
…… 잊혀지지가 않으니까. 뭐라도 하지 않으면, 괴로워서 미쳐버릴 것만 같으니까! 그래서 네놈들을 죽이기로 결심했어. 국가도, 경찰도, 오래된 보고서도, 흘러간 시간도, 불완전한 인간도, 그 어떠한 것도 과거의 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내가 직접 나서서 해결하면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었어.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 내가 직접 나서는 거라고. 왜? 왜 안 되는데? 응? 너도 그랬었잖아. 그래서 너도 ‘미궁’을 집필한 거였잖아. 자신의 괴로움을 도저히 떨쳐내지 못해서 작가가 된 거였잖아. 자신의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덜어보려고 수아와의 사건을 세상에 폭로한 거였잖아. 내면에서 폭발하듯 끓어오르는 욕구를 어떻게든 해소하기 위해서 글을 쓴 거였잖아. 그렇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만 같아서, 터져버릴 것만 같아서, 자신이 살기 위해서, 책을 쓴 거였잖아. 자신의 행복을 위해 부모를 떠난 거였잖아. 그리고 다시 고향에 돌아온 거였잖아. 자신의 행복은 스스로 쟁취하는 거라며? 그러니까 너는 나를 이해하지? 이해할 수 있겠지? 그렇지?
아하하하하하하하하.
뭐니, 김태영? 왜 갑자기 쳐 웃고 지랄이니? 사람 무안해지게. 아까는 나보고 미쳤다더니, 지금 보니까 네가 더 미친 것 같은데?
아하하, 미안해, 영희야. 그렇지만,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답을 찾지 못해 괴로워했었는데, 설마 이런 상황에서, 그것도 타인의 입을 통해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었거든. 네 덕분에 이제야 머리가 좀 맑아지는 것 같다. 막혔던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아. 정말 고마워, 영희야. 그래, 맞아. 나는 네 말대로 내면의 괴로움을 덜어내기 위해 글을 쓰려고 했었어. 소설을 쓰려고 했었어. 인물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었어. 그리고 늘 실패로 끝났었지. 수아에 대한 기억 자체가 없는데 어떻게 내면의 괴로움을 덜어낼 수 있었겠어? 실체가 없는 공포가 만들어내는 미궁 속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며 괴로워만 할 뿐이었지. 내가 글자에 집착했던 이유도, 소설에 집착했던 이유도, 이제는 모두 알 것 같아. 나는 늘 인간의 깊이를 표현하려고 했었어. 그래서 인물의 내면에, 나 자신의 내면에 들어가 보고 싶어 했었지. 그래, 맞아. 이 복잡한 미궁은, 이 길고 긴 여정은, 이 모든 것들은, 단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했었어. 어쩌면 나의 본능은 잊혀졌던 수아에 대한 기억도 원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것 또한 어디까지나 현상일 뿐이었어. 내가 본질에 다가가려 할수록, 인물 속으로 들어가려 할수록, 내 앞길을 가로 막았던 공포말이야. 그래, 맞아. 내가 그토록 미궁 속에서 방황하며 찾아다녔던 본질은, 그토록 나를 괴롭혔던 본질은, 그래서 그토록 덜어내려고 했던 괴로움은, 그보다 더 깊숙한 곳에 위치한 질문이었어. 모든 인간의 중심을 파헤치는 질문 말이야. 바로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이지. 나는 대체 누구일까? 나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라는 호기심 말이야. 어때, 영희야? 너는 궁금하지 않니? 너는 대체 누구니? 대체 어떤 사람이니? 소설을 쓴다는 건, 그런 나의 무의식의 발현이었어. 글이라는 건,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 속까지 도달하도록 도와주는 도구잖아. 요즘은 영상이 대세라고는 하지만, 글자는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영상이든, 그림이든, 음악이든, 그 어떠한 방식도 글자보다 더 깊이, 더 체계적으로,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다고 보지는 않거든. 그러니까 ‘미궁’은,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나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참회록이었어. 고백록이었어. 상철에게는 내 순수 창작물이라고 큰소리를 쳤었지만, 결국은 아니었지. 후훗. 어쨌든, 내가 ‘미궁’에 적은 내용 그대로, 상철이는, 준수는, 나는, 과거에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러버렸어. 몹시 나쁜 짓이었지. 영희 네 말대로 흘러간 과거는 다시 돌이킬 수 없어. 그래서 영희야, 너는 이제 어떻게 할 거니? 우리를 모두 죽여야만 속이 풀리겠니? 이제 그만 용서해주면 안 될까? 상철이도, 나도, 과거에 했었던 자신들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어. 친구를 위한답시고 했던 행동이, 되려 우리들을 미궁 속으로 빠뜨려버렸어. 그때의 잘못된 선택으로,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시간을 고통 속에서 방황해야만 했어. 그러니까 영희야, 이제 그만 우리를 용서해 줄 수는 없을까?
김태영이, 혼자 뭐라고 떠드는 거니? 너희가 고통을 받았다고? 후회를 한다고? 그러니까 용서를 해달라고? 현재 네놈들의 모습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너희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어. 곽성철이. 이놈에 대해서는 너도 들어서 알 거 아니야? 이 자식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다른 사람들을 등쳐먹으면서 살고 있어. 그리고 이준수? 하하. 이준수가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 알았더라면 네가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응? 사람은 선하다. 나쁜 일을 저지르면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그래. 나도 한때는 그런 말을 믿기도 했었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사람들은 저마다 달라. 어떤 사람은 겁이 많아서, 양심에 찔려서, 타인에게 피해가 생길 수 있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아. 재밌지? 실제 피해가 생긴 것도 아닌데, 자기가 먼저 과하게 걱정을 해서는 스스로 행동 범위를 제한한다고.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본인에게 이익만 된다면 타인이 어떻게 되든 신경도 쓰지 않지. 내가 본 너희는 단연코 후자야. 그런데도 내가 네놈들을 용서해 줘야 할까? 응?
영희야, 너는 인간이 이기적인 게 나쁜거라고 생각하니? 응? 아니야. 그렇지 않아. 인간이 이기적이지 않다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거야. 인간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이기적이어야만해. 안 그래? 인간의 이기심이 당연하기 때문에, 이기심을 버린 사람은 타인들로부터 칭찬을 받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타인에게도 이기심을 버리라고 강요하거나 칭찬하게끔 강요할 수는 없어. 네 말대로 나는 준수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몰라. 상철은 자신이 남들을 속여왔다고 말했지만, 나에게는 그걸 입증할 만한 증거가 없어. 정말로 상철이 사기를 쳤다면, 그걸 밝혀서 정의를 구축하는 게 너희 경찰들이 해야 하는 일 아니야? 왜 자꾸 국가의 형벌권에 자신의 사적인 힘을 개입시키려는 거야? 왜 자꾸 자신의 손을 더럽히려는 건데? 그렇게 해서 네가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아? 복수를 한다고 해서 네 울분이 정말로 풀릴 거라고 생각해? 아니야, 영희야. 절대로 그렇지가 않아. 그러니까, 제발 그러지 마.
왜? 네놈이 뭔데? 네놈이 뭔데 내가 네 말을 들어야 하지? 응? 너한테 그럴 자격이나 있을 것 같아? 너도 이놈들이랑 같은 패거리잖아. 네놈도 가해자잖아! 겨우 책 한 권 써냈다고 네놈의 잘못이 사라질 거라고 생각해?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시작은 네놈 아니야? 준수는 우발적인 살인이었다 해도, 네가 했던 행동은 고의였잖아. 그런 네가 지금 내 앞에서 이래라저래라 훈장질이야?
그래 맞아, 영희야. 나는 가해자야. 가해자라서 너무나도 후회돼. 애초에 내가 자살로 만들자고 계획만 하지 않았더라면. 아니, 애초에 준수가 수아에게 다가가려고 했을 때, 그때 준수를 말렸더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라. 적어도 수아가 나에게 도움을 구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을 때, 그때 용기를 내어서 나섰더라면, 준수에게 그만하라고 소리를 질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나는 어렸어. 지금 돌이켜보면 멍청한 생각이었지만, 나는 친구가 필요했었어. 어디라도 좋으니까, 누구라도 좋으니까,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집단이 필요했었어. 가족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무언가를 절실히 갈망했었어. 그래서 준수를 감쌌어. 나에게 가장 소중한 무언가가 무너져 내리는 걸 손 놓고 바라만 볼 수는 없었으니까. 나에게 있는 유일한 안식처가 사라지는 걸 내버려 둘 수만은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게 아무리 나쁜 짓이라도, 아무리 잔인한 짓이라도, 친구와의 우정을 지킬 수만 있었다면, 그게 어떠한 짓이든 다 할 수 있었어. 그러니까 영희야, 너는 나를 이해하지? 이해할 수 있겠지? 너는 경찰관이잖아. 법으로도 소년들은 보호하게 되어있잖아. 청소년들에게는 형벌보다는 교화가 더 중요하잖아. 안 그래?
뭐? 이해? 우정? 이 씨발 역겨운 새끼야. 그걸 지금 내 앞에서 핑계라고 대는 거니? 내가 미쳤었지. 너나, 곽상철이나, 이준수나, 다 똑같아. 똑같이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어. 내가 하나 가르쳐줄까? 네놈이 수아에게 그런 짓을 저질렀던 건, 네가 그때 미성숙했기 때문이 아니야. 네놈이 그냥 나쁜 놈이기 때문이었어, 이 또라이 새끼야. 네 책을 보고 잠시나마 흔들렸던 내가 혐오스럽다. 계획에는 없었지만, 나는 네가 이렇게 다시 돌아와 줘서 너무나 고마워. 늦게라도 네놈의 본모습을 볼 수 있었으니 말이야. 아주 잘 됐어. 지금 네놈도 상철이와 같이 죽여버리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