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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준 Mar 12. 2021

산책과 커피

제 7호. 카페 수아베

♬ 널 부르는 밤 - 나얼


세상에서 가장 나른한 시간, 오후 3시. 이대로 있다간 할일을 다 제쳐두고 잠에 들 것만 같다. 서영이가 보내준 일리 포르테 캡슐로 커피를 타서 먹었지만, 아무래도 집에 있으면 아무 것도 못할 듯하다. 그래, 나가자. 오렌지 색의 숏비니에 네이더스 후드를 뒤집어쓰고 곧바로 집 밖을 나선다.


오늘은 햇살이 정말 좋았다. 후드티에 조끼패딩 차림이었음에도, 잠시 걷는 그 사이에 땀이 흐른다. 이럴거면 조끼패딩도 안입을 걸 그랬다. 집 근처에 있는 여느 카페에 갈까 싶었지만, 오늘은 왠지 조금 더 걷고 싶다. 그래, 홈플러스까지만집에서 도보로 약 25-30분 거리 가자. 약 50m 정도 앞에 아주 귀여운 몸뚱아리의 강아지가 주인과 함께 산책을 하고 있다. 저 강아지를 몰래 뒤쫓는다는 생각으로, 적당한 간격을 유지한 채 걷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30분이 5분이 되는 기적을 맛보았다. 아씨, 강아지 키우고 싶다.


그거 조금 걸었다고 갈증나는 내 썩은 몸뚱아리. 어서 카페를 찾아 들어가야겠다. 그리고 홈플러스 근처에 있는, 예전에 몇 번 가보았던 한 카페를 기억해낸다. 아치형의 문이 저 멀리 보인다. 마침내 [ 카페 수아베 ]에 들어선다.



쑥쑥 자라렴. 내 키보다 더 클 날이 올거야.



오랜만에 방문하니 몇 개의 테이블의 배치가 조금 바뀌어있었다. 다행이도 작년 겨울에 서영이와 앉았던 소파 테이블은 여전했다. 서영이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나는 시나몬애플뭐시기(?)티를 주문했었고 맛이 꽤 괜찮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중간에 가족들과 산책을 하다 잠시 들어간 적이 있긴 하지만 갈 때마다 매장이 조금씩 바뀌는 듯 싶었다. 최근 코로나19 이슈로 문을 닫았다고 하는데, 사회적 거리두기가 2단계로 격하되면서 정상 운영하고 있는 모양이다.


나오기 전에 이미 아메리카노를 마셨기 때문에, 오늘은 라떼 베이스의 시원한 아인슈페너를 마시기로 한다. 주문을 한 뒤 어디에 앉을까 고민한다. 매장에는 손님이 나밖에 없어서 내겐 선택지가 아주 많았다. 사실 나는 심각한 선택장애가 있다. 결국 햇살을 가득 머금은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직원분이 슬며시 다가와 블라인드를 치기 시작한다. 햇살때문에 눈이 부실까 염려했던 모양이다. 아휴, 정말 그러지 않으셔도 됐는데. 진심으로요. 테이블을 가득 차지하던 햇살은 금세 사라지고, 그림자는 대주주가 되었음을 선포한다. 있었는데요, 없었어요!



햇살머금은 아인슈페너



커피가 나오기까지 짧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진동벨이 울리고, 커피를 받으러 가는데 돔 뚜껑이 씌워진 테이크아웃 잔에 주더라. 음, 내가 여기서 마신다고 말을 안했나? 자세히 보니, 매장용 잔이 보이질 않는다. 예전에 시켰을 때는 전용잔에 주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내 기억이 잘못됐나? 여하튼 썩 내키지 않은 마음으로 잔을 집어든 채 자리로 향한다.


음료 맛은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나 테이크아웃 잔으로 마시려다보니, 먹기가 꽤나 불편했다. 특히 아인슈페너는 입을 대고 마셨을 때, 크림의 단 맛과 쓴 맛의 커피가 같이 들어오면서 조화로운 맛이 느껴지는 것이 일품인데. 테이크아웃 잔으로 마시려다 보니 크림만 잔뜩 들어올뿐만 아니라 음료가 한 번에 쏠리는 탓에 하마터면 쏟을 뻔했다. 사실 내 후드에 조금 흘렸다. 젠장. 하, 빨대 쓰기 싫은데. 오늘은 어쩔 수 없다.



사고 싶다. 블루투스 스피커.



오늘도 영어 문장들을 수집하기 위해 '김영철 & 타일러의 진짜 미국식 영어'를 틀었다.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한 수험생의 사연으로 시작한다. 김영철은 타일러에게 수험생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줄 말이 있다면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자 타일러는 이렇게 대답한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목표를 절대 달성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가끔은 보이지 않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나서 한 마디 더.


"그러니 자기만의 길을 찾는 게 중요하다."


한 회차에 5분이 채 되지 않는다. 물론 중간중간에 서로에 대한 안부와 CM송이 흘러나오면 아마 3-4분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참 알차고 좋은 라디오라고 생각한다. 들을 때마다 생각하는 건데, 타일러씨는 정말 대단한 언어학자이다. 왜 그런 생각을 하냐구요? 궁금하면 들어보세요! (광고 아님)



빛이 간절해



영어 공부도 하고, 유튜브 영상 스크립트도 조금 적다 보니 어느새 2시간이 흘렀다. 해가 저물면서 어둠이 조심스레 드리우고 있었다. 이제 슬슬 가야겠다. 짐을 챙기면서 생각해보니 이곳에 있었던 2시간 동안 1명의 테이크아웃 손님 외에는 그 누구도 들어오질 않았다. 이거 장사가 되려나? 카페 창업도 참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계속 운영할 수 있을지 심히 걱정이 되더라.


코로나19는 고작 1년 만에 수많은 카페들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왜 우리나라는 적절하게 대응을 하지 못할까? 아무래도 완벽한 백신이 개발되기 전까지는 공생할 생각인가보다. 언제 해외여행을 다시 갈 수 있을까? 아니, 제주도는 맘편히 갈 수 있을까? 내 앞길보다 걱정스러운 일이 참 많아졌음을 느낀다. 아, 아니. 내 앞길부터 걱정해야지!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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