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하겠다. 나도 취업시켜줘.라는 말은 쏙 들어갈 거예요.
2016년 10월, 공기가 서늘해진 어느 날이었다. 긴 생머리에 속눈썹까지 한 올 한 올 올린 짙은 메이크업을 하고, 금형 공장에 갔다. 아빠 회사였다.
학창 시절, 아빠가 삼겹살 사준다고 해서 몇 번 놀러 갔었고, 용돈 벌이 삼아 딱 한번 일해본 게 다였다. 이런저런 이유로 다 합쳐봐도, 공장 개업하고 10년 동안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다. 그런데 그날은 입사 첫날이었다.
대학 졸업 후, 물류회사에 취업을 했다. 수출입 업무를 하고, 가끔 출장을 가며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첫 사회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빠가 갑자기 아팠다. 누군가가 아빠를 대신해서 아빠처럼 그 회사에서 일을 해야만 했다. 몇 년 동안 함께 일한 직원들도 있었지만, 그 어떤 직원도 '사장처럼' 일을 할 수 없다고 아빠는 말했다. 이 회사 주인이 바로 나다! 이 마음으로 일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주인 아닌 이상 가질 수 없는 주인의식인데 말이다.
없다면, 나는 회사 문을 닫으라고 했다. 그러나 아빠만 믿고 일을 해왔던 거래처들이 많아서, 아프다는 이유로 갑자기 문을 닫을 순 없었다. 아빠는 오래같이 일한 직원보다 금형의 'ㄱ'도 모르는 가족이 더 믿음이 갔나 보다. 아빠는 나에게 별거 없다며, 캐드 배우고, 도면을 몇 번 그려보면 금방 다 할 수 있다고 했다. 가방도 사주겠다, 차도 사주겠다며 나를 꼬셨다. 난 유혹에 넘어가기도 했고, 다른 선택을 할 수 없기도 했다. 엄마는 아빠를 돌봐야 하고, 동생은 아직 대학교 졸업도 못했다. 결국 나밖에 없었다. 아빠가 다시 회사에 돌아오기 전까지 내가 아빠의 부재를 채우기로 했다.
나는 아빠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 관심이 없었다. 아빠 차 조수석에 앉으려고 하면, "제품 밟지 않게 조심히 타."라고 해서 쇳덩이를 발견하게 돼도, 너 거기 있구나까지만. 너 뭐니? 뭐하는데 쓰는 거니?라는 질문이 붙지 않았다. 가끔 아빠 손톱 밑에 시커멓게 낀 때를 빼주면서, 손 좀 잘 닦으라고 타박했다. 아빠는 항상 이렇게 대답했다. "해봤자 또 더러워져." 나는 그렇게 또 더러워진 손톱을 다듬으며, 아빠는 기름 만지는 일을 하는구나, 쇠를 가공해서 무언가를 제작하는구나 이 정도만 알았다. 이랬던 내가 공장으로 출근을 하게 되었다.
공장은 화장하고 출근할 만큼 화사한 곳은 아니다. 아파트형 공장 1층에 위치한 우리 회사는 빛이 들고 형광등도 켜져 있지만, 칙칙하고 거뭇한 분위기가 지배한다. 회사에 들어서자마자 느끼하고 텁텁한 기름 냄새가 콧속을 가득 채운다. 숨을 들이마시면, 공기 중의 기름과 쇳가루가 코털에 엉겨 붙는 기분이다. 퇴근 후 코를 풀고 귀를 파면, 회색 이물질을 잔뜩 볼 수 있다. 먼지가 책상과 의자에 내려앉아서 손가락도 금세 검게 변한다. 때가 타도 티가 나지 않을 남색, 검은색 옷을 입을 수밖에 없다. 회사 입구 쪽에 SUV 차량만 한 기계가 줄지어 세 대가 있는데, 엔진 소리가 윙윙 울리며 공장 전체에 진동이 퍼진다. 안에 쇠를 넣고 가공을 하면, 소리가 더 우렁차 진다. 에어 프레셔 소리도 만만치 않다. 좁은 구멍에서 공기가 서로 치열하게 비집고 나오다가, 쇠와 부딪히면 날카로운 비명을 지른다. 귀가 예민해지니 머릿속도 윙윙거린다.
공장에서 하루 종일 있어보니, 아빠 목소리는 왜 점점 커져가고, 귀는 점점 안 들린다고 했는지 알겠더라. 아빠는 미안해했다. 좋지 못한 환경에 딸을 밀어 넣은 걸 속상해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빠의 수술이 한 달 도 채 남지 않았고, 아빠는 마음이 급했다.
아빠는 수술하기 전에 금형 설계 방법과 가공 과정을 알려줬다. SKD11, AL, 수축률, K값, T값 하는데, 나는 흥미도 없고 생소했던지라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아빠의 말들은 자꾸만 튕겨 나갔다. 아빠도 답답하고, 나도 답답했다.
빠른 납기 때문에 나는 주 6일을 출근해야만 했다. 학창 시절부터 유지해온 주 5일의 생활리듬이 무너지고, 햇빛이 안 들고 시끄러운 사무실에서만 있는 시간이 늘었다. 회사에서 못 배운 것은 집에 와서 이어서 배워야 했다. 아빠는 집에서도 직장상사였다. 집에서도 회사 업무를 내게 요구하고, 지적하는 게 많아졌다. 회사-집-회사-집이 아닌 회사-회사-회사-회사가 되다 보니, 나는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했다. 점점 아빠가 아픈 것이 원망 스러졌다. 아빠한테 짜증을 내는 일이 많아졌다. 아빠는 '사장'을 무시하면 어떡하냐며 나를 혼냈다. 우리는 계속 싸웠다.
아빠가 수술을 위해 병원에 입원하고 나서는 다른 직원에게 일을 배워야 했다. 캐드로 도면만 그리면 된다는 아빠의 말과는 달랐다. 도면만 툭 던지면 끝이 아니라, 직원과 거래처 담당자와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현장일을 알아야 했다. 방법이 없었다.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고 싶었지만, 현장으로 뛰어 들어갔다.
나에게 처음 현장 일을 알려준 김 부장님은 일은 잘했지만 까칠했다. 입사 1개월 차였을 때, 도면도 잘 못 보고, 한 번에 못 알아듣는다며 나를 구박했다. 제품의 두께를 측정하는 마이크로미터 사용법은 이미 잘 익혔다고 생각했는데, 매일 아침 1시간씩 하라고 다그쳤다. 계속 트집거리를 찾는 그 부장님이 싫었다. 괜히 억울하고 답답했고, 눈물이 차오르는 게 느껴지면 화장실로 도망가 변기에 앉아서 끅끅거리며 흘려보내곤 했다.
설계와 영업을 담당하던 박 과장님은 다정했지만, 매일 실수를 했다. 과장님은 이 업계에서 10년 차였다. 하지만 업무파악을 제대로 못 한 내가 봐도 이해가 안 되는 실수가 잦았고, 그 때문에 똑같은 제품을 돈도 못 받고 여러 번 만들어 주고 있었다. 나는 과장님이 회사를 말아먹는 줄 알았다. 분노를 삭이고, 이를 악물고, 일단 배웠다.
내가 이런 어두운 환경에서 시커먼 남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지내야 하나 막막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니, 나를 힘들게 했던 두 남자 덕분에 내가 빠르게 성장하고 이 업계에 적응할 수 있었다. 투박한 언어와 말투를 가진 김 부장님 덕분에 어떤 거래처 담당자와 마주해도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반복 학습 덕분에 측정 도구들을 젓가락질하듯이 사용할 수 있다. 또한, 매일 실수하던 과장님 덕분에 나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로 했다. 도면에 선이 하나 빠졌는지, 제품에 볼트 구멍 하나 덜 뚫렸는지, 납품일에 맞춰서 가공이 진행되고 있는지 나는 끊임없이 확인했다.
거래처에 납품과 픽업도 직접 해야 했다. 아빠가 차를 사준다는 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닌 회사를 위해서였다. 10kg가 넘는 상자를 회사에서 들고 차 조수석에 내려놓을 때면 헬스장에서 열심히 쇠질하길 잘했다 싶었다. 우리 공장에서 가공이 끝나면, 제품이 녹스는 것을 막기 위해서 크롬 도금이나 흑 착색을 해야 했다. 도금 집과 착색 집은 낮은 건물이 줄줄이 있는 좁은 골목에 위치해 있다. 그 지역은 주차장이 따로 없어서, 일 차선 도로를 두고 양쪽에 트럭, 오토바이 등 각종 차량이 주차되어 있었다. 그 골목을 지나갈 때면, 양쪽 사이드 미러가 금방이라도 주차된 차에 닿을 것만 같았다. 2016년도에 면허를 갓 딴 초보 운전자였던 나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골목을 다녔다. 제발 맞은편에서 차가 오지 안길 바라며. 그래서일까. 한 번도 운전 중에는 사고 난 적 없다. 주차하다가는 몇 번 냈지만.
처음엔 손에 검은 때가 묻고, 남자가 주류인 제조업계가 싫었다. 그래도 꾸역꾸역 하다 보니 어느새 나도 인정받고 있었고, 조금씩 일이 재미있어져서, 퇴근 후에 집에서 도면을 그리기도 했다. 지난 2년 동안 나는 점점 ‘공장형 인간’으로 바뀌어 갔다. 화장을 지우는 것도 귀찮아서 선크림만 바른 채 다니고, 긴 머리도 단발로 잘랐다. 손에 기름 묻히는 것도 두렵지 않다. 비누칠해서 싹싹 씻으면 되니까. 입사 초에는 샤랄라 한 핑크 블라우스를 못 입고 다니는 것이 불만이었는데, 이제는 맨투맨 티에 청바지를 대충 입고 다니는 게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어느덧 나는 직원들에 가벼운 농담도 건네면서, 직접 업무지시를 내릴 수 있게 되었다. 혼자서 도면 설계도 하고, 제품 공정을 설명하며, 거래처 관리까지 할 수 있다. 금형에 광을 내는 사상 업무나 제품 조립까지도 척척 해낸다. 완벽주의자인 아빠도 ‘네가 이렇게까지 잘할 줄 몰랐다. 아빠만큼 일하고 있다.’라는 칭찬도 해주셨다. 내가 가공방법을 설명하면 의심하던 거래처 직원에게 최근에 ‘최 대리님, 저희 많이 도와주셔서 감사해요.’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런데 2018년 11월 1일부터는 더는 아빠 회사가 아니다. 우리 가족은 오랜 고민 끝에 회사를 팔았다. 나는 일을 하면서 아빠가 갑자기 사라질까 봐 겁이 났다. 내가 모르는 것은 아빠가 다 해결 줬는데, 아빠가 없는 회사를 상상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내가 전 공정을 다 할 줄 아는 것도 아니고, 기존 직원들이 일이 생겨 못 나올까 봐 속으로 전전긍긍했다. 하면 할수록 일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감은 커졌지만, 불안감도 커졌다. 30년 경력의 사장님과 2년 차 사원의 간극이 너무나도 컸다.
아빠가 다시 돌아와서 예전처럼 일하기는 어려웠다. 체력은 계속 떨어지고 약기운에 취해서 잠만 늘어갔다. 출근 횟수도 주 6일에서 5일, 4일, 3일, 2일로 점점 줄어들고, 매각 직전에는 하루 오는 것도 힘들어했다. 거래처 이름도 헷갈려하지, 나에게 뭘 알려주고 싶어도 잔존하는 종양과 수술 상처 아래 기억이 파묻혀서 캐내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아빠는 애지중지 키워온 회사를 계속 운영하고 싶었지만, 아빠 몸은 그 마음을 따라갈 수 없었다.
회사가 떠나가자, 나는 모든 부담감도 다 떠나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홀가분하지는 않았다. 회사 곳곳에 묻어있는 아빠의 애정 어린 손길을 나는 온몸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나도 2년 동안 일하면서 정도 많이 들었고, 그만둘 생각을 하니 눈물이 쏟아졌다. 아빠와 나의 일부분이 떨어져 나가 버린 기분이었다.
나는 인수인계를 위해서 아직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이런 야생 업계는 이미 경험해봤으니 그만두게 되면 다른 업계에 도전할 것이다. 내가 여기에서 이처럼 낯선 일을 잘 해냈으니 새로운 일을 하더라도, 1년이 지나면 뭐든 잘할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처음에 욕먹고, 엉망진창으로 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