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할 거라 여겼던
"나는 슈퍼맨이 아니다." 어느 날 아침, 아빠가 밥을 먹다 말고 말했다. 나는 아빠의 뜬금없는 소리에 "뭐야. 갑자기."라고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아빠는 성실한 노동자이자 가장이었다. 평일 아침에 집을 나서면, 보통 밤 10시에 집에 오곤 했다. 주말에도 아빠 얼굴 보기가 정말 어려웠다. 학창시절, 내가 몇 학년 몇 반 인지 기억도 잘 못 하고, 공부만 하라는 아빠가 섭섭했다. 섭섭함으로 아빠와 내 사이에 벽을 쌓아갔다.
고3 때, 우리 가족은 학교까지 차로 20분 거리의 집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버스를 타면 2배 더 걸리고, 북적거린다는 사실을 안 아빠는 졸업하기 전까지 매일 나와 동생을 학교에 데려다주셨다. 8시 30분까지 출근해야만 했던 아빠는 느릿느릿 준비하는 나를 재촉했다. 나는 급한 아빠의 맘을 무시한 채, "아! 좀만 기다리라고!" 신경질 섞인 말을 뱉곤 했다. 아빠와 함께 있는 차 안의 공기가 어색했다. 그저 얼굴을 푹 숙이고,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학교 정문에 도착하면 '안녕히 가세요.'라는 짧은 말과 함께 차 문을 쿵 닫았다. 바쁜 아빠가 딸들과 친해지기 위한 노력과 챙겨주고 싶은 마음을 몰라준 채 말이다.
아빠는 휴일에도 가족과 함께하려고 했다. 맛있는 거 사주겠다고 같이 놀자고 했고, 예쁜 목걸이나 옷 사주겠다고 쇼핑 가자고 했다. 차 끌고 여행을 갈 때도, 아빠는 운전대를 엄마에게 넘겨주지 않았다. 운전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엄마를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서 1시간이든 10시간이든 운전을 했다. 이렇게 세 여자만 바라보고, 세 여자만을 위해 사셨다.
그러나 나는 아빠가 할 수 있는 애정표현을 달갑게 받아주지 않았고, 고마움도 잘 표현하지 않았다. 아빠니까, 아빠라면 할 수 있는 거라로 당연하게 생각했다. 세 여자를 이끌고, 보호하고, 책임지는 아빠가 아빠로서 당연히 해야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아빠 말대로 나는 아빠를 슈퍼맨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2016년 가을, 대학 졸업 후 취업한 첫 직장에서의 업무가 손에 익어가고 있었을 때였다. 평일 아침을 먹는데 아빠가 오른손이 저리다고 했다. 나는 병원을 가보라고 했다. 병원 가면 왜 그런 증상이 나타나는지 알 수 있을 줄 알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엄마는 아빠가 뇌경색인 줄 알았다고 한다. 아빠의 그런 증세가 뇌경색 전조 증세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뇌경색 전조 증세으로는 언어 장애, 시야 장애, 어지러움, 손발 저림, 팔다리 마비, 의식저하 등이 있다. 아빠는 그날 아침 바로 엄마와 같이 집 근처에 있는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가서 CT 촬영을 했다.
의사는 CT 결과를 보고, 뇌경색은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머리에서 무언가 보인다고 했다. 어린 시절 걸린 뇌염의 흉터일 수도 있고, 종양일 수도 있으니, 정확한 것은 외래진료를 통해 알 수 있다고 했다. 외래진료는 당일 접수는 불가능해서, 아빠는 예약만 하고 병원을 나와야 했다.
아빠는 몸이 안 좋아도 출근을 했다. 아니 해야만 했다. 아빠가 물어다 주는 모이를 기다리는 입이 3개뿐이 아니었다. 아빠는 작은 금형 공장의 사장님이었다. 설계, 제조, 납품, 영업 등 회사의 전반적인 업무를 다 맡아서 하고 계셨다. 아빠가 빠지면, 회사에 큰 구멍이 생겨 모든 업무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직원, 직원의 가족, 거래처까지 아빠가 엎고 있는 것들이 많았다. 아빠의 어깨는 항상 무거웠다. 다행인지, 아빠는 가끔 오른팔만 저릴 뿐, 더 큰 증상은 나타나진 않았었다.
나는 퇴근하고 친구와 술 한잔을 하고 있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아빠가 회사에서 일하던 중에 쓰러져, 서울의 한 대학병원으로 이송되었다는 연락이었다. 나는 그 말을 문자 그대로 '듣기만' 했다. 자리를 정리하고 바로 병원으로 가지 않았다. 엄마한테는 야근 중이라고 했다. 아빠 곁에는 엄마가 있고, 아빠는 중환자실에 있었고, 면회 시간은 이미 끝나 아빠를 만날 수도 없었다. 어차피 내일 일반병실로 옮길 테니 퇴근하고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아빠가 아프다는 사실이 손끝에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빠뿐만 아니라, 엄마도 아주 무섭고 힘들었을 텐데. 그런 부모님을 뒤로한 채, 친구와 놀았다. 나는 나쁜 딸이었다.
다음날 병원에 가보니, 아빠는 일반병실로 옮겨져 있었다. 엄마가 울면서 말했다. 아빠의 오른쪽 뇌에 종양이 생겼고, 제거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의학기술이 발달했고, 의사가 알아서 잘 제거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뇌종양이 아빠를 찾아온게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아빠는 언젠가 식도염 정도만 있었고 크게 아픈 곳은 없었다. 과로로 담이 오거나, 오래 서서 일하고, 운전도 하다 보니 허리와 다리가 아파 종종 물리치료를 받았을 뿐, 입원한 적도 없었다. 아빠는 30대 몸무게를 50대까지 그대로 유지해왔고, 술도 담배도 안 했다. 짜게 먹는 것도 싫어하고, 양파즙, 흑마늘, 홍삼 등의 건강식품을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우리 아빠는 인터넷에서 말하는 '뇌 관련 질환 예방 지침'이 생활 그 자체였다. 뇌종양은 아빠에게 올 수 없는 병이었다.
우리 아빠는 강한 사람이었다. 주 6일 동안 때로는 일주일 내내 일했고, 태백산맥 등반이 취미였고, 우리 가족 중에서 힘이 가장 세고, 키도 제일 컸고, 의지도 강했다. 뇌종양 따윈 금방 이겨낼 거라 확신했다.
2016년 10월, 아빠는 첫 수술을 잘 마쳤다. 수술을 마치고, 일주일 만에 병원에서 퇴원했다. 그렇게 종양과 영원히 작별인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