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윤 Jun 23. 2019

무당에게 들은 5만 원 치 미래 (후편)

무당이 하라는 대로 못하겠습니다.

"피부에 절대 손대지 마. 큰일 나. "

"네? 왜요?"

"레이저나 보톡스 같은 거 맞으면 피부에 문제 생길 거야."

"아 네…"


하. 허무하다. 내 피부 원래 좋아서 손댈 생각도 없었다. 흥!


 찝찝함과 불쾌감만 더 쌓인 채, 무당에게 핸드폰 계좌이체로 5만 원을 보내고 나왔다. 아까웠다. 길거리 천막 안에서 5천 원 주고 본 타로만도 못했다.


 그날 그가 모시는 신이 어디론가 여행을 갔었나 보다. 아니면 신에게 정성을 제대로 안 들여서 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인가. 그랬다면 내 고민이라도 잘 이해해서 좋은 조언이라도 해줬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신내림 받은 지 얼마 안 된 무당이었다. 아직 많은 손님을 만나보지 않았을 테니, 적절한 문장과 표현을 구사해서 말로 사람을 현혹하는 법도 몰랐다. 눈치껏 나와 연관성이 있는 이야기를 하거나, 내 성격이라도 잘 파악했어야 했는데, 무당은 찍기도 못하고, 눈썰미도 없었다. 나는 그의 말을 의심만 할 수밖에 없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친구 낄도 그 무당을 만났다. 무당이 낄에게 앞으로 해외 관련된 일을 하며, 출장을 많이 다니게 될 거라고 말했다. 참고로 낄은 생산 업무를 하고, 퇴근 후에는 국가공인자격증 중 하나를 공부하고, 한국어만 잘하고, 여권은 없다.


 괜히 기분이 나빴다. 무당이 내 능력과 자질을 낮추고, 발전 가능성에 한계를 그어버리는 거 같았다. 그는 '경리나' 하면서 새로운 도전도 하지 말고, 현실에 안주하라고 했다. 나는 내 통장에서 빠져나간 5만 원처럼 귀에 들어온 그의 말을 다 버려버리고 싶었다. 나는 다시 신을 믿지 않는 나로 돌아왔다.




출처: TV N





 그 무렵, 나는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에세이 쓰기 강좌를 듣고 있었다. 매주 1개의 주제로 A4용지 1장 이상의 에세이를 제출해야 했다. 주제는 내가 좋아하는 것, 슬펐을 때, 잊히지 않는 사건, 사랑하는 이, 기억에 남는 곳 등등이었다. 나는 에세이를 쓰기 위해서 기억을 끄집어내고, 과거로 돌아가 사건을 재구성해야 했다. 머릿속에 부유하던 생각들을 글로 가지런히 정리해야 했다. '나'에게 온전히 몰입해야만 했다. 이 과정을 통해, '나'를 발견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출처: © Ashestosky | Dreamstime.com



 먼저, 내 주위 사람의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 나도 어떤 영향을 받을지 모른다.


 '대학 졸업 후, 나는 물류 회사에서 수출입 업무를 하고, 가끔 출장을 가며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사회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빠가 갑자기 아팠다. 누군가가 아빠 대신 아빠처럼 일해야만 했다. 몇 년 동안 함께 일한 직원들도 있었지만, 그 어떤 직원도 사장처럼 일을 할 수 없다고 아빠는 말했다. 게다가 아빠만 믿고 함께 해왔던 거래처가 많아서, 아프다는 이유로 문을 닫을 순 없었다. 엄마는 아빠를 돌봐야 하고, 동생은 아직 대학교 졸업도 못했다. 결국 나밖에 없었다. 아빠가 다시 회사에 돌아오기 전까지 내가 아빠의 부재를 채우기로 했다. -<아빠랑 일해요> 중-'


 가족, 친구, 동료 모두 내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고, 그들과 어떤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엮이게 될지 모른다. 설령 신일지라도 전 세계 75억 명의 사람들과 내가 관계를 언제 어떻게 묶고 풀지 예측할 수 있을까? 온몸에 빽빽하게 안테나를 세우고 있어도 어려울 듯하다.



 또한, 내가 어려움과 고통을 겪으면서 성장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이런 어두운 환경에서 시커먼 남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지내야 하나 막막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니, 나를 힘들게 했던 두 남자 덕분에 내가 빠르게 성장하고 이 업계에 적응할 수 있었다. 투박한 언어와 말투를 가진 김 부장님이 덕분에 어느 직원이나 거래처 담당자와 마주해도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매일 실수하던 박 과장님 덕분에 나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면서 일했다. 도면에 선이 하나 빠졌는지, 제품에 볼트 구멍 하나 덜 뚫렸는지, 납품일에 맞춰서 가공이 진행되고 있는지 나는 끊임없이 확인했다. 지난 불편함 덕분에 지금은 편하게 일하고 있다. 

 내가 여기에서 이처럼 낯선 일을 잘 해냈으니 새로 어떤 일에 도전하더라도 1년만 버티면 뭐든 될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처음엔 엉망진창으로 하겠지만 말이다. -<아빠랑 일해요> 중-'


 처음 아빠 회사에 입사했을 때, 나하고 안 맞고 낯선 일이라 당장이고 때려치우고 싶었다. 늘어나는 새치가 내가 받는 스트레스의 양처럼 느껴졌다.  '힘듦'이 순간이 아니라 영원할 줄 알았다. 그러나 실수하고, 혼나고, 울고, 눈물 닦고, 다시 하다 보니 머리와 몸이 기억했다. 한 달 한 달이 지나고, 한 해가 넘어가고 2년 차가 되니 사장님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런 내 모습을 통해 어느 곳에서라도 노력하고, 경력이 쌓이면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을 얻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무엇을 잘하고, 좋아하는지 더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운동은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을 좋아했던 내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다. 근육의 움직임과 호흡에만 신경 쓴다. 주위를 둘러볼 필요 없이 나에만 몰입해서 내 몸의 변화를 세세하게 느끼고 관찰해야 한다. 그렇게 나는 내 몸을, 나를 더 아끼고 사랑하게 되었다. 내 삶에 활기를 더해준 운동과 쭉 함께할 것이다. 운동을 영원히 사랑하련다. -<몸과 마음 근육 단련장> 중-'



 과거를 되짚어 보니, 미래가 보이기 시작했다. 내 시선이 더 가고, 발길이 닿는 곳이 어딘지 알게 되자,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정할 수 있었다. 무당 덕분에는 내가 하기 싫은 것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도 나만큼 나를 알진 못했다. 내가 품고 있는 질문에 답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였다. 결국 답은 내 안에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무당에게 들은 5만 원 치 미래 (전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