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꾸따의 한 바에서 삔땅을 주문했다. 삔땅에는 커버가 씌워져 있었다.
보통 우리나라 바에서 병맥주를 시키면, 도톰한 종이 한 장을 바닥에 툭 깔고, 그 위에 맥주를 올려준다. 종이에는 맥주의 로고나 설명이 화려하게 담겨 있기도 하다. 상온에 나온 차가운 맥주병은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하고, 물줄기로 모여 아래로, 종이로 흘러 내려온다. 물을 머금은 종이는 축축해지고, 빳빳했던 질감은 흐물흐물해진다. 수분이 다 날아가버리면 색도 바라고, 표면은 쭈글쭈글해진다. 내가 테이블을 떠나면, 쓰레기 통속으로 쓸려 들어간다.
삔땅이 입고 있던 폭신폭신한 보냉 커버는 물기를 다 흡수했다. 약간 촉촉해질 뿐 형태는 변하지 않았고, 맥주의 차가운 기운도 오래오래 유지해줬다. 수많은 손님과 점원의 손길을 거쳐왔을 커버가 괜히 애틋해서 맥주에 손이 더 자주 갔다.
비록 누군가 병을 커버에 넣었다 뺐다를 해야 하고, 커버를 세척해야 할 것이고, 보관하기 위한 장소도 필요하겠지만. 빠르고 간편한 것보다 느리고 번거로움을 더 가치 있게 여기는 발리였다.
발리는 누군가의 손에서 내 손으로 그리고 이 세상에 아직 태어나지 않은 누군가의 손으로 이어지는 것 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코코넛 워터
발리에서 코코넛 워터의 기똥찬 맛을 알아버렸다. 처음 맛 본 순간 지나치게 달지도 느끼하지도 상큼하지도 않은 그 애매한 맛에 빠져버렸다. 게다가 단순한 포장이 맘에 들었다. 종이 팩이지만 빨대가 옆에 달려 있지 않았고, 입구가 플라스틱으로 단단하게 되어있지 않아서 처음 딱 봤을 땐 어떻게 마시나 했다. 그런데 은색 스티커를 들어내 떼어내니 구멍이 생기고, 마시면 되었다. 어차피 250ml 짜리라 한 번에 다 충분히 마실 수 있는 양이었다.
한국에 돌아와 190ml 팩 두유를 마시려고 보니, 빨대가 팩에 딱 붙어 있다. 두유가 새롭게 보인다. 그동안 두유는 빨대가 있어야만 마시는 음료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없어도 마실 수 있었다. 빨대를 꽂아야만 하는 디자인 때문에 두유와 빨대는 하나라고 내 이미지에 박혀 있었던 것뿐이었다. 입술을 오므리고 먹지 않아도, 입술에 두유가 살짝 묻어도 괜찮은데.
빨대를 '소비'가 아닌 '허비'해왔었던 것 같다. 콧구멍에 빨대가 꽂혀있던 바다거북이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