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사랑이고, 결혼은 결혼이고

사랑의 방해꾼들

by 최윤

보트에서 3일째 되는 날. 나와 도미는 점심을 먹고 매트릭스 위에 누워서 멍 때리고 있는데, 슬로베니아 커플이 우리를 불렀다.


"맥주 마실래?"


맥주를 6캔 밖에 안 사 왔던 우리는 지난밤에 모든 캔을 찌그러트렸었다.


"그래! 우리 한 캔 가지고 둘이서 나눠먹을게." 도미가 대답했다.

"음... 진짜?"

"하하. 유니는 아닌가 보네. 내가 한 캔씩 가져다줄게."

"고마워."


우리는 커플 곁에 다가가 앉았다. 나와 도미 각각 맥주 2캔을 마셨을 만큼 많은 대화를 나눴는데, 가장 기억 남은 이야기는 '결혼'이었다.


“우리는 결혼을 안 했어. 결혼 안 하고 18년째 같이 살고 있어."

"아 진짜? 함께한 지 엄청 오래되었구나."

"맞아. 알레스는 남편이 아니고 오래된 남자 친구지. 주변에서 결혼 왜 안 하냐고 묻는데, 결혼이 의미가 있나? 고작 서류일 뿐인데. 우리는 서류에 묶이지 않아도 마음으로 단단히 묶여있어."

"응. 그런 거 같아. 너네 얼굴만 봐도 느껴져. 항상 같은 미소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어."

“맞아. 몇몇 지인들이 18년 정도 한 집에서 살았으니까 이제 결혼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묻곤 해. 그런데 여태까지 안 하고 서로 사랑하고 아끼며 잘 살고 있는데, 꼭 해야 하나 싶어."


곰처럼 푸근한 알레스, 피글렛처럼 사랑스러운 모즈카. 그들 사랑에는 차분하고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친구가 왜 우리 부부에게 아이 안 가지냐고 물었다? 우리는 여행을 좋아해서 아이가 없는 게 더 편해. 지금 여기가 올해 2번째 여행이고, 12월 달에는 내 생일 파티하러 필리핀에 또 갈 거야. 이렇게 우리 둘만 즐겁게 여행 다닐 수 있어서 아이는 안 가지고 싶어. 친구가 너네 ‘문제’ 있냐고 묻는데. 우린 문제없어. 그 친구는 아기 낳고 싶어서 시험관 하고 있거든. 자기가 문제 있으면 우리도 같다고 생각하나 봐. 우리가 원하지 않아서 안 낳는 거뿐인데."

"한국이랑 똑같다. 한국에서는 나이가 30살쯤 되면 결혼 안 하냐고 이곳저곳에서 물어봐. 결혼하고 나서 자식 없으면 왜 애 안 가지냐고 물어보고. 사회에서 정해 놓은 일정한 커리큘럼을 따라가지 않으면 이상하다고 여겨."

"네덜란드는 아닌데, 결혼 안 하려는 사람이 늘고 있고, 결혼은 선택이라고 말해. 그리고 3분의 1이 이혼을 하고 있어. 정말 결혼이 의미가 있을까?”

"없어. 사랑해서 함께 있고 싶을 뿐인데. 그거면 된 거지. 신기하다. 오히려 훨씬 더 멀리 떨어져 있는 한국이랑 비슷하고, 네덜란드랑은 가까운데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그러네. 같은 유럽인데 말이야."

결혼제도라는 울타리 안에 있지 않아도 그들은 안정적으로 보였다. 서로에 대한 마음이 단단하니 제도의 보호나 사회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둘만의 관계와 행복에 초점을 맞추며 살고 있었다. 사랑의 종착점이 꼭 결혼이어야 하는 건 아니었다.






저녁을 먹고, 보트 지붕 위로 올라갔다. 스페니쉬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옆에 앉아서 수평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한 스페니쉬 여자가 다가와 내게 말을 걸었다.


"안녕! 너 한국에서 왔지?"

"응! 나는 유니라고 해."

"나는 마르따 야. 스페인에서 왔어."

"마르따! 마가리따! 칵테일 이름하고 비슷해서 이름이 외우기 쉽다."

"하하. 맞아. 유니, 내 동생이 예전에 제주도에서 살았어서 한국에 너무 가보고 싶어."

"오 진짜? 제주도? 얼마나 살았었는데?"


제주도에서 살았다는 유럽인 이야기를 처음 들어서 신기했다.


"5년 정도 살았어. 동생이 제주도에서 한국인 남자 친구랑 같이 살았었거든. 제주도가 아름답고 평화로운 섬이라며 동생이 너무 좋아했는데."

"맞아. 나도 인도네시아 오기 4일 전에 제주도 여행 갔다 왔어. 이거 사진 봐봐 멋있지?"

"멋있다. 나도 다음에 제주도 꼭 가볼래. 너도 스페인 놀러 와. 내 동생 남자 친구 이름이 영근이었는데, 영근도 스페인 놀러 와서 며칠 동안 우리랑 같이 지냈었어. 지금은 비록 헤어졌지만."

"아. 무슨 일 있었던 거야?"

"내 동생이 24살 때, 영근하고 결혼하고 싶어서, 1년 동안 돈 모아서 다시 제주도 가려고 스페인에 왔었거든. 그런데 동생이 스페인에 온 지 8개월 만에 영근이 헤어지자고 통보했어."

"갑자기 왜?"

"가족들의 반대가 심했나 봐. 영근 할머니가 검은 애 싫다고 하면서 결혼은 절대 안 된다고 했데. 그래서 5년 동안 만나면서 내 동생은 영근의 부모님을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어."


피부색으로 판단해 버리다니, 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너희 부모님은 영근 어떻게 생각하셨어?"

"우리 부모님은 영근 맘에 들어했어. 동생 보러 멀리 스페인까지 온 영근에게 얼마나 고마워했는데. 동생이 좋아하는 사람이고, 영근도 따듯하고 친절했거든. 그런데 영근이 스페인 다녀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동생한테 헤어지자고 했어. 어쩔 수 없었나 봐."

"너무 속상하다."

"맞아. 우리 할머니는 영근 발음이 어려워서 '요구르트'라고 부르면서 엄청 좋아했는데. 우리는 인종 같은 거 상관하지 않아. 개개인이 가진 고유의 가치관과 성격이 중요하지. 이제는 다 좋은 추억으로 남았어. 동생도 새로운 남자 친구가 생겼고."

"동생 많이 힘들었겠다. 그래도 지금 새로운 행복을 찾았다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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