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Ms Seattle
Jun 23. 2020
부모 대 부모: 며느리/딸은 슈퍼우먼이 아닙니다
일단, 영웅 체력에 미달합니다
나와 내 남편이 자란 가정 모두 누군가의 희생이 꼭 필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친정 어머니는 본인의 경력을 포기하고 전업내조자의 길을 택하셨고, 이민 일세대인 시어머니는 남편의 전폭적인 지지와 보호 하에 공주 같은 삶을 사셨다. 독립된 여성상을 강조하는 서구권에서 자란 나와 남편은 대등한 부부관계를 유지하며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의무는 하되 지나친 희생은 하지 않는다. 그 결과 친정어머니는 친정아버지와 달리 살림에 적극 참여하는 내 남편에게, 시어머니는 본인보다 가정 내에서 씩씩하게 해내는 몫이 많은 나에 만족해 하셨다. 내가 엄마가 되기 전까지.
내가 엄마가 되자 친정어머니는 내게 직장을 그만 두고 엄마와 아내로서의 역할(+ 며느리 및 딸로서의 역할 포함)에 더 힘을 쏟으라고 조언하셨다. 맞벌이의 비율이 높고 가정 중시의 공감대가 형성된 미국 직장에서는 내가 일을 한다고 놓칠 부모로서의 결정적인 순간이 별로 없다. 예를 들어, 어린이집에서 동네 공원에 소풍을 가는 날에는 부모들이 오전에 재택근무를 하면서 두 시간 짬을 내 소풍 도우미를 하곤 한다. 학예회 시즌에는 사무실이 휑하다. 그래서 남편이나 나나, 내가 일을 쉬는 옵션은 고려하지 않았다. 경제적인 면 뿐 아니라 사회생활을 통해 쌓을 수 있는 인맥, 안목 모두 문화적응이 필요한 이민1세 엄마와 아이 모두에게 득이 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친정어머니께는 어차피 미국에는 내조라는 말도 없고 내가 내조를 한다고 남편이 원래 못할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니라고 여러번 설명 드렸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굳이 도와 주시겠다고 오신 시부모님께 점심 저녘 두끼를 일 주일간 해 드리다 파업을 선언했다. '나중에 산후풍 오면 누가 책임질거야? 애를 눈으로만 보실려면(기저귀 갈 때만 되면 나를 부르셨다) 왜 굳이 비행기를 타고 와서 일거리를 만드시는데?' 물론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다만 남편에게 "산후 조리 기간에는 하루에 한 번, 아주 간단한 것만 만들겠다. 나머지는 시켜먹자. 그리고 시부모님께서 내게 바라시는 게 너무 많아 내 생활이 시부모님을 위한 것 같다. 앞으로는 나의 부모님이 나를 통하시듯 시부모님들 역시 요구사항은 남편을 통해 전달해 주셨으면 좋겠다."라고 제안했고 미국인 남편은 당연히 그 자리에서 동의했다. 가부장적 나라에서 이민 오신 시부모님들은 난리가 나셨다. 시어머니께서 오열을 하시는 것을 친정 어머니께서 먼 발치에서 보셨다고 들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너 같은 며느리가 없는게 다행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여성의 조신함과 가정 내 엄마의 희생을 미덕으로 여기시는 친정어머니께서 순간적으로 시어머니에 빙의되어 하신 말씀으로, 시어머니께서도 분명 하셨을 법한 말이었다.
친정어머니의 꼼꼼한 내조를 받고 일하신 아버지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 나의 배우자는 나보다 더 바뻐 내가 부모로서 해 내야 하는 몫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불만의 대상이니 억울한 노릇이다. 내가 할 말 다하는 것처럼 보이는 며느리/딸이라도 나는 여전히 동방예의지국에서 자란 여성으로 많은 것을 억누르고 산다. 심지어 산후조리기간처럼 중요한 시기에 스스로를 시부모님보다 챙긴다고 부모님들께 비난을 들을 때도 할 말을 삼킨다. 부모님들이 그 동안 살아온 세월을 인간적으로 이해하고 어느 정도까지는 맞춰드리고자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방적인 배려/희생의 강요는 사양한다. 시간이 지난 후에 스스로의 삶에 책임을 지지 못하고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자식에게 마음의 짐을 지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문득 '너네는 슈퍼우먼이 아니다. 괜히 영웅놀이 하다 요절하지 말고 강약 조절하며 살아라.'라고 인생의 조언을 해 주신 중학교 국어선생님은 지금 즘 어떤 친정 어머니가 되 계실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