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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부르시면 됩니다.

장애인을 대하는 시선

by choijak

연말연시가 되니 '어려운 이웃', '소외계층', '도움의 손길' 등의 키워드를 평소보다 많이 접하게 된다.




심한 장애를 갖고 살고 있는 동생은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는 매 순간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되도록 건강하게 태어났더라면 좋았겠지만 그 친구가 태어나면서 선택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 어쩌겠는가.


그 도움의 영역이 바로 국가의 복지이며, 동생은 그 복지 제도의 도움을 받고 있다. ‘복지혜택’이라 써도 무리가 없지만 ‘혜택’ 이라는 말을 자칫 ‘특혜’로 오독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그저 ‘도움’으로 표현했다. 위에도 썼듯 그 ‘혜택’ 대신 건강한 몸을 선택할 수 있다면 당연히 후자를 선택 할 테니 특혜라는 오독은 조금 마음이 아프다.


그렇게 동생이 국가가 시행하는 복지의 영역 안에 있으니 우리 가족은 자연히 관련 제도의 여러 기관과 얽히는 일이 많은 편이다. 언젠가 어떤 일과 관련해 담당자가 집으로 찾아온 적이 있다. 굉장히 친절하고 다정한 분이셨다. 당시 상황은 동생의 상태를 담당자가 직접 확인하고, 그와 관련된 질문에 주 양육자인 엄마가 답을 하는 것으로 진행되고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딱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나는 내내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제 동생은 이미 성인이 된 지 한참 지났습니다. 그러니 ‘우리 친구’ 라는 호칭 대신 이름으로 불러주시겠습니까?”




그 때의 담당자는 내 동생을 두고 계속 ‘우리 친구’ 라고 부르고 있었다. 물론 악의가 없는 행동이었으며 그 분은 친절한 분이셨다. 하지만 처음 만난 성인에게 ‘우리 친구’ 라고 부르는 것은 악의가 아니더라도 무례한 일이다. 그것이 장애인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한 때 장애인을 ‘장애우’ 라고 부르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아직도 그런 표현을 쓰는 경우를 종종 만난다. 친근함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지만, 다분히 상대의 인격을 제 3의 기준에 따라 틀에 넣고 재단하는 행동이라 생각한다. 언제 봤다고 친구인가?


그들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지만 그 도움의 영역은 가능한 개인의 힘을 빌지 않고 국가의 복지가 담당할 역할이라는 것이 개인적인 내 생각이다. 장애인 스스로 타인의 선의에 의지하지 않고, 느리더라도, 혹은 서툴더라도 스스로 삶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 따라서 그와 관련된 인프라와 제도의 정비가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국가의 예산이나 인력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개인이 ‘봉사’ 라는 역할로 도움을 준다면, 혹은 일상에서 작은 배려를 건네 준다면 그것은 매우 감사한 일이다. 다만 각자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행하는 배려, 혹은 봉사의 기쁨이나 보람의 영역을 넘어서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예쁜 동화>로 혹은 <애틋한 연민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들은 몸이 좀 불편한 타인일 뿐이다. 언제든 손만 내밀면 반가워할 <나의 친구>가 아니라.


그리고 선의가 본래의 의미를 잃고 옳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갈 경우, 그들을 내가 도움을 ‘베푸는’, 나에게 '당연히 감사해야 하는' 대상으로 인식해서 함부로 대하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한 때 잠시 일했던 학원의 부원장은 (예전 글 중 밥 나눠 먹자던 그 원장의 사촌동생이다.) 봉사활동으로 ‘정박아’ 들을 데리고 캠프를 가는데 ‘이것’들이 무섭게 하지 않으면 ‘통제’가 되지 않아서 무섭게 해야 한다며 목청을 높였다. 그래도 매해 여름마다 하는 그 ‘봉사’가 보람 있는 일이라고 어깨를 으쓱 했다.


그래서 나는.


“일단 정박아가 아니고 요즘에는 지적장애인이라는 호칭으로 부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놀 사람이 필요한 거지 ‘통제’를 해달라고 한 적이 없을 걸요? 자기 기준으로 통제 안 된다고 무섭게 하고 화내야 될 일이면 하지마세요. 그게 무슨 봉사에요. 자기우월감에 자기만족이지.”


라고 했다. 까칠하다. 인정.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이 마냥 무덤덤 할 수는 없었다. 핏줄의 '업'이다.


또 하나, 그와 관련해서 나에게 가장 <나쁜 예>로 자리잡은 장면이 있다.

현 제 1 야당의 여성 국회의원 중 한 분이 과거 서울시장에 출마했을 때 남성 장애인의 목욕을 시키는 모습이 <봉사활동> 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매체를 통해 보도되었다. 모자이크 처리는 되었지만 카메라를 들이 댄 수많은 기자들 앞에서 큼직한 조명까지 드리우고 자신을 목욕을 시키는 정치인의 다분히 계산된 손짓 안에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무방비로 놓인 그의 알몸에 나는 참담함을 느꼈다.





이런 글을 쓰고 있으니, 내가 장애인에 대한 이해도가 꽤나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내 동생에 대해서만 조금 아주 조금 이해할 뿐이다.

도무지 아무도 못 알아들을 것 같은 내 동생의 말을 알아듣는 것은 내가 장애에 대한 이해력이 높아서가 아니라 내 동생이라서 그렇다. 같은 말을 다른 이가 하면 나는 전혀 못 알아듣는다.


그렇다면 장애인을 가족으로 둔 나는 편견 없이 장애인을 대하고, 무조건 가까이 할 수 있는가? 아니.

나는 내 동생이니까 그 친구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의 일상의 도움을 주고 그 아이를 휠체어에 앉히느라 허리가 좀 나가고 뭐 그런 것이지 모두에게 그렇지 않다.

타인에게 그것을 기대하지 않듯 나 역시 타인 앞에 선뜻 나서지 않는다.


나는 봉사활동에 뜻이 없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벅찬 사람이며 마음의 폭이 넓지도 않다.

다만 가족 중에 장애인이 있고, 그들의 인권이 내 삶에 영향력을 미치는 범위 안에 있으니 어떠한 사안에 대해 타인 보다는 조금 더 예민하게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나는 장애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선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소위 ‘소외계층’이라고 해서 모두가 선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 중 어떤 이는 선하고, 어떤 이는 악하다. 우리 모두가 그러하듯.


그런 그들을 자신의 기준으로 <싸잡아서> ‘어떠할 것이다’라는 편견을 만들고, 그 기준에 어긋나는 경우를 만나면 하나의 사례를 가지고 침소봉대 해 역시 전체를 <싸잡아서> 혐오를 부추기고 나아가 정당화 하는 경우도 보았다. 이를테면 ‘장애인한테 잘해줬더니 뒤통수치네요.’ 라는 식으로.


그 사람의 뒤통수를 친 건 ‘장애인’이라는 어떤 특성을 공유하는 사람들 전체가 아니라 그가 만난 ‘그 사람’이다. 세상을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은 다양한 면을 가진 그저 한 사람, 한 사람이다. 누군가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부분을 가졌다 해서, 각자가 만들어낸 선입견으로 특정한 이미지를 투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에게 그들을 배려 해 줄 여유가 있다면 그렇게 해주면 되고, 때로는 그냥 무심히 지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쨌든 그들도 그들의 몫을 살아가는 중이므로.




‘장애를 가진 사람을 뭐라고 불러요?’ ‘장애인보다는 장애우가 더 정감 있지 않아요?’ ‘장애가 없는 사람은 뭐라고 불러요? 정상인? 비장애인?’ ‘장애우가 그렇게 불편한 말인가요? 선의로 대하는 데 너무 까칠한 것 아니에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이름이요.”

서울에 사는 김모 씨, 제주에 사는 박모씨, 혹은 모스크바에 사는 미하일씨.


(사실, '병신' 이라는 멸칭부터, '장애자' 라는 다소 멀찍하고 부정적인 늬앙스를 지나 과한 친절의 의무감을 지녔던 '장애우'를 거쳐 '장애인' 으로 정착되는 과정은 우리 사회의 인식도 점점 객관화 되고, 냉정한 성숙이 자리잡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꼭 장애 뿐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은 존재한다.

이 사회가 혼자 굴러가는 것이 아니듯, 내가 누리는 '여유'는 보이든 보이지 않든 이 사회 안의 누군가의 몫을 조금은 가져온 것으로 우리 모두 일정 부분 공동체의 의무를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건물 입구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 잡은 장애인 주차구역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각자의 소득에 따라 납부한 세금으로 저소득층에게 최소한의 생계비를 지원하는 것.

그 정도의 양보와 배려는 '내것의 박탈'이 아닐 것이다.


함께 사는 세상, 별것 아니다.

그저 모두가 사람 대 사람으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피차 <오바>하지 않으면 될 일이다.



2019년 마지막 날입니다.


이런 날에는 따뜻한 글을 올려야 하나 싶었지만, 그냥 오래전부터 한번쯤 이야기 하고 싶었던 주제를 던졌습니다.

사실은 지금 제가 말랑한 글을 쓸 수 있는 심신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냥, 뭐라도 쓰고 싶었어요.


저는 이 공간에서 소설-이라고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을 쓰고 싶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좋은 글을 쓰기 위해 고뇌하고 애쓰는 세상의 많은 작가님들에 비해 저는 아직 농익지도 못하고, 부족합니다. 그 부족함을 알지만 그냥 만들어낸 이야기를 쓰고, 어딘가에 담아두고 싶었습니다. 큰 욕심은 없어요. 그냥 지금은 ‘쓰고’ 싶을 뿐.


오늘은 화요일이고 내일은 수요일입니다.

새해라고 대단한 의미부여를 하지 않은 지는 좀 됐습니다만, 조금 무거웠던 것은 새해를 핑계삼아 과거에 내 던지고, 이제부터 생이 다하는 순간까지 매 순간을 아낌없이 살려고 합니다.


제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사진출처: google. 이미지 안에 저작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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