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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May 05. 2020

緣, 잊은 듯 살다가 무심히 마주해도 괜찮은 것.

몇 해 전, 심한 감기 때문에 이비인후과에 갔었다. 약이 독하기로 소문난 병원인데 차라리 독한 약에 취해서 죽은 듯 자고 싶을 만큼 독한 감기였다. 진료를 마치고 주사를 맞으러 주사실에 들어갔는데 주사를 놓는 직원이 실실 웃는 것이다. 가뜩이나 몸은 아파서 한껏 예민한데, 웃어? 기분이 상해서 한마디 쏘아붙이려는 찰라 이번에는 대뜸 반말로 내 이름을 부른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어리둥절 한 채로 표정이 굳었다. 그제야 상대가 내 표정을 읽었는지 머쓱한 표정으로 “나 모르겠어? 나 **야.”라며 제 이름을 말한다.     


친구.      


하루가 멀다고 옆 반으로 조르르 달려가 편지를 주고받았고, 휴일마다 만나서 여기저기 싸돌아다녔고, 친구의 언니 화장품을 훔쳐서(아니 빌려, 아니 훔쳐서)서로의 얼굴에 서툰 메이크업을 해 주며 깔깔거렸다. 친구가 집안 사정으로 부산으로 이사를 간 후에도 얼마간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편지를 따라 각자의 최근 사진도 오갔다. 그리고 연락이 끊겼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어느 날, 그 친구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그런데 내 손에 들린 것은 달랑 부산 주소 하나뿐이었다. 부산 114에 전화를 걸어 친구의 주소를 말하고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1990년대, 그 때는 이것이 가능했다. 그렇게 알아낸 전화번호를 떨리는 손으로 한 자 한 자 눌렀다. 늦은 밤, 잠에서 깬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친구의 룸메이트였다. 친구는 부재중이었다. 다시 전화하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시 전화하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어딘가에 글로 적은 적이 있다. 그리고 그럴싸하게 ‘세월의 빛바램’으로 포장했었다. 한 발짝 솔직해지기로 한다. 나는 그 친구를 잊었다. 눈물이 날 만큼 그 친구가 그리웠던 그 날을 빼면 나는 그를 잊은 듯 다른 연을 이어가고 있었고, 그 연이 조금 느슨해진 날에 한 때 팽팽하던 그 친구와의 연을 그리워했다. 바쁜 일상에 묻혔던 추억이 고개를 내미니 그제야 지독하게 보고 싶었다. 그 자각이 당황스러워 더더욱 보고 싶어야 했다. 강박의 위선을 감추고자 더욱 그리워야 했다. 그리고 위선적 그리움이 지나간 자리, 나는 또 그 친구를 잊었다. 그리고 십여 년의 세월을 건넌 자리에서 서늘하게 낯선 얼굴로 그 친구를 마주한 것이다.     


상처받기 싫어서 사람이 싫다고 했다. 거짓은 아니다. 다만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임은 굳이 말하지 않을 뿐이다. 나는 그랬다. 내 품 안에 들어온 이들에게는 한없이 넉넉하다가도 그 선에 닿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지독하게 무심했다. 혹은 그 안에 들어섰다가도 어느 계기로 선 밖으로 나간 이들에게는 처음부터 모르는 이들만큼 서늘했다. 내가 그런 사람이다. 그래서 나에게 연이라는 것은 항상 무겁거나 차가운 것이었다.    

  

소위 ‘손절’이라 불리는 인간관계의 정리, 그 이면에는 서로의 ‘다름’은 무시한 채 ‘남다른’이라는 강박으로 끌고 가다 뒤늦게 터진 파열음이 있었다. ‘손절’을 하기도, ‘손절’을 당하기도 했다. 할 때는 ‘그럴만 했’고, 당할 때는 ‘이럴 수는 없었’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내 맘 같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관계의 무게가 무거워지면 내 던지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다만 본능적으로 내 입장이 먼저 튀어나올 뿐, 그리고 내 입장만 기억할 뿐.      




사람에 대한 농도가 옅어졌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관계에 대한 '내 맘'대로의 확신이 옅여졌다. 감정의 깊이를, 감정의 농도를 규정하고 확신하기 시작하면 그 수위가 낮아지는 순간마다 마음이 지레 조급해질 것이고, 물결의 흐름에 따라 옅어지는 색깔에 찰랑찰랑 덩달아 마음이 흔들릴 것이다. 층층의 일희일비를 촉수를 세우고 바라보는 대신 눈 앞의 커다란 풍경을 무심하게 마주해도 좋은 것이 사람의 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태울 듯 햇살이 쏟아지는 날도 있고, 눈을 뜰 수 없이 먼지바람이 부는 날도 있지만 늘 세상을 채운 대기는 코끝을 지나고 있음을 굳이 의식하지 않고 사는 것처럼 비가 전부인 양, 세찬 바람이 전부인 양, 뜨거운 태양이 전부인 양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은 비가 오는구나. 오늘은 타죽을 듯 뜨겁구나. 너는 그렇구나. 나는 그렇구나. 마주하는 매 순간이 다르구나. 우리는 살아가고 있구나.          


거리에서 누군가 반갑게 인사를 했다. 너무 자연스럽게 웃으면서 ‘안녕?’하고 인사를 건네서 혹시 내 뒤에 누가 있나 싶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인사를 건넨 이가 샐죽하니 쳐다보더니 ‘우리 동창이야.’ 하고 찡긋 웃었다. 전혀 모르겠다. 이름을 들어도 모르겠다. 그렇게 공부를 싫어하면서도 한번 듣거나 본 것은 잘 잊어버리지 않는 유난스런 기억력 덕에 정규교육을 무난히 마칠 수 있을 만큼 타고난 기억력을 가졌음에도 유독 사람한테만 이 모양이다.


제 버릇 개 못 주고, 타고난 성정을 자동차 엔진오일 교환하듯 펌프질해서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니 두루두루 모두와 무덤덤하게 친해지는 일은 나에게 여전히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연이 닿은 자리, 내 맘 같지 않음에 대한 안달복달을 치워버리니 이해가 들어 앉았다. 그러니 이제 잊은 듯 살다가 무심히 마주해도 그저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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