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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Apr 27. 2020

접다 만 척추.

몇 달 전에 이런 글을 썼다.    


https://brunch.co.kr/@choizak/107


살벌한 제목과는 다르게 저 글의 요지는 꾸준한 도전을 통해 목표에 도달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간 내 글을 읽어주신 분들은 알겠지만 최근까지도 허리 통증을 부여잡고 사는 나는 척추를 접기는커녕 척추 모시고 살기도 버거운 형편이다. 따라서 척추를 접겠다는 나의 호언장담은 슬그머니 잠정 철회된 상태이다.   


그리고 밤낮이 뒤바뀐 생활 리듬을 바꿔 아침에 일어난 지 약 한 달 반이 되었다. 잠들 타이밍을 놓쳐 새벽에 잠이 들어도 무조건 아침 9시 이전에 눈이 떠진다. 뒤척임이나 망설임 없이 일어나게 된다. 8시에는 일어나야 한다던가,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라는 각 잡힌 다짐이 아니라 '그냥 어쩌다 그렇게 된' 자연스레 스며든 일상이다.      




잠이 오지 않을 때, 핸드폰으로 브런치 글을 읽을 때가 있다.

구독하고 있는 작가님들의 새 글을 읽기도 하고, 브런치가 추천하는 글을 따라 들어가 읽기도 한다. 다양한 글을 접하며 다양한 감정과 생각들이 떠올랐다가 가라앉지만 좋은 글을 만날 때, 공통적으로 그 안에 담긴 한 줄 한 줄 짙은 정성을 읽는다. 부럽고, 부끄럽다.


나는 어떤 구체적 방향성이나 목표를 가지고 브런치를 시작하지 않았다. 

실은 아무 생각이 없어서 브런치를 시작했다. 

(몇 해 전 초창기 브런치 베타 시절에 시작했다가 몇년을 방치했고 다시 시작한 것이 6~7개월쯤 됐나보다. 그때 탈퇴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지금 다시 도전했으면 작가 신청에서 똑 떨어졌을 것이다.)


내 글은 심각하게 작자(作者)인 나 중심적이다. 심지어 독자조차도 나를 상정하고 쓰는 터라 나 즐겁자고 쓰는 글이거나, 나를 위로하자고 쓰는 글이거나 가끔 내뽕(?)에 취해서 쓰는 글이다. 그렇게 일관성이 없으니 아무리 글이 쌓여도 책으로 묶을 수도 없다. 전문적이거나 유익한 정보를 담고 있지도 않고 바쁜 일상이 녹아 있지도 않다. 죄다 어디가 아픈 얘기거나 뜬금없이 옛날 옛적 이야기를 하다가 가끔 삐딱하고 까칠해진다.      


이게 무슨 짓인가. 싶을 때도 있었다. 이 실없는 글질을 왜 하고 있는 것인지. 뚜렷한 색이 보이는 작가님들의 글을 만날 때면 슬쩍 시무룩해지기도 했었다. 앞 뒤 없이 후루룩 써 내려간 글을 꺼내놓고 뻔뻔하게 발행버튼을 눌러놓은 뒤 타인의 정성 담긴 글들과 비교하면서 '나는 인생 참 대충산다.' 싶기도 했다. 그러나 쓰려고 쓰는 것이었다. 단어도, 문장도 잃어버렸고 한 줄의 호흡을 따라가기도 그저 버거운데 마음 안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목울대에 걸려 간질간질 울음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중구난방 글을 썼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일관성 없이 쓰기 시작했다. 한 문장을 채우고, 한 단락을 채우고 한 편의 글을 채웠다. 고백하건대 나는 늘 뿌듯했다. 그렇기에 버틸 수 있었다.               


코로나19의 여파로 그나마 유일하다시피한 외출처였던 도서관조차 문을 닫아버려 딱히 갈 곳도 없는 반 백수 늦깎이 글쟁이는 이 와중에 지나치게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들어버렸다. 시간이 남아돌아 넷플릭스를 휘젓고 다니고, 밀린 책을 읽고, 이렇게 주절주절 브런치 글을 쓰면서도 내 노트북 안에 저장된 <2020 > 이라는 폴더는 열지 못하고 있다. 그 안에 잠든 아래 한글 하얀창은 마주보지 못하고 있다. 긴 호흡을 따라가야 하는 글, 오롯이 모든 것을을 쏟아붓고 싶은 글, 그 시작을 하지 못하고 있다. 접히기는 커녕 꼿꼿해지는 척추를 마주하듯 무기력해진다. 





지금 브런치 프로필사진으로 쓴 사진이다.

나는 각 잡힌 H라인스커트나 딱 붙는 스키니 진, 그리고 일명 ‘스틸레토힐’이라고 불리는 칼 같은 구두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곡선보다는 직선을 좋아하고 말랑하고 따뜻한 것 보다는 차갑고 딱딱한 질감을 좋아한다.  이를테면 보송보송한 곰인형 보다 스테인레스 조각상이 좋다는 것이다. 일정부분 갖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막연한 추종이나 동경이 깃들어 있을지언정.

그런데 나는 이 사진을 참 좋아한다.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원피스 자락 끝으로 빼꼼 삐져나온 발가락, 비에 젖은 바닥에 비친 그림자까지. 내가 아닌 듯 찍힌 내 모습이 좋다. 직선을 사랑하는 내가 슬그머니 내 안에 스며든 곡선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일관성 없이.       


앞으로 이어질 나의 글도 역시 일관성 없이 중구난방일 것이다. 

나이 마흔 줄에 부모 집에 얹혀사는 이야기를 부끄럼 없이 꺼내 놓고, 수시로 무너지는 결심을 마치 단단한 양 허풍을 떨고, 난데없는 셀카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걸어놓기도 하고, 노트에 그린 발그림을 본문 중간에 떡 배치하는 무신경함을 유지할 것이다. 그러다가 척추를 접겠다는 거창한 목표를 잊어 버린 채 그냥 무심히 스며든 삶의 습관으로 어느 날 덥썩 척추를 접어버릴수도 있겠다. 



쫄지말고 2020 폴더를 열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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