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oijak Apr 25. 2020

자력갱생의 시간.

늘 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은’ 했다. 그러나 도무지 정이 붙지 않았다. 이 운동이라는 것에는.

큰맘 먹고 바람 부는 호숫가를 걸었다. 이거라도 해야 살지 않겠는가.

같은 풍경조차 살벌하게 만드는 바람 부는 날씨


한 바퀴만 돌려다가 두 바퀴를 돌았다.

.......자다가 다리에 '큼직한' 쥐가 나서 믿지도 않는 신을 목놓아 불렀다.                          




며칠 전 손목이 아파 집 근처 새로 생긴 신경외과 의원을 찾았다.

주 진료과목은 신경외과였으나 비만관리실도 운영하고, 물리치료실도 운영하니 손목 진료쯤은 괜찮겠다 생각했다. 단, 허리통증은 말하지 않기로 했다. 한 번에 한 가지만.

   

접수를하면서 처음이라고 했는데, 내가 왔다 간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럴 리가. 내가 총기까지 흐려진건가?

마냥 혼란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니 **마트 앞에 있던 **클리닉이라고 하신다.     


이런.     


그러고 보니 낯익은 주문이 이어진다.

진료받기 전에 ‘반드시’ 겉옷을 벗고 대기실에 앉아 있으라고 한다.

**클리닉 시절에 한 번 갔을 때 이 부분이 영 불편했다. 그 때가 추운 겨울이었는데 들어오자마자 겉옷을 벗으라니. 납득도 설득도 되지 않았다.  아마도 이 병원 원장님은 환자가 진료실에서 겉옷 벗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싫은가 보다. 시간상의 이유든 미관상의 이유든. 그래서 접수 창구에서 접수를 하자 마자 모든 환자에게 겉옷을 벗고 대기실에 앉아 있으라는 다소 ‘권위적’인 매뉴얼을 설정한 것 같다. 굳이 물어보진 않았지만.


이번에는 겨울이 아닌 봄이었지만 그 날 따라 바람이 불고 빗방울이 흩뿌리던 날인데 하필 얇은 반팔 티 위에 자켓만 걸치고 나섰으니 대기실에 덜렁 반팔차림으로 앉아 있기 싫었다.

“들어갈 때 벗을게요.”라고 말하고는 겉옷을 입은 채로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내 이름이 불리자 마치 모델이 백스테이지에서 옷을 벗어던지듯 날랜 몸짓으로 자켓을 벗으며 들어갔다. (이게 뭔 짓이냐.)      

 

의사선생님은 이것저것 물어보고, 요기조기 만져보고 약을 먹으라 하고, 물리치료를 받으라 했다. 그리고 손목을 쓰지 말라는 지킬 수 없는 처방을 내렸다.

물리치료실에서는 또 물리치료 실장님이 요것저것 물어보고, 요기 조기 만져보더니 진료실에서 뭐라고 했냐고 물어본다. 들은대로 ‘어쩌구저쩌구’ 했더니 한숨을 낮게 포옥...쉰다.

이건 팔이 문제가 아니라 목이 문제인 것 이라고. 다음엔 목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란다.     


네. 라고 대답하곤 머릿속으로 잠시 생각했다.      


음, 다음에 병원을 찾아 반드시 ‘겉옷을 벗고 대기하다가’ 들어가야 하는 진료실에 들어가서 “물리치료 실장님이 그러시는데, 이건 팔이 아니라 목이랍니다. 목 사진을 찍어달라고 말하라고 하던대요?” 라고 했을 때 과연 평화로운 진료가 이루어질 것인가? 하는, 왠지 그들 사이에 놓인 처방권과 임상경험 사이의 팽팽한 고무줄 같은 그것을 내가 툭! 끊어서 난데없이 고무줄의 파편을 맞을 이유가 있을까? 하는 다분히 갈등 중심적인 망상?     


이런 실없는 상상 끝자락에 나는 여기를 다시 찾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저 혼자 피식 웃고 말았다.


일단 ‘반드시’ 자켓을 벗고 대기실에 앉아 있어야 하는 것이 나는 많이 불편했다. 그리고 대기실 벽면에 큼직큼직하게 붙어있던 ‘코로나19 예방 면역력 주사’라는 자필 광고에 헛웃음이 나왔다. 의료기관도 사업체인데 영리 추구를 두고 뭐라고 하겠는가. 일견 면역력이 강화되면 '코로나19'도 비켜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귀 얇은' 비전문가로서의 식견이 떠올랐지만 또 그게 될 것 같았으면 애초에 전국민이 면역강화제 같은 것을 맞고 말았겠지. 이 고생들을 하겠어? 하며  '어설프게' 냉철해 지기도 하고... 형광색 색지에 팝업아트로 쓰인 글씨를 보며 무심한 생각들이 오락가락 떠다녔다.  그냥 환자가 미리 겉옷까지 벗어야 하는 의료 전문가의 권위와 '코로나 19 예방 면역력 주사'라는 광고문구가 주는 불균형이 썩 내키지 않았다. 그러니 굳이 내가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가 ‘물리치료실 실장님이 목이랍니다!’ 까지 외칠 일은 없다는 것이다.   




아마 목의 문제라면 나는 견인 치료를 받았을 것이다. 지난 세월 수없이 많이 해 본 치료다.

늘, 가기가 귀찮고. 치료받는 시간이 지겨워서 '어지간히 살만하면' 그만뒀었다.


2016년, 견인치료 중에 사진을 찍어서 여기저기 톡으로 날렸었다. 귀엽지 않냐는 망언을 보태서.


문득 이런 거 혼자는 못하나? 하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2020년, 우연히도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걸 보고 혼자 빵 터졌다. 인터넷으로 산 목 견인기다. 여기저기 톡을 날릴 일은 없다.


인터넷 검색 몇번으로 다양한 목 견인기를 발견했다.

역시 인생사 자력갱생이다.




어떤 것이든 나에게 딱 ‘맞는’ 것이 있을 리 있나. 이것저것 고려해 내 기준으로 딱 맞춘 물건조차도 쓰다보면 어딘가는 불편해지는데 하물며 감정이 꿈틀거리는 사람이 엮여 있는 것에 그런 것이 있을 리 없다. 굳이 내 뜻을 구구절절 설명하며 맞춰달라 요구할 이유도, 상대에게 물러남의 이유를 설명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 당연한 것들을 수시로 잊어서 툭하면 헛발질을 ‘오지게’ 하는 것이 또 사람이다만.       

매거진의 이전글 뭐야, 돌려줘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