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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Dec 30. 2020

오늘이 생각보다 괜찮아서 머쓱해 하며 쓰는 글

feat. Daily report

모든 것의 시작은 이명이었다. 


이 지독하고 답 없는 병(?)은 그 병을 앓아본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을 성격 파탄으로 몰아가는 못돼먹은 병증으로, 영혼까지 탈탈 털어버린다. 주변의 소음조차 집어삼키고 오직 귀 안에서 울리는 벌레소리인지, 외계인 소리인지, 전파음인지 알수 없는 소리만 주위를 채우고 종국에는 내 목소리조차 제대로 인식이 안된다. 

목소리가 안 들리는 것이 아니라, 들리고, 말하고 있는데 그 뜻이 바로 와 닿는 것이 아니라 힘없이 허공에 맴도는 묘한 무력감과 이질감, 내 목소리 조차 낯선 기분이 들어 마치 말이 안 통하는 다른세계에 혼자 뚝 떨어진 이방인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


사방이 고요한 밤이면 이명의 괴로움은 몇배수로 증폭된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그러다가 벌떡 일어나 억지로 숨을 꺼내서 꽤액 뱉어보고, 한 올 한 올이 귀한 머리칼을 쥐어뜯는다. 실체 없는 소리를 덮어보고자 유튜브를 틀어놓고 잠이 들라치면 휴대폰 안의 목소리들이 허공에서 공명할 뿐, 내용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새벽 서너시까지 그 지경으로 벌건 눈을 부라리며 꿈틀대다가 겨우 지쳐서 잠이 들었다가 귀를 찢는 귀뚜라미 소리에 어질어질 잠이 깬다. 이명은 아침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지독하고 못된 놈이거나 년이다.


상황이 이 지경이다보니 가만히 누워있는 것만큼 고역이 없었다. 그래서 꾸역꾸역 집을 나서야 했다. 그러나 작업실로 나와 책상 앞에 앉아도 뭐 하나 집중이 되질 않았고 그럴수록 불안과 초조함은 저만치 나를 앞서 내달린다. 그러다 보니 서러움이 주렁주렁 새끼를 치고, 나는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상실감에 마냥 눈물만 쏟아졌다. 결국 하루종일 고요한 방에 앉아 내 귀에만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를 견디며 손놓고 하루를 흘려보내는 일이 일상의 전부였다.




데일리 리포트(Dairy report)

 

하루의 일과를 시간단위, 세세하게는 15분 단위까지 기록하는 것으로 보통 빠듯한 시간을 관리하고 일상을 체크하는 자기관리의 일환으로 많이 쓰인다고 한다. 허나 나는 시간이 빠듯하지 않다. 까놓고 말해 남는 것이 시간이고, 지루할 만큼 큰 일이 없는 일상이라 체크하고 관리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몸이 아프니 마음이 따라 아팠고, 무기력하게 늘어지는 일상이 못내 걱정스러웠다. 또 이렇게 좌절의 달달함에 물드는 것이 싫었다.     


때마침 유튜브를 통해 알게 된 데일리 리포트를 나도 한번 써 보기로 했다. 실상 뭐 대단히 관리할 일상이라는 것이 없으니 <도대체 얼마나 열심히 아무것도 안했는지>를 내 눈으로 확인하려고 한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리포트니 일단 세가지의 목표를 정해두고 작성을 시작했다. <얼마나 읽고, 얼마나 썼으며, 얼마나 움직였는지>를 심플하게 기록하기로 했다. 또한 그 결과를 두고 절대 스스로를 깎아내리거나 자책하지 않으며, 괜한 반성이나 끝없이 감정이 파생되는 감상은 한 자도 적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먹은 것은 월요일이었으나 그날은 그마저도 귀찮고, 머리도 댕댕 아파서 양식만 출력해 놓고 하루를 미뤘다. 따라서 리포트의 작성 첫날은 2020년 12월 29일 화요일, 바로 어제였다. 어제의 리포트를 읽어보니 일어나서 씻고, 점심을 먹고 호숫가를 30분 정도 산책했다. 단 한 줄의 글도 쓰지 않았으며 책은 두 장 정도 읽었다. 호숫가를 산책한 것은 마침 날이 겨울같지 않게 따뜻했으며 제일 싫은 일을 해 치우면 그나마 뭘 한것 같은 기분 때문이다. 저녁에 하는 운동이 제일 효율적이라고는 하지만 내 성향상 한번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는 일은 그 일의 난이도를 몇배 쯤 증가시키는 일이기에 집에서 나오는 길에 호숫가에 들러 걷기로 했다. 저녁에 갔을 때, 몇 번 마주치던 ‘개끌고 다니는 훈남’이 보이지 않는 점은 못내 섭섭했지만, 할 수 없다. 이후의 일과는 상기했듯 아무것도 없었으며 퇴근은 저녁 8시였다.      


다음날, 2020년 12월 30일. 오늘이다.

한파 주의보가 내려진 날이다. 따라서 호수는 생략이다. 두시쯤 작업실에 출근했고, 유튜브 스트리밍으로 재생중인 드라마 시리즈를 멍때리고 보다가 책을 한 챕터 읽었다. 그리고 저녁을 먹었고 오늘도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가 되려했으나 마음을 바꿨다. 10장. 무엇이 되든 하루 10장은 쓰려는 것이 장기적인 목표이다. 물론 그 10장안에는 일상의 기록이나 잡문은 포함되지 않으며 순수하게 창작물에 관련된 작업만 포함된다. 각잡고 쓴 시나리오일 수도 있고, 아이디어 수준의 중구난방 메모일 수도 있고, 소설의 초안이거나 트리트먼트일수도 있다. 무엇이든 <창작> 이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2시간 반 정도를 썼으며, 7장을 채웠다. 여백이 많은 작업이었음을 감안하면 꽉 채운 분량으로는 겨우 세장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갑자기 괜찮아졌다. 그래서 이 글을 시작했다. (이 글은 일기에 가깝기에 10장 분량에서는 제외다.)          


내일이 지나면, 1월 1일 부터 1월 3일 일요일까지는 자체 휴가 예정이다. 

직장인은 아니지만 일정한 근무 시간을 두고 글을 쓰고, 쉬는 날을 정해두기로 한 것이다.

그 기간 동안은 가벼운 소설책을 읽을 것이고, 다운받아둔 영화를 볼 것이다. 글은 한 줄도 쓰지 않을 것이며 추운 작업실도 그 기간동안 폐쇄 예정이다. 작업실 바닥에 깔아 둔 이불을 가져가서 빨 생각이다. (이것은 완벽하게 미션 클리어할 수 있을 것 같다. 세탁기에 집어넣고 버튼 몇개만 누르면 되는 일은 이명이 방해하지 못하는 몇 안되는 요소 중에 하나이므로)          




이제 얼마 간 브런치는 잠정 휴업이 될 것 같다. 

사실 맥락없는 일기를 쓰는일이 지루해졌다. 테마도 없는 글, 나를 설레게 하는 창작도 아닌 글로 맥없는 감정을 쏟아내고, 끝없는 자기위안이 가득한 글을 보노라니 그 누구도 아닌 내 글의 제일 첫 독자인 내가 질려버렸다. 게다가 몸 상태는 역대급으로 좋지 않아 체력도 바닥이다. 손목이며 허리며 골반이며....사실 온몸이 비명을 질러대는 지경이고, 슬슬 위장병도 창궐할 것 같다. (오래 앓다보면 감이 온다.)               


나는 창작자로 살고 싶다.

비록 보는이가 적더라도, 내 재주가 못내 미천할지언정 창작물을 쓰고 세상에 내 놓을 수 있다면, 매 순간 그렇게 살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니 잠시의 휴지기 동안 어떻게든 나를 단련하고, 글을 단련하려고 한다.     

오늘은 생각보다 괜찮은 날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명은 낫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요란하게 울리는 소리 때문에 수시로 숨을 몰아쉬고 있다. 그러나 언제나 그러하듯 이 역시 시끄러운 채로 나의 삶에 녹아들지 않을까 싶다. 시끄러움과 함께 하는 무심한 삶의 모순을 체득하며 살아야 할 모양이다.     




우울 기운 뿜뿜한 글로 한 해를 마무리하기는 싫어서 머쓱함을 무릎쓰고 글을 쓰는 중이다.

개중에 희망이라면 희망이고, 역시 나는 글을 써야 견딜만한 인간이라는 글줄 하나 새겨놓으니 마음이 편해진다. 글쓰는 자들이 많이들 그러하듯, 나는 글관종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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