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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Jan 08. 2021

늙은 약국의 진통제에 대한 단상.

역전 사거리 어느 길가에는 약국도 아닌 약방이 하나 있다. 늙을 대로 늙은 약방은 1980년대 외관 그대로 땟국이 줄줄 흐르는 간판을 달고 그 자리에 서 있다. 약방 만큼 늙은 약사가 운영하는 약국은 병원 처방전 조차 받지 않는다. 컴퓨터 한 대 없으니 전산 시스템이 갖춰졌을 리 없고, 자양 강장제 몇 박스, 하얀 가루로 된 소화제 몇 통만 덩그러니 놓인 진열장과 매대는 썰렁하다 못해 횡할 지경이다. 그럼에도 꾸준히 약방문을 여는것은 그 곳이 이 지역 노인들에게는 용한 약국으로 소문난 터였다. 그 곳의 효자상품은 자체 제조한 진통제이다. 빨간 알약, 노란 알약, 하얀 캡슐, 노란 캡슐로 구성된 알약들이 하얀색 봉지안에 담겨있다.


노인들은 당신보다 약사가 먼저 죽을까 걱정이라고 한다. 갈 때 마다 약사의 건강을 비는 깊은 속내는 그가 떠나면 그 용한 진통제를 더 이상 구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입소문을 타고 무릎이 아픈 노인, 허리가 아픈 노인, 손목이 아픈 노인들이 타 지역에서 원정을 오고, 이곳에 사는 지인을 통해 대신 약을 사 달라 하는 지경이라니 약사의 건강을 걱정하는 노인들의  진짜 속내를 두고  마냥 인간미 없다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우리 집 주방 싱크대 서랍 안에도 역전 약국의 약봉지가 차곡차곡 쌓여있다. 엄마의 몫이다.


내 엄마는 전시를 대비한 비상 식량을 채워놓듯 수시로 역전약방에서 약을 사다 채워놓는다.    

예전에 나는 이를 두고 온갖 억지 의미부여를 해서 글을 썼던 적이 있었다. 이제 그깟 의미부여 집어 치우자.




작업실을 꾸려 나온 후에 내가 조금이라도 안정된 부분이 있다면 그건 99프로 가족 얼굴을 잘 안 보기 때문이다. 늙어가는 속도와 비례 해 빠르게 철이 없어지는 떼쟁이 아버지와 감정의 반 이상은 설움과 짜증으로 구성된 엄마, 그리고 끝내 다섯 살 아이같은 서른을 훌쩍 넘긴 동생을 마주하는 일이 나는 괴롭다. 철없음이 개쿨이라도 된 양 입으로는 너줄너줄 철 없는 척 하지만 실상 진즉에 눈치 빠꼼 철이 나서 슬그머니 많은 것들을 내려놓았음을 자각하거나 당신의 설움과 짜증을 이해하는 만큼 꼭 닮은 모습으로 당신과 쨍! 하고 부딪히는 것이 싫었고, 영영 다섯살 동생을 바라보면서 마치 다른 세계에 사는 듯 아이의 어법으로 대화를 나누다가도 훅 들어치는 서늘한 이질감이 영 불편했다. 그 하나 하나의 단면을 목도하는 시간이 줄어든 것만으로도 나는 살것 같았다. 쫄쫄이 레깅스에 늘어진 티셔츠를 입고, 세수도 안 한 채로 나와서 허리가 아프면 누울 수 있고 대충 이것저것 집어먹으면서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곳으로 출근(?)하면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개연성이 떨어지든 말든 싱크대 서랍 안에 넣어둔 엄마의 진통제는 나에게 심리적 마지노선이었다. 저것만큼은 넘어가지 말아야지. 아무리 아파도 저건 먹지 말자. 그래서 가능한 그 약에는 손을 대지 않으려했다. 싱크대 서랍을 여니 한 봉지에 만원짜리 진통제 다섯봉지가 노란 고무줄로 종종 묶여 얌전히 놓여있다. 다섯 봉지중에서 한봉지를 빼냈다. 하얀 약 봉투의 입구를 열고 바닥에 알약을 툭 쏟았다. 그리고 엄마가 하던대로 빨간 알약 하나, 노란 알약 하나, 하얀 캡슐 하나, 노란 캡슐 하나를 골라내 입안으로 털어넣고 나머지 알약들을 봉투에 쓸어담았다.


뭔일이야 나겠는가. 진통제가 그저 진통제지. 그걸 먹으면 나도 50프로쯤 짜증과 설움으로 도배된 사람이 될것 같다는 그깟 되도않는 의미부여, 집어치웠다. 그냥 진통제다. 어느 진통제를 먹어도 마찬가지이듯 속이 메스꺼운 것, 몸이 좀 붓는 것, 그래서 하루종일 눈 앞이 묵직한 것, 지극히 현실적인 그런 것 말고 뭐가 더 있을까. 일단 통증을 눌러주면 되는 거 아니던가. 혼자 꼿꼿하게 날 세우지 말고 좀 대충 살자.     



퇴근이나 해야겠다. 그래도 잠은 따뜻한 방에서 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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