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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Sep 24. 2021

‘착한’ 마음이 꼭 멍청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계속 이렇게 살란다.

‘착함’이 천대받는 세상에 사는 기분이다. 착하면 바보 된다, 조금 더 나아가 ‘병X’ 이다. 쓸데없이 착하지 마라, 이기적으로 살아라. 착하면 호구 된다. 

등등.     


지독하게 이기적으로 오직 나만 바라보면서 살아야 하고, 타인의 입장을 배려하고 고민하는 일을 쓸데없는 오지랖이거나 손해보는 일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다. 나 또한 내가 가지고 있는 그러한 면모에 대해 불만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때로는 위악을 떨 때도 있었고, 누군가에게 매몰차게 굴기도 했다. 그러나 내내 찜찜함이 남았다. 그럴 때면 이놈의 쓸데없는 착함병이라며 스스로를 책망하곤 했다. 내가 나를 싫어하는 이유 중 단연 첫 번째가 그놈의 착함병이었다.     


물론 초지일관 이타적인 것이 옳다고 할 수는 없다. 어느 순간에서든 제일 소중한 존재는 나이며,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타인이야 어떻든지간에 나만 소중하면 되는건가? 모든 것들을 이익과 손해라는 이름으로 판단하고 그것으로 옳고 그름을 가르며 착한 것은 곧 손해라 하여, 그것이 '그름'과 같은 이름으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따라서 착한 마음은 멍청하다 단호하게 규정짓는 것이 맞는가?


        



몇 해 전 여름, 둘러봐도 숲과 나무, 바람밖에 없는 시골 마을 한 귀퉁이에서 그저 바람소리, 새소리만 들으며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다. 실컷 늦잠을 자고 일어나서 머그컵에 듬뿍 담은 커피를 들고 슬슬 산책에 나섰다. 어느 새 해가 높이 올라 시멘트로 닦은 농로를 따라 제법 쨍쨍한 햍볕이 쏟아지는 날이었을 것이다. 농로를 따라 걷다 보니 큼직한 살수차 트럭이 세워져 있고, 기사와 노부부가 실랑이중이었다. 그 때 나는 언덕 너머의 풍경이 보고 싶어서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중이었는데 노부부와 살수차 기사의 실랑이 때문에 잠시 멈춰서 그 상황을 지켜보게 된 것이다. 


심각한 가뭄에 지자체에서 농지에 물을 공급해 주는 모양인데, 노부부의 밭이 경사가 심한 것이 문제였나보다. 물을 가득 실은 살수차는 가파른 길을 오르지 못해서 연신 뒤로 미끄러지니 기사는 물을 댈 수가 없다고 하고, 노부부는 어떻게 방법이 없겠냐며 울상이었다. 


그제야 마냥 좋기만 했던 산속의 풍경의 밑바탕이 눈에 들어왔다. 햇빛을 받아 쨍하게 빛나는 나뭇잎의 초록 뒤로 마짝 마르다 못해 바스라질 것 같은 밭의 마른 흙과 그 흙에 뿌리를 내리고 겨우 숨을 붙이고 있는 쪼그라진 농작물들, 그리고 그만큼 애가 바짝 탄 노부부의 검은 얼굴, 흙물 밴 손이 눈에 보였다. 


이런저런 방법을 제시하며 물을 대달라는 노부부의 애원에 살수차 기사는 마지막으로 한번 만 더 해보자고 차에 올랐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혹시나 트럭이 밀릴까 큼직한 돌을 옮겨서 트럭 바퀴에 괴려고 했고 그런 할아버지를 본 트럭 기사가 운전석에서 몸을 바깥으로 빼 소리를 지르며 노인을 쫓아냈다. 트럭 기사는 ‘영감님, 죽고 잡소!’ 라며 투박한 사투리로 노인에게 면박을 주며 노인을 안전한 곳으로 쫒아(?)낸 것이다.       


그 모양을 고스란히 지켜보자니 내 손에 들린 커피잔이 머쓱해졌다. 그 옆으로 한가하게 커피잔 들고 산책하기가 영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슬쩍 뒤로 물러나 방향을 틀었다.


이어 트럭이 털털털 엔진소리와 함께 밀리지 않으려 애쓰는 듯 끼익끼익 마찰음을 내며 움직였고, 나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대여섯 발짝쯤 떼었을까?  천지가 울렸다. 돌아보니 육중한 덩치의 트럭이 쿵! 소리를 내며 옆으로 쓰러졌고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몇바퀴를 뒤집히며 아래쪽으로 굴러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머그컵을 집어던지고 혼비백산 소리를 지르며 뛰어내려왔다. 곧 소리가 멈췄다. 그제야 돌아보니 나무에 걸려 멈춘 트럭은 할아버지의 오토바이를 깔아뭉갰고, 살수차의 물은 야속하게도 시멘트 농로를 따라 개천을 이뤄 콸콸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재난과 같은 상황을 앞에 두고 나는 눈으로 노부부를 찾았다. 다행히 한쪽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서 계셨다. 이제는 기사의 안위가 걱정이었다. 그런데 천운인지 트럭의 운전석이 하늘로 향한채 멈춰 있었고 잠시 후 운전기사가 무심하리만큼 쏙 빠져나와 폴짝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그제야 숨이 터졌다. 숨을 돌리고 다시 바라보니 트럭이 멈춘 곳은 내가 잠시 전까지 갈것인지 말 것인지 망설이며 서 있던 그 자리였다.     

 

그날, 나를 살린 것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지레 배려하는' 그 짧은 순간의 '쓸데없는' 선함이었다. 내 눈에 들어온 바짝 말라가는 밭과 그 앞에서 물을 사정하던 노부부의 주름진 얼굴과,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해 난처해 하다가도 한번 해 보자며 차에 오르던 트럭기사. 그것들이 뒤얽힌 누군가의 치열한 삶의 편린, 그 옆으로 한가하게 커피잔 들고 지나가는 나의 모양새가 머쓱하고 낯부끄러워 돌아섰던 마음. 그 한올짜리 선(善), ‘착함’ 이이 나를 살렸다.  내가 오롯이 나의 목표, 나의 관심사, 내가 보고 싶어하던 언덕 너머의 풍경에만 마음을 주었더라면, 타인이 힘겹게 살아내는 터전이든 말든 나에게는 오직 쉼표라며 그 의미만 좆았다면.    







문득 그 여름의 생각이 났다.      


내내 힘든 일로 범벅인 날들, 마음도 엉망이고, 심란한 일은 끝이 없고 이 지독한 앞날은 어쩔 것인가 답도 없는 고민 때문에 숨이 막히던 시간을 지나며 그래도 되짚어보니 식상하기 짝이 없는 말이지만 어쩌면 오늘 하루의 살아있음이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물 싫다는 사람 있던가.  


그렇게 생각하니 나를 가장 사랑하되,  조금은 곁을 내어 삶의 구비마다 내 곁을 지나는 이들을 슬쩍 곁눈질하고 살피며 사는 것도 괜찮다 싶었다. 내가 나를 싫어하게 했던 그것, ‘쓸데없이 눈치보고, 쓸데없이 남을 살피고, 배려랍시고 마음 쓰다가 상처받는 일’이 영 쓸데없지만은 않았다는 것, 그 누구도 아닌 나에게 덕이 되어 돌아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러쿵 저러쿵해도, 때론 진심으로 그만 살고 싶다고 한탄을 해도 나는 여전히 살아있는 순간이 좋았다. 그리고 삶은, 아무리 독고다이인 척 해도 오로지 혼자만 살아낼 수는 없었다. 슬쩍 곁을 내주는 이들, 투박한 위로를 건네는 이들, 손발이 오그라들 응원을 건네는 이들. 그들의 덕으로 까딱까딱 숨 쉬며 살고 있으니.


착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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