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휴대폰에는 ‘브런치 스토리’ 앱이 없다.
글을 올릴 때도, 댓글을 달 때도 다른 작가님의 글을 읽을 때도 나는 항상 pc버전을 이용한다.
일단 글을 쓸 때 휴대폰 화면을 터치해 쓰는 것보다 타이핑이 열 배쯤 빠르고, 워드 프로그램에서 초고를 쓴 후에 올리는 습관이 있다. 그래서 그렇게 된 것이다. 댓글을 달 때도 비슷한 이유이다. 휴대폰 터치가 속 터져서.
당연하게도 알림이 수시로 울려서 일에 방해가 된다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다. 내 글은 ‘비인기종목’에 해당하는 편이라 메인에 걸려 조회 수가 폭발하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수시로 울리는 알림 때문에 무언가를 방해받을 일은 없다.
이런 사정으로 작업실에서 글을 올리고 나면 부러 노트북을 켜지 않는 한, 브런치에 접속할 일이 없다. 그저 나 할 말 지껄(?)이고 나서 그 자리에 앉아 오가는 이들 구경 좀 하고, 가끔 나에게 인사를 건네주면 반갑게 손 흔들고 집에 가는 것이다.
종종 밤에 글을 올리거나, 다른 작가님 글에 댓글로 출몰하는 경우는 내가 어떤 사정으로 집에서 노트북을 켰다는 뜻이다. 어젯밤이 그랬다. 확인할 것이 있어 집에서 쓰는 낡은 노트북을 켰다가 브런치에 잠시 들어와 다른 작가님들 글도 좀 읽고, 소심하게 라이킷도 좀 누르고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지난번에 올린 글을 지웠다. (지울 수도 있는 글)이라 하였고, 지우고 싶어졌다. 댓글을 달아주신 분들이 계셔서 머뭇거렸지만, 그 글을 그냥 두자니 내가 그 감정에 잡아먹히는 기분이 들어서 어쩔 수 없었다.
삶은 말 그대로 ‘생’이라 수시로 움직이고 변화한다. 그런데 오랜 세월(나름 살 만큼 살았다.) 겪어본 바에 따르면 안 좋은 일일수록, 불편함 감정일수록, 나쁜 기분일수록 그 안에 머물게 하는 힘이 컸다. 그래서 그 글의 제목을 마주하는 순간마다 나는 또 ‘한심’해질 것이다.
그래서 글을 지웠다. 분명하게 하자면 지웠다기보다는 ‘발행취소’를 눌렀다. 발행취소가 된 글은 <작가의 서랍>에 보관된다. 그리고 목록에서는 사라지지만, 글쓴이인 나는 다시 읽을 수가 있다. 전에는 댓글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시스템이 바뀌었는지 댓글은 다시 읽을 수가 없는 모양이다.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다.)
그런 와중에 나를 기함하게 하는 일이 일어났는데 발행취소 글 목록에 낯선 글이 있었다.
바로 이 글이다. <소주, 계란후라이, 더블샷 아메리카노>
내가 이걸 발행 취소를 했다고?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문제는 저 글을 취소한 날짜이다.
목록에서는 최초 발행일로 보이지만, 글을 클릭해 들어가 보면 발행 취소한 날짜가 표기된다. 지금은 2023.10.15. 로 보이는데, 이건 내가 '?????' 하면서 다시 발행을 했다가 취소해 보는 과정에서 날짜가 그렇게 바뀐 것이고 최초 발행취소일은 2023.09.29. 이었다.
이때가 언제냐? 추석 연휴이다. 나는 추석 연휴 내내 침대에 누워 노트북으로 <넷플릭스>만 보고 있었다. 중간에 브런치에 들어갔을 수도 있지만, 그랬다 하더라도 보통 다른 작가님의 글을 읽거나 했겠지, 굳이 나의 철 지난 글을 읽고 발행취소를 누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현대문명의 기록은 내가 2023년 9월 29 일에 브런치 스토리에 접속해서 2017년에 쓴 글을 발행취소를 했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결단코 그런 기억이 없다. 이쯤 되니 무서워졌다.
요즘 방금 한 말도 기억이 안 나는 경우가 잦아졌다. 노안, 비만에 이어 이제 기억력 감퇴? 정말 서러운데?
나는 <치매>를 검색했다.
부끄러운 고백을 해야겠다.
꽤 오래전 이야기인데, 친구들과 서울에서 만날 약속을 하고 터미널에 고속버스를 타러 갔다.
미리 예약을 했는데 창구 직원이 ‘포인트’로 결제를 할 수 있다며 카드 취소하고 포인트 결제를 해줄까? 하고 물었다. 당연히 그렇게 해 달라고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직원의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어? 어떡하지?”
“네? 왜요?”
“자리가....... 날아갔는데요?”
“네?”
무슨 이유인지 내가 예약한 자리가 없어졌다. 다행히 다른 자리가 있어서 일단 버스를 탈 수는 있었지만, 문제는 내가 그 자리를 일부러 예약했다는 것이다. 당시에 두통과 멀미가 심해서 버스를 탈 일이 있으면 무조건 앞자리를 예매하곤 했는데 새로 배정받은 자리는 뒤쪽 복도 자리였다. 최악이었다. 나는 화가 나서 더없이 까칠하게 항의했고 직원은 정말 미안하다면서 고개를 숙였다. 잘해주려고 한 일인데 이렇게 되어버렸다며.
그런데, 사건의 진실은 이러했다.
내가 ‘당연히’ 예매한 줄 알았던 버스는 그 버스가 아니라 다음날 출발하는 버스였다. 서울을 제집 드나들 듯 드나들던 시절이니 버스 예약은 수없이 반복했던 짓인데도 그런 실수를 한 것이다. 창구 직원이 친절하게 ‘포인트’로 바꿔주겠다고 하고 카드 취소를 하지 않았으면 나는 ‘시간여행자’가 되어 망신을 당했을 상황이었다. 그런데 적반하장으로 버럭버럭 화를 냈으니...
얼굴이 달아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서울에서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서 그 직원을 찾았지만 교대시간이 지났는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다음에 서울 갈 일이 있을 때 편의점에서 커피를 하나 사 들고 가서 그 직원에게 사과를 했다.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내 실수였다고. 죄송하다고. 다행히 직원은 이해한다고 하며 사과를 받아주었다. 이건 매우 쪽팔리지만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한 쪽팔림을 경험한 이후로 나는 무언가 항의를 하기 전에 반드시 사실관계를 다시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론 그에 따르는 반작용으로 내 실수가 아님이 확실해졌을 때 상대의 반응에 따라 강력한 ‘ㅈㄹ’이 뒤따를 수 있다는 부작용이 있기도 한데 이건 나의 인성 문제일 것이다. 우아해지려고 노력 중이다.
‘그럴 리가 없다.’ 고 생각하는 믿음이 가끔 망신살을 불러오기도 하고, 당혹감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만들기도 한다. 모든 순간에 진심으로 집중하지 않아서 생긴 일일 것이다. 물론 모든 것에 집중하다가는 말라죽을 수도 있다. (비만인 입장에서 말라 버리는 건 좋은 일인가?) 하지만, 오롯이 집중하고 마음을 다하지 않은 것들을 두고 ‘그럴 리가 없다.’는 오만한 확신은 함부로 품는 것이 아님을 되새기고 있다.
어제, 집에서 뒹굴고 있었는데 작업실(이라고 쓰지만 그냥 원룸) 건물 주인어르신이 전화를 하셨다. 어딘가에 누수가 되고 있다는데 확인을 해봐야 할 것 같다고 비번을 알려줄 수 있냐고 물었다. 실은 그 전날 내가 있을 때 같은 용무로 전화를 하셨기에 여기저기 확인 해 봤지만 딱히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래서 새는 데가 없는 것 같다고 말했고 주인 어르신은 알겠다고 했었다. '그냥 그때 와서 확인했으면 좋았잖아?' 싶었지만 어쩔 수 없으니 비번을 알려 드렸다.
잠시 후 <변기 부속 교체 하고, 작업 완료했습니다.>라는 문자가 왔다.
변기 어딘가에서 물이 샜었나 보다. 미세한 균열은 더더욱 알아차리기 어려운 법이다. ‘그럴 리가 없어.’는 역시 신중해야 한다.
그러나 <그럴 줄 알았> 던 것은 어김없이 그렇게 되기도 한다. 화장실 어딘가를 고쳤다고 했으니 일대는 난장판이 되어 있으리라 짐작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욕실 바닥에 시커먼 무엇들이 우수수 떨어져 있다. 또한 나의 작업실은 방 안에 욕실이 있는 원룸구조라서 욕실 문을 열어놓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는데, 욕실문이 훤하게 열린 채로 하루를 났다. 방의 공기와 습습한 욕실의 공기가 뒤섞이는 것.... 진짜 싫은데.
당장! 캔들을 켰다.
지금, 욕실 청소하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