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oijak Sep 22. 2019

청첩장, 그리고 내 엄마의 사회생활

경상북도 깡촌, 가난한 집 막내딸이었던 엄마는 부모의 보살핌을 받기는 커녕 알아서 살아남기도 벅찼다고 한다. 그 시절 가난한 집안의 딸들이 흔히 그러하듯 아들이었던 외삼촌들이 그나마 학업을 이어가는 동안 엄마는 배움 대신 먹고 사는 길로 나서야 했다. 그런 사정 탓에 내 엄마는 속된말로 가방끈이 짧았다.


그리고 허우대 멀쩡한, 알고 보니 허우대만 심하게 멀쩡해서 평생 가난을 짊어지고 사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딸 둘을 낳았다. 여기까지 놓고 보면 뭐 그리 특별한 것 없는 이야기일 것이지만 둘째 딸이 태어난 순간 엄마의 인생은 엄청난 전환점을 맞아버렸다.


혹시나 아들일까 싶어 낳았던 늦둥이 둘째는 딸이었고, 중증 장애를 갖고 태어나게 된다.

노산을 이유로 수술을 요구하는 산모에게 끝까지 자연분만을 고집하던 의사가 산모가 기진맥진해서 더 이상 자연분만이 불가한 상황이 되자 뒤늦게야 마취의가 없음을 고백했고, 출산을 하다 말고 다른 병원으로 이송해 수술로 둘째를 낳았다. 엄마도 죽을 뻔 했고, 아이도 죽을 뻔 했다. 엄마는 둘째의 장애가 그 때문이라고, 자신이 무식했던 탓이라고 내내 자책했지만 나중에 내가 사적으로 알게 된 현직의사로부터 전해들은 말은 장애 여부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을 것이니 그 때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엄마의 짐이 가벼워질 리 없으니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나만 알고 있는 것으로 넘겼다.


엄마는 비가 오는 날에 둘째의 출생신고를 했다고 한다. 맑았던 하늘이 하필이면 자신이 출생신고를 마치고 나올 때를 맞춰서 앞이 안 보일만큼의 비를 쏟아 붓는 것이 마치 자신에게 내려지는 천벌인 것 같았다고 했다.  

30년 전, 장애에 대한 인식은 천벌과 같은 무게 였고 그 아이를 책임져야 한다는 삶의 무게감이 엄마에게는 천형이었다 해도 과장은 아니었다.


배움도 짧았고, 그저 가정주부로만 살았던 엄마의 사회생활은 둘째의 특수학교 시절과 맞물려 있다. 하루하루 아이는 커갔고 엄마는 자신의 아이가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시간과 그것을 온몸으로 부딪히는 과정이 필요했다.

취학통지서를 받고서도 미취학 사유서를 제출하면서 미련인 양 한 해를 미루고 나서야 엄마는 결국 딸을 일반학교에 보낼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특수학교에 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걷지 못하는 아이를 업어서 통학 버스에 태우고, 업어서 내리는 일을 초등과정 6년, 중 고등 과정 6년 도합 12년을 해냈다. 그러는 사이 바람에 날아갈듯 마르고 작았던 아이가 엄마보다 덩치가 커졌고, 그만큼 엄마는 쪼그라들었다.


아이를 태운 휠체어를 밀고 다니면서 그저 무심히 지나치면 될 것을 힐끔 쳐다보거나, 심한 경우에는 가던 길 되돌아보던 시선 앞에서 당당해 지는 법을 익히며 아이를 방안에만 가둬두지 않았다. 장애인에게 주어지는 각종 복지혜택을 찾아 챙기며 그것이 비굴한 부탁이 아니라 함께 하는 구성원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임을 새겨가는 시간을 겪었다. 그리고 같은 교집합을 가진 이들과 교류하고 소통했다. 그렇게 엄마는 누구보다 단단해졌다. 그것이 엄마의 첫 사회생활이었다.


그리고 둘째를 낳은 이후,  엄마를 향한 시선이 그저 '딱함'으로 흘러갔으며 그에 따라 수십년 엮여있던 인연들과 하나, 둘 관계가 소원해졌고 그 자리에는 새로운 친구들이 들어왔다. 김빠진 맥주잔을 앞에 두고 내 자식이 나보다 하루만 먼저 갔으면 좋겠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서로 덕담처럼 주고받는 그런 친구들이었다. 덧붙여 그 자식들의 형제, 자매인 멀쩡한(?) 자식들의 앞날 걱정은 덤이었다.

각자의 짠한 사정을 너나 없이 공감했던 아줌마들은 가족만큼이나 끈끈하기도, 별 것 아닌 일로 꽁해서 서로 모른 체 하기도 했었다. 그러다가도 한 구석 공감대를 핑계 삼아 슬그머니 다시 모여 맥주잔을 기울였다.




며칠 전, 엄마에게 문자 한통이 날아들었다.

엄마는 ‘이게 뭐냐?’ 고 물으며 전화기를 들고 내 방으로 들어왔는데, 때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내용을 대충 들어보니 엄마의 지인이 사위를 보는 모양이다. 시대의 흐름에 맟춰 모바일 청첩장을 문자를 보내놓고, 바로 전화를 해서 설명을 덧붙이는 중인듯 했다. 엄마의 입에서는 연신 축하라는 말이 끊이질 않는다. 특수학교 시절에 만난 엄마의 친구였다.


통화를 마친 엄마가 핸드폰을 들이밀며 이거 어떻게 보는 거냐고 물어온다. 문자의 링크를 클릭해 모바일 청첩장을 열어줬더니 신기하다며 들여다본다. 신랑 신부의 웨딩촬영 사진을 하나하나 넘겨보던 엄마 입에서 불쑥 엉뚱한 말이 튀어나온다.


“야, 신랑이 왜 이렇게 못생겼냐?”


남의 사위를 두고 뭔 망발이냐며 내가 민망해하자, 본인도 머쓱한 모양이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남의 웨딩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보다 며칠 전, 엄마의 사촌 동생이 며느리를 본다고 전화가 왔을 때는 불퉁하게 욕을 하더니, 이번에는 배시시 웃기까지 하는 걸 보니, 마음 안의 거리는 이쪽이 더 가까웠던 모양이다. 그리고 아마도 장애인 가족의 결혼, 그 중에서도 아들 보다는 딸의 결혼에 이런저런 장애물이 많았던 사연을 남보다 가까이서 많이 들었던 터라 괜히 확인되지도 않은 사연까지 상상을 보태가면서 뿌듯하고 짠하고 혼자 마음 속으로 오지랖 중일 것이었다.

무심히 사진을 보던 엄마가 핸드폰을 덮는다. 그리고 시선이 움직인다.

난데없는 타겟은 나다.


‘어어, 엄마.. 나를 돌아보지 마. 거, 눈에 힘 빼고!’


엄마, 이미 오래전에 엄마가 남긴 명언이 있잖수?


“그래, 그 못된 성질머리로 남의 집 귀한 아들 힘들게 하지 말고 너나 잘 살아라. 이 지지배야.”




나는 생모임을 의심케 하는 이 타골장인(打骨匠人)의 저 묵직한 한마디에 많은 말들이 생략되어 있음을, 내 엄마가 당신이 낳은 둘째 딸이 역시 당신이 낳은 큰 딸의 발목을 잡았다고 자책함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내 엄마의 큰 딸이었던 나는 엄마의 그러한 자책을 당연히 여기며, 유세떨며 억울해 했던 시절이 있었음을 부정하지 않겠다. 때로는 누구보다 독한 말로 엄마 속을 박박 긁어놓았던 것이 나였고, 그러면서도 누가 시키지 않은 무게감으로 제멋대로 무거워 하느라 마냥 흘려보낸 시간이 길었던 것도 나였다. 그러나 나는 이제 마음 안에서 담백하게 나와 내 동생을 분리하였으며, 누가 시키지 않은 의무감은 물론이요, 그를 핑계 삼아 내 삶을 비겁하게 이끌어갔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았다.  


이번 생, 몸이 불편한 동생이 가족안에 포함되어 이끌어 온 삶의 스토리에서 나는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훨씬 더 많다. 그간의 시간들은 나를 작가라는 길로 이끌어왔고, 무엇보다 그저 가방끈 짧은 아줌마로 멈췄을 내 엄마의 사회생활과 그를 통해 나는 감히 따라 갈 수 없을 만큼 깊은 내 엄마의 삶에 대한 깊이를 마음 안에 담을 수 있었다. 또한 이런 이야기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지면에 옮길 수 있을 만큼 내가 마음의 품을 넓힌 건 8할 이상이 엄마 덕이다.


날이 좋다. 날이 좋은 만큼 여기저기서 날아드는 청첩장이 내 엄마의 번지수 잃은 한자락 회한이 아니라 뒤늦게 시작한 사회생활의 귀찮음 정도이기를 바란다.


몇 해 전 이른 봄날, 벌써 개나리가 폈다면서 엄마가 가지를 꺾어다 내 책상위에 슬그머니 올려 두었었다.





아, 사족으로 당신의 큰 딸은 이미 오래 전에 대학 동기모임에서 모두에게 공평하게 돌아가는 축의금의 형평성을 주장하며 어느 생일날에 ‘독신축하금’을 받은 골 때리게 야무진 인간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REACTION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