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맛 나는 옷

설치예술가 V, 40세

by Eugene

대중매체로 대리만족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다이어터는 먹방을 보며 식욕을 충족시키고, 여행 갈 시간이 없는 사람은 여행프로그램을 보면서 대신 쉼을 얻기도 한다. 최근 대한민국의 인기 있는 예능 프로그램을 분류해보자면 크게 먹방, 여행(에서 쉼)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슬프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이유는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고,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어서. 물론 돈과 시간 모두 많이 가진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그것들을 쓰는 방식과는 많이 다른 사람들일 것으로 예측한다.


굳이 분류하자면 난 전자에 속한다. 프리랜서인 나는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들보다 시간을 소비하는 데 있어서 더 자유롭다. 대신,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은 없다. 길면 1년, 짧게는 4개월이라는 시간을 계약하고, 그 기간만 월급쟁이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 그리하여 몇 개월간은 일의 공백이 생기기도 하는, 그야말로 언제 월급이 끊길지 모르는 불안 불안한 통장의 주인공이다.


돈은 넉넉지 않지만, 시간은 충만하다. 돈 없이 시간을 쓰는 것이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제 이 생활도 익숙해져 큰돈 들이지 않고 원하는 대로 시간을 쓰는 방법을 조금은 터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방법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을 소개해준 친구가 있다.


매년 여름과 겨울의 한 달 정도를 미국이나 캐나다 국립공원에 백패킹을 가는 스케일이 남다른 친구가 그 주인공이다. 경상도 토박이인 언니를 나는 ‘캡틴’ 혹은 ‘매나 언니’라고 부르는데, 언니가 ‘매나’라는 말(‘마찬가지로’, ‘물론’의 뜻을 가진 경상도 사투리)을 자주 써서 붙여준 별명이다.


‘캡틴’이라는 별명을 지어 준 계기는 좀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캠핑을 즐기고 싶었던 매나 언니는 함께 갈 사람이 필요했는데, 새로운 시작에 능한 나를 꼬셨다. 너무나도 쉽게 꼬임에 넘어간 나는 몇 년 전부터 할부로 캠핑 장비들을 사 모으며, 그녀와 대한민국 곳곳을 함께 다녔다. 국립공원 캠핑장, 사설 캠핑장, 야영장, 노지 할 것 없이 사계절 내내, 틈만 나면 떠났다. 돈은 풍족지 않아도 시간은 풍족했으니.


캠핑은 장비만 있으면 크게 돈 들어갈 일이 없다. 캠핑장 사이트 사용료 정도만 내면 되는데, 그게 호텔이나 펜션에 비하면 거의 공짜에 가깝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연과 가까이 호흡하며,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와 함께 멍을 때리고, 별과 달을 보며 나누는 이야기, 음식과 술이 기가 막힌다. 어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힐링이다. 이 좋은 것을 혼자만 할 수 없어, 내 주변 친구 중, 캠핑을 좋아할 것 같은 이들의 리스트를 추렸고, 그 중 발탁(?)된 멤버는 이러하다. 경남, 경북, 경기도 성남, 안양에 거주하는 예술가와 디자이너, 도예가로, 모두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 명 빼고는 모두 싱글이다. 거리상 북부 팀과 남부 팀으로 나뉘어 캠핑하러 다니다가 1년에 한두 번 정도는 모두가 합체하는 순간이 온다. 그렇게 합체된 우리 구성원을 ‘캠핑클럽’이라 명명하였고, 이 그룹의 ‘캡틴’이 바로 매나 언니다.


나이가 많아서도, 멤버를 모아서도 아닌, 캠핑 경력이 범세계적이기 때문에 모두가 찬성한 우리의 ‘캡틴’.


캡틴과 함께 참 많은 곳을 다녔다. 중간에 있는 매점만 믿고 한라산 등반에 스낵만 가지고 갔다가 코로나 때문에 닫힌 것을 보고 멘붕이 오며 작은 스낵을 1/5로 나누어 먹던 기억, (지나가던 분이 남은 김밥을 우리에게 버려주셔서 심폐소생당함) 한겨울 강원도 노지 캠핑에서 쉘터를 치던 와중 혹독한 바람에 뺨 맞다가 욕을 한 바가지 했던 기억 등등.


그렇게 매나 언니이자 캠핑클럽의 캡틴에게 캠핑의 맛을 배웠고, 아직도 천천히 더 알아가는 중이다.


캠핑에는 3대 기쁨이 있다. 자연에서 먹는 음식, 불멍(불을 보며 멍때리기), 속세의 감사함 느끼기(대표적인 예로 한여름의 에어컨 바람, 한겨울의 따듯한 샤워기 물줄기)이다. 더불어 캠핑의 3대 귀찮음은, 다녀와서 해야 하는 각종 뒷정리: 코펠 및 식기구 설거지, 빨래, 각종 장비들의 흙, 먼지 제거이다.


그중에서도 캠핑 후의 빨래는 그 어떤 것보다 더 번거롭다. 자연으로부터 가져온 흙과 먼지, 불의 그을음 등은 세제의 기능성을 확인하기에 충분하지만, 불 냄새는 당최 한 번을 빨아서는 없어지지 않는다. (특히 불을 쬔 시간이 많은 겨울 캠핑 후에는 집에 옷을 널어놨다가 불이 난 줄 알았던 적도 있다) 처음에는 그 냄새가 거슬렸지만, 이제는 다음 캠핑에서 이전 캠핑의 불 냄새를 지닌 옷을 입으면 정겹다. (이젠 불 냄새가 없으면 좀 서운하기도 하고)


불맛나는 음식이 독특한 맛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불 냄새 나는 옷을 입으면 자연을 머금고 다니는 것 같아서 그 냄새를 맡는 동안만큼은 잠시 캠핑의 기쁨을 상상하게 된다. (물론 타의적으로 그 냄새를 맡는 사람들은 괴로울 수도 있겠지만)


강렬한 후각적 자극은 그 어떤 시각적인 이미지보다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더 세다. 가령, 전 남자친구, 여자친구가 쓰던 향수, 샴푸 향처럼. 이런 노래도 있지 않은가.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네 샴푸 향이 느껴진 거야~”* 빨래 건조대에서 흔들리는 나의 옷들 속에서 캠핑의 소중한 기억들이 방울방울 떠오른다. 두 번 이상 빨면 사라질지도 모르므로, 캠핑 후의 빨래는 한 번만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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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JTBC에서 방영된 드라마 『멜로가 체질』 OST 중,

장범준의 노래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 향이 느껴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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