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원래 소리 내어 읽었다고 한다. 알베르토 망구엘은 그의 저서 <독서의 역사>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말없이 책장을 정독하는 독서 방법은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에는 정상에서 일탈한 것이었다는 점, 그리고 통상적인 독서는 큰 소리로 떠들썩하게 이뤄졌다는 점이다. <중략> 서구에서는 10세기까지 묵독이 보편화되지 않았다."
왜 이렇게 소리 내어 책을 읽었을까? 망구엘은 "글자로 쓰인 텍스트는 지금 눈앞에 없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할 말을 언젠가는 발음할 수 있도록 종이에 쓴 대화였다."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책에 적힌 텍스트는 누군가 하고 싶은 말을 글로 남긴 것이고 그러니까 읽을 때도 대화할 때처럼 소리를 내어 읽어야 그 의미가 온전히 전해진다는 의미다.
소리 내어 읽어야 의미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책장에 쓰인 단어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죽어 있는 데 반해 큰 소리로 외쳐지는 단어는 날개까지 달고 훨훨 날아갈 수 있다. <중략> 글로 쓰인 텍스트를 대할 때면 독서가들은 언제나 침묵하고 있는 문자들, 즉 스크립타에게 말로 표현된 단어, 즉 베르바가 될 수 있도록 목소리를, 다시 말해 혼을 불어넣어야 하는 의무감을 느꼈다. <중략> 신의 영감을 받아 쓰인 성스러운 텍스트를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눈뿐만 아니라 신체 다른 부분의 활용까지 필요하다. 경전을 읽으며 약간의 신성함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면 문장의 가락에 맞춰 몸을 흔들고, 성스런 단어들은 입을 크게 벌려 소리 내어 읽어야 하는 것이다."(망구엘, <독서의 역사>)
온몸으로 읽어야 텍스트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실제 묵독으로 읽을 때와 소리 내어 읽을 때의 이해도에는 차이가 있다. 눈과 머리로만 책을 읽으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페이지만 넘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한 글자씩 정확히 일정한 속도에 맞춰 글을 읽으면 글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읽는 소리가 귀로 들려 눈으로만 읽는 것에 비해 더 많은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다. 초중고 시절 국어 선생님은 항상 학생 한 명을 일으켜세워 책을 읽게 했다. 아마도 소리 내어 책 읽기의 효과를 알았던 모양이다.
소리 내어 책 읽는 건 읽는 사람만 좋은 게 아니다. 책이 귀했던 시절엔 누군가의 책 읽는 소리로 배울 수 있었다. 그래서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은다는 속담이 나왔는지도 모른다. 이 속담의 의미는 아무리 무식한 사람도 유식한 사람 옆에 있으면 자연히 견문이 넓어진다는 의미다(무슨 일을 하든 오랫동안 반복해서 보고 들으면 자연히 할 줄 알게 된다는 뜻도 있다). 서당개가 이렇게 배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서당에서 책 읽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책 읽는 소리는 누군가에게는 배움의 통로인 셈이다.
소리 내어 책 읽는 전통은 10세기까지 보편적이었고 비교적 최근인 18세기까지 이어졌다. 찰스 디킨스의 유료 낭독회는 유명하다. 찰스 디킨스는 471번의 유료 낭독회를 가졌었는데 낭독회 수입이 글 수입보다 많았다. 서양에서는 개인 살롱에서 책 낭독회를 자주 열었다. 영미, 프랑스, 러시아 고전 문학 작품에 낭독회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영화 <아가씨>에서도 낭독회 장면이 나온다. 1920년 '폐허' 동인들은 시 낭독회를 열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문학 낭독회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소리 내어 책 읽기는 지금 시점에서 생각하면 끔찍한 일이다. 도서관에서 소리 내어 책을 읽거나 전화소리에도 민감한 사무실에서 책 읽는 소리를 낸다고 상상해 봐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느 정도 떠드는 게 보장된 지하철에서도 옆자리에 있는 사람이 조금만 떠들어도 나는 한번 째려본다. 조용히 하라는 신호다. 그래도 계속해서 떠들면 나는 나의 의도를 알아챌 정도로 툴툴거리면서 자리를 옮긴다.
굳이 책을 소리 내어 읽을 이유도 공간도, 여유도 없어진 시대다. 기사를 출고할 때 가끔 소리 내어 글을 읽어보곤 한다(초년 시절에는 인쇄해서 읽어보기도 했다). 그렇게 읽다 보면 그냥 글을 쓸 때에는 보이지 않은 것들이 보인다. 읽어서 이해가 되지 않거나 어색한 부분은 다시 쓴다. 그리고 글의 리듬감, 다시 말해 뚝뚝 끊어지는 부분이 있으면 잇고, 축축 늘어지는 부분이 있으면 끊는다. 하지만 이건 남들에게 들리지 않게 혼자 입 속으로 읽는 방법이라 소리 내어 읽는다고 말할 순 없다.
지금은 책도 혼자 읽지만, 음악도 혼자 듣고 영화도 혼자 본다. 혼자 보고 듣고 읽고 혼자 느끼고 즐기는 초개인화 시대다. 아이러니하게 이렇게 초개인화시대가 되니, 사람들은 함께 책을 읽자며 독서모임을 만들고 함께 영화 보고 토론하자 하고 함께 음악을 감상하자는 모임을 만든다. 초개인화가 다시 연결을 원하는 아이러니를 만들고 있다.
낭독이 온몸으로 책을 읽는 거라면, 묵독은 머리와 눈으로 책을 읽는 것이다. 낭독이 공동 독서라면 묵독은 개인 독서다. 음악으로 치면 합주와 독주의 차이일 것 같다. 독주도 좋지만 합주의 즐거움에 비할 바가 아니다. 기왕 함께 하는 거라면 따로 읽고 와서 토론만 하지 말고 아예 모여 같이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떨까? 그런 낭독회를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