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만과 슈트라우스의 '헌정'
아침 출근길. 하루 중에 클래식을 듣기 가장 좋은 시간이다. KBS 1FM에서 20년 전 남편이 결혼 프러포즈를 하면서 불러줬던 음악을 사연과 함께 신청했다. 남편이 슈만의 Widmun(헌정)을 불러줬던 순간이 그녀 인생의 최고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슈만의 헌정이 흘러나오자 숨죽여 들었다. 지옥 같은 출근길의 혼잡이 평화롭게 느껴졌다.
사랑을 표현하는 말이 많다. 좋아한다, 아낀다. 소중하다. 마음에 든다, 그립다, 보고 싶다, 그리고 애정, 연정, 존경도 있다. 사랑이나 사랑을 표현하는 말은 그대로 쓰는 법이 없다. 대체로 부사나 형용사를 붙여서 사랑의 강도를 나타내곤 한다. 예를 들어 '많이 사랑해'라든가, '하늘만큼 사랑해'라든가.
'많이 사랑해'나 '하늘만큼 사랑해'보다 더 사랑할 경우에는 어떻게 표현할까? 부사를 두 번 세 번 쓰거나, '하늘만큼' 뒤에 '땅만큼'을 더 붙이기도 한다. 이것으로도 사랑의 강도를 표현할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할까? 내가 생각할 때 최고 수준의 사랑을 표현하는 말이 '헌정(獻呈)'이 아닐까 싶다.
헌정은 바치다, 올리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헌정하다는 올려 바치다는 의미다. 사랑한다라고 했을 때는 수평적인 관계를 나타낸다. 하지만 헌정은 자신의 사랑이 극진하고 소중하니 이를 올려서 바칠 것이니 그 소중한 사랑을 잘 받아달라는 의미다. 그러니 사랑의 최고의 표현이 헌정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헌정은 독일어로는 'Widmung'와 'Zueignung'이 있다. Widmung은 더 일반적이고 광범위한 의미의 헌정을 나타낸다. 책, 음악, 예술 작품 등을 특정한 사람에게 바치는 행위도 포함된다. 감사나 존경, 사랑의 표현으로 사용된다. Zueignung은 좀 더 형식적이고 문학적인 맥락에서 사용된다. 특히 문학 작품이나 시집의 서두에 나오는 헌정시나 헌정문에 자주 사용되며, 작품 전체를 특정인에게 바치는 보다 장중하고 의례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간단히 말해, Widmung은 개인적이고 친밀한 헌정, Zueignung은 문학적이고 격식 있는 헌정의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제목 그대로 슈만의 "Widmung"는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헌정에 가깝다면 슈트라우스의 "Zueignung"는 문학적이고 격식이 있는 헌정에 가깝다.
슈만과 클라라의 사랑 이야기는 너무 유명하다. 문학에 로미오와 줄리엣이 있다면 음악엔 슈만과 클라라가 있다. 음악동호회 이름이나 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카페 이름으로 '슈만과클라라'가 많다. 그만큼 유명하다. 왜 이들의 사랑이 그렇게나 유명할까? 사람들이 열광하는 스토리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사랑했고 반대가 있었고 그리고 사랑했고, 하지만 그 이후에 새로운 인물(브람스)이 등장하게 되고 등등...
슈만은 클라라를 사랑했지만 슈만의 스승이자 클라라의 아버지인 비크의 반대가 있었다. 비크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에 성공하자 슈만은 클라라 비크와의 결혼을 앞두고 그녀에게 결혼 선물로 가곡집 "Myrthen"(미르텐, 결혼식에서 신부가 쓰는 화관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상록수 관목인 도금량(myrtle)에서 따온 것)를 만들어 결혼식 전날 클라라에게 선물했다. 헌정은 미르텐에 첫 번째 수록곡이다.(Op. 25-1)
Widmung은 프리드리히 뤼케르트(Friedrich Rückert)의 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첫 구절과 마지막 구절을 반복하여 A-B-A 구조로 만들었다. 내림라장조(A-flat major)로 시작해 마장조(E major)로 전조된다.
가사
당신은 나의 영혼, 나의 마음
나의 기쁨이자, 오 나의 아픔
내가 살아가는 나의 세상
내가 떠오르는 나의 천국
오 나의 무덤이여, 그 깊은 곳에
나는 영원히 내 슬픔을 묻었네!
당신은 나의 안식, 나의 평화
하늘이 내게 정해준 운명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
그것이 나를 가치 있게 만들고
당신의 눈빛이 내 앞에서 나를 변화시켰네
당신은 사랑으로 나를 나보다 높이 끌어올리네
나의 선한 영혼이여, 나의 더 나은 자아여!
얼마나 사랑하는 사람이길래 이렇게까지 표현하는 걸까 싶다. 나의 영혼, 마음, 기쁨, 아픔, 세상, 천국, 무덤, 안식, 평화,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이제껏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또 다른 나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그 나(자아)가 나보다 더 낫다고 말한다. 나보다 나은 나라는 건 사랑의 극한에 이르렀을 때 나오는 표현이다. 나와 동일시하면서도 그를 하나의 인격체로 승화했고 그 인격체가 나보다 훌륭하다고 얘기하고 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Zueignung"(Op. 10, No. 1)는 헤르만 폰 길름(Hermann von Gilm)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다. 헤르만 폰 길름이 훗날 약혼녀를 위해 쓴 시 '마지막 잎새'를 발췌한 것으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깊은 감사를 표현하는 내용이다. 화자가 과거의 방탕한 삶에서 벗어나 사랑을 통해 정화되었음을 노래한 것으로 원래 시 제목은 '감사합니다(Habe Dank)'이다. 슈트라우스는 이 시에 노래를 붙여 뮌헨 궁정 오페라의 수석 테너인 하인리히 포글(Heinrich Vogl)에게 헌정했다.(다른 자료에 의하면 그의 아내에게 헌정했다는 내용도 있다. 어쩜 실제로는 아내에게 헌정하고 나서 겉으로는 사회생활을 위해 하인리히 포글에게 헌정했다고 말했을 수도 있다)
4/4박자의 다장조(C major)곡이다. 가사 내용 때문에 결혼식이나 특별한 이벤트가 있는 곳에서 자주 연주되는 곡이다.
가사
그래, 당신은 알고 있어요, 소중한 영혼이여,
내가 당신에게서 멀리 떨어져 괴로워한다는 것을,
사랑은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감사합니다.
한때 나는 자유의 술꾼으로서,
높이 자수정 잔을 들었고,
당신이 그 술을 축복해 주었지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안의 악한 것들을 물리쳐주어,
마침내 나는 전에 결코 그런 적이 없던
거룩하게, 거룩하게 당신 가슴에 안겼어요,
감사합니다.
슈트라우스의 헌정은 사랑으로 아프지만 당신을 만나서 감사하고 술에 빠져 있는 나를 구원해 줘서 감사하고, 악으로부터 구원받아 감사하다는 내용이다. 시의 제목이 감사하오인데, 감사하다는 표현 역시 사랑의 최고의 순간을 표현하는 말이다.
슈트라우스의 헌정을 들으면 다음과 같은 장면이 상상된다. 너무나 서로를 사랑하는 어느 노부부가 살고 있다. 남편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이다. 그때 남편이 죽기 직전에 아내에게 한 마디를 한다. 무슨 말을 했을까? 감사하다는 말이 가장 적절할 듯하다. 감사하다는 말은 그동안 한평생 자신과 함께 해주고, 사람으로서 살게 해 줘서 감사하다는 의미다. 사랑한다는 말 보다 훨씬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슈만의 헌정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직접적인 칭송이고 내 마음을 고백하는 노래라면, 슈트라우스의 헌정은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해 내가 얼마나 성장하고 살아왔는지를 표현한 노래다. 개인적으로 궁극적인 사랑의 모습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성숙해지고 발전하고 올곧은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랑하는 사람에게 노래로 고백한다고 한다면, 이 두 곡의 노래 중에 어떤 곡을 선택하는 게 좋을까?
사랑의 형태, 사랑의 모습에 따라 달라질 것 같다. 수차례 위기를 겪고 어렵게 얻은 사랑에 대해 직접적으로 나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싶으면 슈만의 헌정이 더 어울릴 것이고, 나의 성장에 도움을 주고 내 곁을 오랫동안 지켜준 사랑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을 담고 싶다면 슈트라우스의 헌정이 더 좋을 것 같다. 이건 순전히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니 눈을 감고 두 곡을 들어 먼저 떠오르는 곡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들려주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