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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단 Nathan 조형권 Jul 28. 2020

마음을 크게 갖는다는 것

우리의 그릇의 크기는 어느 정도인가? 

  子曰. 君子不器

 “군자는 마땅히 큰 그릇이어야 한다.” - 《논어》위정 중에서

 

 사람은 각자의 그릇을 갖고 있다. 어떤 사람은 고작 소주 한 잔 정도의 크기이고, 또 어떤 사람은 큰 사발이다. 사실 그릇의 크기를 뛰어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경우다. 물론 쉽지는 않다. 내가 알고 있고(지식), 갖고 있는 것(부)에 대한 자긍심이 있고, 내가 겪은 것(경험)을 우선시한다. 남이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나와 같아지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의 주장을 강력하게 펼쳐서 논쟁에서 이기려고 한다. 


 바람직한 사회에서는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의견을 좁히거나 타협하기 위해서 활발히 토론하는 문화가 있다. 반면 경직된 문화의 사회에서는 다른 의견이 좀처럼 용납되지 않는다. 누군가 지시를 내리면 그것을 따르기에 바쁘다. 상대방이 이야기하는 것을 잘 경청하고 기록하는 행위는 필요하다. 하지만 아무런 비판 의식 없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란 없다. 완벽하게 보이는 사람도 잘 모르거나 잘못 생각하는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배우는 것’이다. 


 심지어 카리스마 리더십의 대명사로 불리는 스티브 잡스도 싸움닭이었지만 그는 자신만의 의견을 갖고 있는 사람을 중요시했다. 그는 비록 고집이 셌지만 디자인 전문가 조너던 아이브, 공급망의 대가 팀 쿡(현재 애플의 CEO)의 의견을 듣고 이를 반영했다. 잡스도 틀릴 때가 있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부분도 많았지만 사람들은 그의 그릇이 작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만큼 잡스도 다른 집단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포용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고 배우는 자세가 필요하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위에서 아래도 탑다운(Top down)의 지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잘 생각하고(What), 왜 이것을 해야 하는지(Why) 생각해야 한다. 무조건 어떻게(How)할지만 고민해서는 안 된다. 윗사람이 의견을 제시하더라도 더 좋은 해결책(Solution)이 있다면 의견을 말해야 한다. 물론 조직 문화에 따라서 다르다. 어떤 조직에서는 이러한 자유로운 토의를 인정하는 반면, 또 어떤 곳에서는 자유로운 의견이 ‘항명’으로 받아들여진다. 


 중국의 철학자 노자가 ‘물’을 강조한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다. 그가 말한 바와 같이 “최상의 선善은 물이다.” 물은 흘러야 한다. 물이 흐르지 않고 고이면 썩게 마련이다. 그러려면 ‘그릇’이 커야 한다. 그릇이 작으면 물은 금방 고이게 된다. 의견도 마찬가지다. 자유롭게 흘러야 더 큰 흐름을 만들고, 새로운 흐름을 이루기도 하다. 그것이 창의성으로 연결된다. 


 그릇이 크다는 것은 잘못을 용서하는 포용과 상황에 따라서 유연하게 대처하는 융통성을 말한다. 어떤 사람은 조그마한 것에 연연해서 쉽게 화를 내고 마음에 앙금을 갖는다. 어떤 식으로든 복수를 하려고 하고,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반면 그릇이 큰 사람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물론 마음속으로 질투나 미움의 마음이 들 수도 있다.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하다. 우리가 ‘신’이 아닌 이상 늘 안 좋은 생각이 우리 곁에 있고, 우리의 그릇을 작게 만든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용납하고 용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이야기하고 고치도록 해야 한다. ‘조언’을 했다고 그 사람의 속이 좁은 것이 아니다. 가족 간에도 이러한 훈계나 조언이 있게 마련이다. 그것은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릇의 크기와는 상관없다. 하지만 표현하는 방식에는 신경을 써야 한다. “네가 잘못했어. 그렇게 하면 안 돼.”라는 단정적인 표현보다는 대화를 통해서 스스로 깨닫도록 도와줘야 한다.


 돈을 잘 쓰고, 호탕하게 보인다고 그릇이 큰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이다. 조용히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면서 넓은 아량과 포용력을 보이는 사람이 진정으로 그릇이 큰 사람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의 그릇은 커야 할까? 그냥 지금 있는 그대로 살면 안 될까? 


 그릇이 큰 것은 역설적으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진정한 행복은 ‘베풂’에서 나온다. 남을 돕고 위하는 행위를 할 때 우리의 행복감은 그 어느 때보다 크다. 이는 수많은 과학적인 연구결과를 통해서 입증되었다. 당장 나의 것만 챙기는 사람은 좁은 그릇에 갇혀 살게 된다. 상대방을 의심하고 미워한다. 그것은 나를 불행하게 만든다. 이 세상이 나를 배신했고, 나를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 무엇이 벌어지든지 간에 우선 상대방, 또는 세상을 원망한다. 또한 과거의 굴레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늘 억울한 마음이 들고, 나의 운명이 이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한탄한다. 하지만 과거는 우리의 운명이 아니다. 소설가 존 바스는 “과거는 우리의 운명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이야기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이렇듯 ‘물’처럼 우리의 운명은 흐르고 어디로 향할지 정해져 있지 않다. 우리의 그릇도 마찬가지다. 지금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해도 생각의 틀을 바꾸고, 노력하면 나의 그릇도 변한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이미 충분히 베풀고 있고 사회적으로도 인정을 받기 때문에 마음을 놓아서도 안 된다. 늘 생각하고 자신을 반성해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공자의 제가 증자가 하루에 세 번 자신을 반성하면서 처음으로 말한 내용이 “남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느냐”이다. 남을 위해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삶에 충실해야 한다. 


 그릇의 크기에는 한계가 없다. 이해하고, 포용하고, 용서하고, 베푸는 마음을 갖는다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조그만 구멍을 통해서 바라본 하늘은 조그맣게 보일 수밖에 없다. 나 자신이 작음을 인정하고 배움의 자세를 잊어서는 안 된다. 나이가 많고, 지위가 높고, 돈이 많다고 나의 그릇이 커지는 것이 아니다. 어린 나이에도 큰 그릇의 사람이 있고, 유명한 사람도 옹졸한 그릇인 경우도 많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공자가 “그릇이 아니다”(不器 불기)라는 말처럼 그릇의 한계를 벗어나게 된다. 그것을 “깨달음”, “통찰”이라고 부른다. 


 모든 것에는 존재의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내가 이 세상에 나온 이유를 찾아야 한다. 100년의 인생을 산다고 해도 수십 억 년 우주의 역사에 비하면 보잘것없다. 이유를 탐구하고, 내가 세상에 온 흔적을 남겨야 한다. 물질적인 또는 정신적인 유산이 될 수 있다. 늘 책을 가까이하고 경청해야 한다. 그릇의 크기를 벗어나서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결국 나를 구제하는 길이다.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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