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맥주 마니아다. 맥주를 너무 좋아한다. 특히 생맥주만 보면 사족을 못 쓸 정도다. 거리를 걷다가 생맥주 판매, 또는 생맥주의 네온사인 형상이 있으면 눈이 번쩍 뜨인다. 심지어 집에서 생맥주를 만들어 마시면 어떨까라는 생각도 했다. 와이프에게 조심스럽게 생맥주 머신(원료를 구독하는 방식)에 대해서 말을 꺼냈다가 바로 '철퇴'를 맞았다.
고단한 집안 일을 끝내고 나면, 생맥주 생각이 더 간절해진다. 저녁을 차리고, 설거지를 끝낸 후 맥주 한 잔은 그야말로 꿀맛이다. 다사다난한 하루에 대한 나름의 보상이다.
왜 내가 맥주에 미치게 되었는지,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반주로 맥주를 드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나도 맥주에 대한 호감(?)을 갖게 되었다. 맥주는 소주보다 약하니, 편하게 마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주인공이 집에 도착해서 맥주 한 캔, 한 병을 자연스럽게 마시는 것도 왠지 멋있어 보였다. (요새는 별로 없지만) 수많은 맥주 광고는 또 어떤가?
하지만 어머니와 나의 큰 차이점이 있었다. 어머니는 반주로 한 병 마시는 것이 전부였다. 기분 좋으실 때는 두 병도 정도 드시지만, 거기까지다. 그리고 거의 매일 운동을 하신다. 운동을 하시는 목적이 건강도 있지만, 운동 후 시원한 맥주를 즐기기 위함이다.
그런데, 나는 절제가 잘 안 됐다. 나름대로 핑곗거리는 있다. 원래 완벽주의이기 때문에 무언가 시작을 하면 끝을 봐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였다. 그래서 캔 맥주를 마시기 시작하면, 재고를 없애야 했다. 회사에서 ‘재고는 죄악’이라는 것이 뇌리에 박혔기 때문일까? 어쨌든 완벽주의, 재고는 죄악이라는 핑계로 캔 맥주가 냉장고를 채우면, 이를 비우기에 바빴다.
도저히 절제가 안 되어서, 캔 맥주를 살 때는 두 캔, 또는 세 캔 정도만 구입했다. 그러면 나름대로 컨트롤이 되었다. 약간 아쉬운 기분을 남기고 끝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종종 몇 캔씩 사 먹는 것은 굉장히 경제적이지 않다. 만 원에 네 캔의 맥주를 구입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와이프는 가끔씩 대량으로 캔 맥주를 구입했다. 할인 마트에 장 보러 가는 와이프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맥주는 사지 마.”
그런데 문제는 모기소리처럼 들리지 않게 이야기했다는 점이다. 나의 외적, 내적인 갈등이 격화되는 순간이다. 좀 더 크고 강하게 주장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를 못했다. 그러다가 마트에서 와이프의 전화가 온다.
“제 X이 좋아? 한 X, 테 X이 좋아?”
“당연히 제 X이 좋지.”
기쁨과 희열을 느끼면서 대답을 한다. 아내가 무거운 장바구니를 카트에 담아오면, 열심히 짐을 나른다. 그러면서 ‘나의 소중한 그것’이 있는지 곁눈질한다. 그것을 발견한 순간 바로 냉장고에 조심스럽게 넣는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다. 아이들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
“야, 맥주 따라봐.” “캬, 맥주 맛 좋다.” “술은 역시 테 X 지”
우유를 따르면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도 조기교육으로 맥주에 대한 호감을 품었다면,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왠지 악연의 고리를 끊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금주에 돌입했다.
이미 각종 맥주에 대한 순위는 20위까지 매겼을 정도로 충분히 맥주를 마셨기 때문에, 더 이상 새로운 맥주에 대한 궁금증은 없다. 단지 문제는 갈수록 더워지는 날씨다.
“더위 = 갈증 = 시원한 맥주”
이것은 공식과 다름없다. ‘파블로프 법칙’이다. 종이 울리면 강아지의 입에 침이 고이는 것처럼 나도 마찬가지다. 더위가 찾아오면, 차가운 맥주, 생맥주가 눈에서 아른거린다. 그 톡 쏘는 맛과 목을 타고 넘어가는 청량감은 잊을 수 없다. 이미 나의 세포에 깊숙이 새겨진 느낌이다.
하지만 우유로 ‘술타령’을 하는 아이들을 보니, 도무지 그럴 엄두가 나지 않는다. 감성과 이성 간의 전쟁이다. 나름대로 타협안은, 아이들이 없을 때만 술을 마시는 것이다.
일단 최악의 경우(Worst Scenario)에 대한 시나리오를 생각하고, 일단 술 대신 물과 우유, 가끔씩 음료수를 마신다.
얼마 전에 아이들이 꿋꿋하게 공부를 잘해서, 상으로 ‘밀키스’ 두 캔을 사줬다. 각각 800원짜리였다. 그런데 나도 (술을 안 마신 대가로) 상을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밀키스 한 캔을 추가로 구입했다.
집에 돌아와서 밀키스를 맛있게 마시는 작은 아이가 갑자기 물어본다.
“어, 아빠, 맥주는 안 샀네?”
“응, 이제 당분간 금주야.”
마치 성숙한 어른의 모습으로 아이에게 멋진 답을 날렸다. 물론 속으로는 조금 후회했다. 마지막으로 도망갈 퇴로를 그냥 차단한 건 아닐까? 온갖 상념이 약 0.1초간 머릿속을 스쳤다.
그래도 이미 루비콘의 강을 건넜다.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처럼 멋진 장군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술 대신 물과 우유를 마시는 아빠로 보이고 싶다.
그런데...
얼마 전 슈퍼마켓을 가니 신상 맥주가 나왔다. ‘골 x ’이라는 맥주다. 일단 습관처럼 사진을 찍어두었다. 그리고 혼자 중얼거렸다.
“언젠가는 마시고 말 거야~” (치토스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