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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단 Nathan 조형권 Jun 24. 2021

고백

 “고백 :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이나 감추어 둔 것을 사실대로 숨김없이 말함.” 


 살면서 가장 힘든 것이 바로 ‘용서’와 ‘고백’이다. 내가 용서를 구하거나, 용서를 해야 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로부터 잘못을 고백받거나, 또는 내가 고백을 하는 것도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정말로 잘못을 하고,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을 많이 본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 아주 극히 일부분의 사람만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용서를 구한다. 이런 사람들은 그야말로 용기가 있고, 정의로운 사람이다.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려 오던 이 공수부대원이 41년 만에, 자신이 총으로 쐈던 시민의 유가족을 만나러 다시 광주에 가 속죄의 눈물을 쏟았습니다. 계엄군 개인이 양심선언을 한 건 처음입니다.” - <공수대원 눈물의 사죄... 안아준 5·18 유족들> , MBC 뉴스 중에서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백’을 하지 않는다. 무덤까지 자신의 잘못을 덮고 간다. 그것이 자신의 가족들을 위한 것이나, 또는 자신의 명예를 위한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고백의 ‘크기’는 따로 가늠할 수 없지만, 이렇게 역사적으로 중대한 사건의 주모자나 관련자의 고백과 같이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고백이 있다. 반면, 가족이나 친구, 동료 간에 아주 사소한 일로 생긴 갈등에 대해서, 고백을 해야 되는 경우도 있다. 무엇이 되었든 간에 고백을 위해서는 막중한 용기가 동반되어야 한다.


 이쯤에서 나의 이야기를 해야 될 것 같다. 


 나도 인생의 중반을 살면서, 과거를 돌아보면 정말로 잘못한 일들이 수없이 많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제대로 고백을 못하고, 마음속으로 참회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백을 했을 때, 좋아지는 것, 즉 나의 마음이 후련해지는 것을 빼고는, 오히려 사태를 더 악화시킬 수 있는 것도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내가 고백한 내용이 지금 나의 주변의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면 어떻겠는가? 나의 잘못이 굳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닌데, 나의 마음이 편하기 위해서 고백을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상대방에게 나의 ‘짐’을 넘겨준 것밖에 안 된다. 

 하지만, 정말로 이 말을 안 했을 때, 주위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라면 용기를 갖고 이야기해야 한다. 그것이 아주 사소한 일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오늘, 둘째 아이가 주변에 ‘학폭’을 당한 친구가 있다고 고백했다. 처음에는 당한 친구를 위해서 말을 아끼려고 했으나, 거듭된 성화에 마침내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 친구뿐만 아니라, 자신도 학폭을 당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학폭을 가한 친구는 상당히 머리가 스마트한 지, 가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피해자인 것처럼 가장해서 선생님에게 먼저 일러바쳤다. 


 하지만 가해자 친구는 이미 여러 명의 힘 약하고, 마음 착한 친구들을 언어적으로 신체적으로 괴롭히고 있었다. 그렇다고 부모의 관여를 원치 않아서, 둘째 아이는 선생님에게 사실을 이야기하겠다고 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아이의 고백에서 용기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물론 상황이 악화된다면, 다시 부모와 상의하라고 일러두었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는 이렇게 부모님과 학교에서 일어나는 ‘학폭’이나 고민에 대해서 상담을 한 적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요새는 아이들의 의식이 많이 깨어 있고 교육을 받아서, 문제가 있는 점에 대해서 가만히 입을 닫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불평등에 민감한 MZ 세대뿐만 아니라, 요새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더 이상 우리 세대와 같이 ‘침묵’이 미덕인 시대는 지난 것 같다.




 ‘더 큰 고백’을 하기 위해서는 이를 듣고 받아줄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필요하다.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얼마 전 “80년 전 나치의 옛 소련 침공은 독일인의 수치”라고 다시 한번 이야기했다. 재임 기간 동안 독일인의 잘못된 전쟁 야욕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은 그녀였다. 독일에도 극우파가 있을 텐데 그녀의 지지율은 임기 말인데도 여전히 60% 대다. 


 굳이 우리와 이웃한 또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고 싶다. 이야기할수록 입만 아프고, 손만 아플 뿐이다. 그 나라(정부)는 진심 어린 사죄의 고백을 할 생각도 없고, 적당히 시간과 함께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한다. 


 진심 어린 ‘고백’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 사회는 확실히 성숙한 것임에 틀림없다. 고백을 요구하기 전에 그 고백을 받아줄 수 있는 자세와 여건이 되는지도 돌아봐야 한다. 


 만약, 사소한 것이라도 감추는 것이 있다면 되도록 고백하도록 노력해 보자. 고백을 받는 사람도 추궁하기보다는 좀 더 이해를 하려고 노력해 보자. 그래야 더 이상 감추는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언쟁을 벌이더라도 말이다. 


 ‘고백’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의 ‘용기’가 필요하다. 


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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