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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단 Nathan 조형권 Feb 07. 2020

글을 사랑하는 글쟁이인가?

 “글쟁이 : 글 쓰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 《국어사전》


 ‘장이’는 그것과 관련된 기술을 가진 사람에게 붙는 말이고, ‘쟁이’는 그것이 나타내는 속성을 많은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다. ‘장이’를 접미사로 쓰는 대표적인 단어는 대장장이, 양복장이, 간판장이 등이고, ‘쟁이’는 겁쟁이, 고집쟁이, 멋쟁이, 떼쟁이 등이다. 

 글을 쓰는 것도 일종의 기술이 필요한데, 주로 몸을 많이 사용하는 기술보다는 정신적인 부분이 더 반영되어서 ‘글장이’ 보다는 ‘글쟁이’라는 표현을 쓴다. 물론 앉아서 몇 시간 동안 글을 쓴다는 것도 상당히 육체노동이지만, 상대적으로 뇌에서 쓰는 에너지가 더 많아서 이러한 말을 쓰는 것 같다. 

 문필가, 작가, 저술가라는 말도 좋지만 왠지 글쟁이라는 말이 정감이 간다. 글쟁이에는 작가의 멋과 고집이 느껴진다. 멋쟁이와 떼쟁이, 고집쟁이 등의 의미가 모두 들어간 것이 글쟁이다. 글을 쓰는 것은 멋진 일인 동시에 상당한 끈기가 고집이 필요하다. 책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다. 요새처럼 하루하루의 변화가 빛의 속도로 빠른 세상, 호흡이 긴 영화나 드라마보다는 시청자들이 지루할 틈을 느끼질 못할 정도의 빠른 전개, 일명 ‘짤’이라고 불리는 짧은 영상 등. 가뜩이나 인내심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더 짧은 인내심을 주는 환경들이 책을 읽기 힘들게 만든다. 


 한 시간 독서, 한 시간 글쓰기. 이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언감생심’이다. 10분이 지나면 나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스마트폰으로 향한다. 이러한 행위 자체가 너무나 큰 장벽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사랑하는 글쟁이와 독서쟁이가 있다. 독서에도 고집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작가에게 있어서 ‘글’은 무엇일까? 고집쟁이, 멋쟁이, 글쟁이, 독서쟁이가 된 이유가 있는가? 

 그것은 ‘글’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글에 대한 매력과 에너지를 알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어떤 글의 한 구절을 읽다가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치고 싶은 적이 있었을 것이다(적어도 글이라는 것을 읽는 분이라면). 그것이 바로 ‘글’의 힘과 에너지다. 왜냐하면 그 글에는 작가의 에너지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읽는 독자도 그 에너지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댓글’이 문제가 되는 이유도 이와 같다. 기사에 달린 악플에는 사악한 에너지가 있다. 그 댓글을 읽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우울해지고 슬퍼진다. 

 글의 힘과 에너지를 알기 때문에 작가는 글을 쓴다.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글에서 나온다. 강연가도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런데, 그 메시지에도 결국 ‘글’이 기본이 된다. 뛰어난 강연가가 되기 위해서는 글을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 이해한다는 것은 독해 능력, 그리고 서술 능력이다. 

 글을 써야 나의 생각이 정리된다. 만약 글을 쓰지 않는다면 중언부언하게 마련이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누구보다 연설문에 신경을 많이 쓴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남북전쟁이 한창이었던 1863년 11월 19일, 게티즈버그의 전몰자 국립묘지 봉헌식에 참석했다. 그 연설이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연설문이 너무나 훌륭했기 때문이다. 이 연설문은 총 266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연설은 고작 2분이었지만, 그의 웅변 능력이 가미되어서 역사에 길이 남는 명연설이 되었다. 오죽하면 그보다 앞서 2시간을 연설했던 에드워드 에버렛이 링컨 대통령의 2분 연설이 자신의 것보다 낫다는 일화가 전해지겠는가? 이 연설문을 위해서 몇 날 며칠, 머리를 쥐어 싸매고 고민했을 링컨 대통령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This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문 중에서 


 사실 현대 사회로 오면서 ‘글’보다는 ‘말’이 주목을 받고 있다. 이는 산업혁명을 겪고, 급격한 도시화를 겪으면서 발생한 현상이다. 도시에 사람들이 몰리자 나를 드러내기 위해서 ‘말’을 많이 해야 했다. 내성적인 사람보다 외향적이 사람들이 주목을 받았다. 내성적인 사람의 힘을 묘사한《콰이어트》라는 책에서 저자는 이러한 현상이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의 성격을 바꾸었다고 한다. 


 “새로운 성격의 문화에서 가장 각광받는 역할을 연기자였다. 미국인은 너 나 할 것 없이 ‘연기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 《콰이어트》중에서 


 요새 주목받는 사람들은 일종의 연기자들이 많다. 나의 생각과 사상보다는 말이 먼저 앞선다. 즉흥성이 기반이다. 한 마디로 소비적인 단어들의 나열이다. 그것을 애드리브가 좋다고 칭찬한다. 물론 즉흥성이 좋으면, 사회생활을 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된다. 문제는 말이 너무 앞서나갈 때가 문제다. 연기자가 되는 것이다. 나의 생각과 상관없는 말을 나열한다. 그래야 사람들한테 인정을 받고 주목을 받는다. 결국 속빈 강정이 된다. 


 옛날이야기를 한다면 고리타분하거나 꼰대로 폄하 받기 일쑤다. 하지만 선현들이 중요시했던 ‘글’을 알아야 한다. 예전에는 ‘글’이 중요했다. 전화기나 메신저가 없던 시절이기 때문에 주로 서신을 왕래하면서 안부를 묻거나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편지를 쓰더라도 바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몇 날 며칠, 심지어 답장을 받는 데 몇 달이 걸리고는 했다. 

 그렇다 보니 다들 글을 쓰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글 안에는 내가 평소 생각했던 사상, 그리고 읽었던 책의 내용 등을 인용했고, 글을 쓸 수 있는 여백이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핵심을 놓치지 말아야 했다. 심지어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는 ‘죽간’이라는 대나무 조각에 글을 써야 했으니, 죽간의 무게를 고려해서 글을 쓰는 분량이 정해졌다. 

 글을 써서 나의 생각과 사상을 전달하는 것 외에도 글을 써서 나의 감정을 녹여냈다. 그것이 바로 ‘시’다. 운율과 단어의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그 안에 담긴 내용을 음미했다. 요새도 래퍼들이 자신의 느낌과 감정, 생각을 가사에 쓴 것처럼 선비들도 그렇게 운율에 맞춰서 시를 썼다. 

 따라서 작가가 되었거나 또는 되기 전에 나 자신한테 물어봐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글을 사랑하는가?” 


 글을 곁에 두고 사랑하는 독서쟁이, 그리고 글쟁이가 되어야 한다. 유명해지거나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그것은 결과다), 글 자체를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 오랫동안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작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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