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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단 Nathan 조형권 Jan 06. 2023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상실의 시대에 살면서, 읽어볼 만한 책

아주 오래전에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이라는 책을 읽었다. 가물가물했던 기억으로는, 주인공이 옛사랑과 만나서 산장에 가고, 바람?을 피우고 나서... 결론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 책을 얼마 전에 다시 읽기로 한 후 지인들에게 마흔이 넘으면 읽어야 할 책이라고 추천했다. 하지만 다시 책을 읽으면서 후회되기 시작했다. ‘아 괜히 추천했다.’ 이유는 좀 더 뒤에서 설명하겠다.


이 책은 수작이고,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소설이다. 하루키 작가의 소설이 그렇듯이 초현실적인 내용들이 많기 때문에, 지극히 현실적인(?) 이 소설은 읽기도 편하고 공감이 많이 된다. 물론 주인공의 첫사랑은 현실과는 거리가 먼 캐릭터이지만 말이다. 그의 베스트셀러 소설인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로 알려진)과 유사한 점도 많다. 외동아들인 주인공(하루키 작가도 외동아들이다)이 한 여인을 사랑하지만, 그 여인과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고, 다시 예전 여자 친구에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하지메의 첫사랑은 시마모토이고, 부인은 유키코다. ‘노르웨이의 숲’의 주인공은 와타나베이고, 첫사랑은 나오코다. 여자 친구는 미도리다. 하지메와 와타나베는 겉으로 보기에는 사회적으로 성공했지만, ‘상실’의 주인공이고, 젊은 시절 방황을 하고 부인과 여자 친구를 잠시 떠나지만, 그들은 다시 받아준다. 묘하게도 비슷하면서도 비슷하지 않은 두 소설이다.


하지메가 첫사랑으로 다시 방황을 겪고 아내와 갈등이 생겨서 이혼을 할 수도 있었지만, 아내는 그를 믿고 기다려줬다. 그가 내일부터 다시 시작해도 좋겠냐는 물음에 “그게 좋겠어”라고 대답한 아내 유키코, 첫사랑이 죽고 나서, 극심한 상실감과 허탈감에 빠져서 예전 여자 친구에게 연락하자, “너, 지금 어디야?”라고 와타나베를 받아준 미도리. 소설의 뒤편 해석을 보면, 이 소설은 그동안 주인공의 방황과 상실에 대한 완결 편이라고 한다. 그의 첫 단편소설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부터 시작한 주인공의 끝없는 방황이, 어쨌든 결국 부인과 화해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전의 소설에는 이러한 ‘완결점’이 없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하지메는 37살로 곧 중년에 접어들고, 젊은 학창 시절을 기억하는 와타나베도 37살이다. “서른일곱 살 그때 나는 보잉 747기 좌석에 앉아있었다.”로 ‘노르웨이의 숲’ 소설은 시작한다. 공교롭게도 하루키 작가는 37살에 유럽행 비행기를 탔고 38살에 ‘노르웨이의 숲’을 발표했다. 유럽행 비행기를 탄 것이 하루키 작가에게는 일종의 전환점이 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5년 후 이 책을 출간한 것이다. 그래서 두 개의 소설이 닮았다는 느낌을 더 준다.


작가는 역시 ‘상실’에 대해서 논한다. 그의 작품 세계가 그렇듯이 주인공은 외롭지만 외롭지 않다. 자신만의 세계관을 구축했다. 혼자 있는 것을 편하게 생각하고, 다양한 사람들과도 어울리면서 사색을 즐긴다.




앞서 이 책을 추천한 것에 대해서 ‘후회’를 한 이유는, 책이 ‘불륜’을 조장한다거나 다소 야했기 때문? 은 아니다. 이 책은 추천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책이 독자를 이끄는 것이지, 누가 권유한다고 해서 읽을 책은 아니었다. 그런 끌림을 주는 것이 하루키 작가의 작품이다.


사실 처음 하루키 작가의 작품을 만난 것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라는 단편 소설을 통해서였다.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삼성역의 서울문고에서 이 책을 우연히 발견한 때가 1993년이다(한국에는 1991년에 소개된 첫 하루키 작가의 작품이다). 처음 책을 읽을 때는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쥐’라는 친구도 그렇고. 도무지 무슨 이야기인지. 그런데 학창 시절을 보내면서, 수많은 고뇌와 갈등의 시간을 보내면서, 우연히 책장에 꽂은 이 책을 다시 펼쳐서 읽고 나서 이후 하루키 작가의 작품을 계속 읽게 되었다.


작가의 작품을 좋아한 이유는, 이 책을 읽으면서 혼자라는 것이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외로움을 외로움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1990년대만 하더라도, 혼밥, 혼술, 혼영 등 이런 문화가 없었다. 혼자 밥 먹으면 어색하고, 혼자 술 마시면 더 이상하고, 혼자 영화관도 쑥스럽던 시절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러한 문화가 너무 당연시되고 있다. 영화관에 혼자 오는 분들이 꽤 많다.)


혼자라는 것이 꼭 불완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나도 어릴 적 초등학교에 형과 같이 입학하고 나서, 1학년 2학기를 휴학하고 잠시 쉬면서 혼자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익숙해지다 보니 나이가 들어서도 마찬가지다. 혼자 있는 것이 편할 때가 많다. 전에는 그것이 왠지 이상하게 인식될 것이라는 걱정이 있었지만, 이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렇다고 혼자만 있지는 않는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좋아한다. 다만, 그러한 만남을 계속하다 보면 지치게 마련이고, 그때는 혼자서 잠시 쉼을 갖는다. 쉼표를 가지면서 다시 에너지가 차오름을 느끼게 된다. 물론 사람과의 관계에서 에너지를 더 받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이는 사람마다 다르다.




하루키 작가의 책을 읽으면서 덕분에 재즈에 빠져 들게 되었다. 결국 재즈의 본고장에 어학연수도 다녀오고, 그때 만난 일본 친구들은 이미 30년 지기다. 만약 하루키 작가의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이 친구들과의 인연은 없었을 것이다. 재즈를 공부하고, 재즈밴드를 만들어서 활동하게 된 것도 작가의 소설 덕분이다. 어쩌면 나의 세계관 중 상당 부분에 그의 소설과 세계관이 기여를 했다고 봐야 될 것 같다.


그 후로도 하루키 작가의 소설은 같은 세계관을 유지하고, 확장하면서 지금까지 꾸준히 책이 나오고 있다. 작가의 꾸준함, 그리고 세대와 국경을 초월해서 사랑을 받는 작품을 낸다는 것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키 작가의 세계관에 좀 더 쉽게 진입하려면, ‘국경~’과 ‘노르웨이~’ 두 소설을 읽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동의 안 하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솔직히 너무 난해한 소설은 읽기가 어렵다. 예를 들어서 우물 안에 들어갔다가 다른 세계로 간다는 등. ‘양’이나 ‘쥐’ 등. 이 부분은 역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소설을 다시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 하지메는 외동아들이고, ‘상실 감정을 갖고 평생 살면서, 어렸을  첫사랑(역시 외동딸) 잊지 못한다. 결혼하고 예쁜 딸아이들도 갖고, 재즈 카페를 성공적으로 운영하면서 나름대로 성공적인 인생을 산다. 하지만 우연히 잡지에 실린 자신의 사진을 보고, 첫사랑이 찾아오면서 급격하게 흔들리고 만다. 첫사랑을 만나자, 자신의 인생이 그동안 완전하지 못했고, 껍데기만 있는 삶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첫사랑이 다시 떠나자 일상으로 돌아가고, 와이프에게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받는다. 너무 이기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결국 나의 솔직한 감정은 소중하고, 와이프가 받는 상처(물론 용서를 구하지만) 괜찮은 건가?


만약 주인공 하지메처럼 다들 결혼생활을 잘하다가, 예전 첫사랑을 만나서 순수했던 자신으로 돌아가고, 그 사람과 함께 떠난다면 그것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그렇게 된다면 우리나라의 이혼율은 더 급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혼을 한 사람들이 서로 간에 신뢰하고 선을 지키기 때문에 가정생활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로, 하지메와 같이 평생 외롭게 살면서,  여자만을 사랑했다면  부분은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인생이리라. 결국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기란 힘들다. 사람은 사람마다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상실’의 감정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나를 완전하게 만드는 존재라는 것이 과연 있는 것일까? 어차피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가 아닌가.


새로운 겉표지가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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