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이 있는데 비를 맞는 사람이 어디 저 하나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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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remy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난 당신을 생각해요. …’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면 유독 생각나는 노래이다. 故 김현식이 부른 <비처럼 음악처럼>. 탑골 스타일 노래들이 요즘 인기이다 보니 많은 젊은이들이 알고 있다고 믿고 싶다.


비는 혼자 맞을 때는 청승 그 자체이다. 특히나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한 방울이라도 더 내게 불어올까 봐 우산을 바람 쪽으로 숙이는데, 각도가 틀어지면 우산이 홀라당 뒤집히기도 한다. 그냥 그대로 비 맞은 생쥐 꼴이 되어버린다. 하루 종일 찝찝한 그 기분이 정말 싫다.


하지만 사랑을 하고 있는 중이라면 어떨까. 굳이 둘이서 각각 하나씩 우산을 들어도 될 것인데 하나만 들려고 서로 눈치 싸움을 한다. 그것도 둘 중 더 작은 사이즈의 우산으로. 그리고는 최대한 안 그런 척하면서 밀착하여 서로의 감정을 우산을 사이에 두고 교환한다.


그런데 혹시나 상대가 비에 젖을까 봐 나도 모르게 내 쪽으로 넘어오는 우산을 더 그쪽으로 밀어낸다. 이미 나는 비 맞은 생쥐 꼴을 넘어 수중전을 치르고 있는데 말이다. 그러면서도 입가에는 끝없이 미소가 번진다. 그렇다. 사랑하니까, 혹시라도 나의 배려가 부족하여 사랑하는 마음까지 부족해질까 봐 안절부절 못하며 우산을 나누어 쓴다. 나는 1/5만큼만 쓰다가 생쥐 꼴이 되어도 상관없다.




이처럼 똑같은 상황이라 할지라도 어떠한 경우에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진다. 바로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우리나라 교육은 결론에 이르는 과정보다 단 하나의 정답을 도출하는 데 익숙하다보니 굳이 실패나 실수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아니, 굳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 맞겠다.


‘1+1=2’를 설명할 때 ‘왜’에 대한 고민은 없다. ‘2’라는 정답이 있으니 그냥 외우면 그만이다. 하지만 이를 조금 더 다양한 스토리텔링으로 접근하면 이해에 대한 확장성이 넓어질 것이고 기억에 대한 잔상도 짙어질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가장 쉽게는 사과를 생각해봐도 좋을 듯하다. 사과 하나를 들고, 또 다른 하나의 사과를 보여주면서 둘을 합치면 일반적으로 ‘2’가 맞다고 생각하는 답이 도출된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엄마와 아빠는 각각 한 명씩 둘인데 왜 둘 사이에는 시간이 지나니 ‘나’라고 하는 또 다른 ‘1’이 탄생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생각 이상으로 사회학적이며 문화인류학적인 접근 방식이다.

찰흙을 생각해보면 또 다른 결과물이 나온다. 찰흙 한 덩어리와 다른 한 덩어리를 합치면 다시금 한 덩어리가 되기 때문이다. ‘1+1=1’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틀린 것일까.


이럴 때야 말로 인문학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다양하고도 깊이 있는 이야기를 누군가와 주고받을 수 있다. 다르게 사고한다고 해서 반드시 틀렸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인류가 오늘날까지 오는 데 크게 공헌한 천재들의 사고방식은 그래서 다르면서도 특별하다.




사실 아인슈타인 이전에 상대성이론에 거의 근접했던 여러 과학자들이 존재했었다. 그들의 연구 방식은 아인슈타인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결정적인 마지막 결과물을 도출해내지 못해 숱하게 좌절했다. 아인슈타인은 달랐다. 다르게 점검해봐서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을 주저 없이 무너뜨리고 곧바로 새롭게 착수했던 것이다. 평범하고도 단순한 현상에 대해 아이처럼 감탄하는 순수함마저 지니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아인슈타인의 힘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어떨까. 메모의 신이라고 알려져 있는 그는 하나의 대상을 다각도로 고민하고 표현했다. 옳고 그름을 떠나 다양하게 고민하고 정리함으로써 자신만의 이론들을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머리 위로 떨어진 사과에 영감을 얻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이나 벌거벗은 채 “유레카”를 외친 아르키메데스라고 다르지 않았다.



충분히 그렇다고 믿는다


지금 여기서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한 가지뿐이다. 주위의 판단과 잣대에 조금은 더 의연해지고 무관심해져서 자신만의 색깔과 향기가 나는 사람으로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서이다. 매력이 있는 사람으로 살았으면 하는 소망이 있어서 이렇게 외치는 것이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조금 더 밀고 나갔으면 하는 원동력을 발견했으면 하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한창 직장생활을 할 때 이런 말을 종종 듣곤 했다. “보통 다 이렇게 하고 이게 맞는데 왜 굳이 그렇게 해서 힘들게 하는 거죠?” “남들 하는 대로 하면 되는 거지 왜 굳이 그렇게 해야 하나요?” 그런데 나는 그 말들이 싫었다. 다르게 생각하고 접근할 수 있는 거 아냐? 그래서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난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나답게 표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구나.’


회사에 굿바이를 당당하게 외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이렇게나 많고 전부 다른데 회사에 아무리 외쳐도 공허한 메아리로 허공을 떠돌 뿐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one of them’으로 사는 것이 편할 수 있다. 하지만 나답게 살았을 때 느끼게 되는 유려한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한 결정을 내리는 데는 분명 대가를 치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평범하고도 천편일률화 되어 있는 삶을 선택해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에서 제일 가기 싫은 곳이라고 마법의 주문처럼 중얼거리면서도 결국 가야만 하는 그곳. 세상에서 제일 만나기 싫은 사람이 있다고 역시나 저주 아닌 저주를 퍼붓지만 그래도 만나야 하는 그곳. 세상에서 제일 하기 싫은 일투성이라며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마냥 괴로움만 쌓이는 그곳.


정말 힘들고 어렵겠지만 누구에게라도 솔직하게 털어놓아보자. 결국 스스로가 내린 결정이라고…. 그것 또한 자신만의 아픈 용기이자 현실에 대한 믿음이라고…. 하지만 그런 ‘내’가 싫다면 스스로를 다시 한 번 믿어보자. 용기를 조금만 더 내어보자. 지금 당장 모든 것을 때려치우라는 것이 아니다. 나다운 나를 찾아가는 방법이 그 안에서도 충분히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고 싶을 뿐이다. 그걸 깨달아나가자는 것이다.


조금만 다르게, 나답게 생각의 길을 만들어 터벅터벅 그 위를 걸어 나가보자. 이는 단순히 오늘을 풍성하게 하는 밑거름일 수 있지만 내일을, 모레를, 더불어 미래를 바꾸어 나아가는 밀알일 수도 있다. 충분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살아 있음에 감탄하는 매순간을 만나보자고 은근슬쩍 권하고 싶다. 작지만 알차게 쌓아가는 다름을 통해 만나는 오늘 같은 오늘 말이다.




지금이라도 당장 ‘나만의 사고방식’을 찾아내라고 부추기고 싶다. 나는 정확하게 정답이 있다고 결정 내려주고 싶지 않다. 물론 결정 내려줄 수도 없다. 다만 물고기를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 잡는 법을 알려주려는 것이다.


솔직히 서른을 지나 마흔에 접어들기 시작하면 점점 현실과 타협하게 되어 조금씩 더 나를 위한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지금 당장, 롸잇 나우, 나다운 나의 모습을 차곡차곡 다져나가야 한다.


어제는 보슬비가 내렸다. 정말 우산을 챙겨서 외출했는데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고 있었다. 이 정도 비를 맞고 있으면 기분이 상쾌해진다. 빗방울 때문에 눈을 살짝 찡그리는데 그 기분이 참 좋다. 그 감성을 온몸 구석구석으로 기억한 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글에 녹여보고 싶다. 단지 한 문장이라 할지라도. 건너편에서 너털너털 걸어오는 사람도 우산을 쓰지 않았다. 역시나 손에는 우산이 들려 있었다. 그 사람은 왜 우산을 쓰지 않고 걸었던 것일까.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조금만 다르게 했을 뿐인데 다양한 궁금증들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오늘도 분명 하루가 재미있을 것이다. 충분히 그렇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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