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의 의견에 '무조건' OK하는 나의 소심함
편집자로 참 오래도 살았다. 심지어 지금도 프리랜스 편집자로 살고 있다. 책이든 잡지든 이래저래 기회가 될 때 나에게 주어진 '행운'을 마다하지 않는다. 아니다, 오히려 정말 감사하며 더욱 열심히 하려고 애를 쓴다. 나를 믿고 나에게 연락을 건네는 모든 분에게 리스펙트!!!!!!! 그러한 마음으로 깊고도 청명한 가을 하늘 햇살을 무한대로 받아내는 고개 숙인 벼보다 더 고개를 숙이게 된다. 무엇보다 나는 방구석 사장이 아니던가.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작가라는 이유로 코를 높게 들어 내 평판을 깎아먹을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방구석 사장이 되어보니 더욱 감사할 일이 세상만사 천지다.
많은 책을 출간했다. 공동 집필을 포함하여, 곧 출간될 그 책까지 덧붙인다면 총 8권의 책이다. 3년이 조금 넘은 시간 동안 참으로 많이도 열심히 달렸다. 누군가가 이렇게 물었다. "그렇게 쉼없이 달리며 책을 쓰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요?" 작가를 꿈꾸는 많은 분들에게는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이 정말로 궁금할 것만 같다.
그리고 편집자로서의 삶과 작가로서의 삶의 차이점이 무엇이냐는 질문도 종종 받는다. 하지만 나는 판타지스럽게 오해받는 작가's Life를 감당해내지 못하고 있다. 무슨 이야기인고 하니 초판을 넘긴 책이 한 권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책이 엄청나게 판매가 많이 이루어져서 그 여파로 재판을 찍은 것도 아니다. 나의 첫 책이다 보니 많은 분들이 응원해주시고 파이팅해주셔서 분에 넘치는 과도한 사랑을 받았을 뿐이다. 첫 책이다 보니 부족한 점이 얼마나 많았을까. 사실 가끔 첫 책을 읽을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릴 때가 종종 있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딱 그런 심정 말이다. 그래도 작가 세계에서는 신입 작가였을 테니 충분히 파릇파릇하고 상큼했으리라. ^^;;;;;;
사실 책을 쉼없이 출간하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가장 먼저 작가스러운 답변을 하나 내놓자면, 편집자로 살아가며 수없이 많은 작가분들을 만나고 그분들과 작업하면서 '나라면 이러이러한 책을 출간해봐야지' 하고 오랫동안 체크해놓은 메모와 관심들이 결과물로 세상에 빛을 보게 된 이유이다. 좋게 말하자면 십수 년간 나름 내공을 쌓기 위한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왔던 것이다.
오히려 편집자로 일하다 보면 작가로 데뷔하기가 쉽지 않다. 작가분들의 커리어도 대단해 보이고, 스토리도 버라이어티해 보인다. 그런데 많은 편집자들은 글을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대중성과 스토리의 다양성에 위축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아닌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러다 보니 멋진 작가, 좋은 작가, 대단한 작가의 뒤에서 조력자로서 해'내'야 할 일들은 무사히 해내지만 정작 자신은 정면에 나서기를 꺼려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많이 주저주저했다. 에디터로 살아가기 전에 무대를 휘젓고 다니는 배우로 몇 년을 살아왔다. 그래서 내가 전면에 나서고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다는 생각을 꽤 자주했다. 하지만 자신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과연 잘 쓸 수 있을까. 혹시나 안 팔리면 어쩌지. 한 권 내고 소리 소문 없이 묻혀버리는 나를 마주하면서 과연 애써 무심한 척 할 수 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굳이 할 필요도 없었을 고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그러다 보니 내공부터 쌓아야겠다고 느꼈던 것이다.
쌓을 수밖에 없었다. 때를 기다려야 했다. <삼국지>의 수많은 명장들처럼 그렇게 나에게 주어질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썼다. 어느 순간 책이 꼴도 보기 싫어 쥐어뜯은 적도 있었다. 작가의 글을 교정교열 하면서 나의 글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를 지리멸렬하게 적용하고 또 적용해 보았다. 그런데도 십수 년이 걸렸다. 마음을 품었지만 선뜻 결과물로 표현해내는 것도 힘들었다. 남의 글들은 책으로 세상에 빛이 될 수 있도록 그렇게나 기획을 하고 실행에 옮겼는데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내 책을 기획하는 데는 왜 이렇게 거대한 바위를 옮기는 것처럼, 아니 산을 깎아내어 도로를 내는 것처럼 힘들고도 어려웠는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저질러 보는 건데 말이다.
그래서인지 편집자들의 노고를 충분히 안다. 그러다 보니 내 글을 작업하는 편집자들의 의견에 도무지 No라는 말을 하지 못하겠다. 나는 그렇게 작가들에게 숱한 No를 듣고서 상처도 받고 스트레스로 출근까지 하기 싫었던 적이 부지기수인데 말이다. 현 편집자의 마음을 전 편집자가 알기 때문이겠지. 물론 의견을 건넨다. 하지만 아주 소심해진다. 메일을 썼다가 지우기를 여러 번이요, 전화를 들었다가 내려놨다 역시 여러 번이다. 혹시나 편집자가 나의 의견이 아닌 것 같다고 하면 그냥 소심하게 알겠다고 얼버무린다. 대신 잘 만들어달라고만 두 번, 세 번 당부한다. 어찌 보면 내 책의 편집자들 중 몇몇은 업계의 후배일 것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회사에도 편집장이 있는데 편집장을 또 한 분 더 모시고 일을 하는 것일 수 있다. 내가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그 회사의 편집장이 잡아내지 못하는 실수, 나라도 숱하게 잡아낼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내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아주 치명적인 오류가 아니라면 딱히 뭐라고 하지 않았다. 가재는 게 편이던가. 아, 내 책인데 내가 맘고생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 권의 책을 만드는 과정에 작가로서 소홀히 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의견을 내야 할지를 따져보며 편집자의 마음을 헤아려보고자 더 노력했다는 것이다. 때로는 과도할 만큼.
평소 친분이 있는 어느 편집자와 대화를 하다가 이런 말을 조심스레 들었다. "작가님은 작가로서뿐만 아니라 편집자로서 경험이 충분하셔서 기획도 잘하시고 알아서 교정교열까지 다 마칠 수 있는, 최고의 작가는 아니더라도 최선의 작가는 되시는 것 같아요. 그런데 선뜻 책 내자는 말을 먼저 못 하겠어요. 너무 선배님이라 제가 편집하는 걸 다 아실 거 아니에요. 뭔가 숙제 검사받는 기분이 든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출간 제안을 드리고 싶은데 드리지 못하는 아이러니함이 계속 마음속에 걸리는 거죠."
충분히 이해한다. 그 말을 듣고서 딱히 뭐라 변명할 거리를 찾지 못했다. 그냥 다른 주제로 대화를 넘겨버렸다. 그래서일까. 나에게 책을 출간하자고 연락 주시는 출판사들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 출판사들은 대개 1인 출판사이거나 작은 출판사들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 마케팅을 엄청나게 해주지 못해도 상관없다. 아니다, 상관있지만 괜찮다. 선인세 및 인세를 은혜롭게 쏟아부어주지 못해도 상관없다. 아니다, 물론 상관있겠지만 충분히 이해한다. 모든 책이 다 잘 팔릴 수는 없으니까. 아니다, 대부분의 책이 잘 안 팔리는 출판계 사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렇다. 나는 굳이 너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책이 편집되는 과정에서 뭐라 딱히 반론하거나 No를 표현하기가 갈수록 힘들어진다. Yes맨으로 길들여진다고나 할까. 정말 치명적인 문제가 아닌 이상 다 이해하려고 한다. 마음 편하게 받아들인다. 결국 나는 작가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하려고 한다. 감 놔라, 배 놔라 하며 출판계의 꼰대 작가가 되고 싶지도 않다.
나만의 고충이려나. 나 말고 다른 작가분도 계시려나. 그래도 나에게는 내 책을 출판해주신 출판사가 불룸스버리보다 위대하게 느껴지고, 랜덤하우스보다 애정하며, 갈리마르보다 소중한 곳이다. 그렇게, 그렇게 나는 이제 아홉 번째 책을 출판할 출판사의 Call을 기다리게 된다. 더불어 나와 찰떡궁합이 될 편집자의 Call도 기다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