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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remy Jan 17. 2019

당신을 향해 뻗는 두 번째 손

내 나이 벌써 마흔인데 해놓은 게 아무것도 없어

급하게 잡힌 아침 회의. 7시 30분부터 회의가 시작이니 피곤하지 않을 수 없다. 김 과장은 자신도 모르게 하품을 해버렸다. 필기하는 척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입을 가리긴 했지만 건너편에 하 대리가 그 모습을 보고서 뭔가 전염이라도 된 것처럼 덩달아 하품을 하고야 말았다. 다행히 더 이상 본 사람은 없는 것 같아 겨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처럼 하품은 전염이 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마치 그 모습을 보고서 따라하듯이. 오래 사귄 연인을 보면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다. “둘이 참 많이 닮았네요.” 그 둘은 행동도 따라하게 된다. 자신도 모르게. 아이가 아프면 엄마도 같이 아파한다. TV에서 노래를 잘하는 가수를 보고 있으면 내가 잘하는 것과 상관없이 같이 흥얼거리게 된다.     


이러한 행동을 담당하는 신경계의 기본 단위를 거울 뉴런(mirror neuron)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거울처럼 반영하기 때문이다. 1996년 이탈리아 파르마 대학교 생리학연구소의 연구팀이 발견한 이 신경세포는 단순히 모방만이 아니라 감정의 공감과 타인의 마음을 읽는 능력에도 관여한다고 하여 연구가 활발히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상대방의 행동이나 말에 공감한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를 담고 있을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로 어우러져 있는 인간사회에서 공감은 더없이 중요하다. 나 홀로 독불장군처럼 살아갈 수 없기에 상대방과 교감이 있어야 한다. 나의 행동이나 말을 전달함과 동시에 상대방도 그에 맞게 반응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도무지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공감을 하기에 친구, 연인, 직장 동료 등이 생긴다. 서로를 이해해주지 못하면 가까이 하기도 싫어질 테니 말이다. 힘든 일이 있을 때 나의 아픔을 공유해주는 사람, 무거운 짐을 들어야 할 때 기꺼이 도움을 건네는 사람 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기에     


그런데, 분명히 현대사회는 공감을 통해 이루어졌을 테고, 공감이 넘쳐나는 사회여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실제로 엄청나게 많다. 인류는 75억 명을 넘겼고, 대한민국도 인구가 무려 5천만 명을 돌파했는데 외로움과 고독으로 단절되어 고립된 사람들이 넘쳐나는 아이러니인 것이다.     


왜 이런 것일까? 말을 걸 수 있는 사람의 숫자는 계속 늘고 있는데,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의 숫자는 사라지고 있는 이런 딜레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선 철저히 현실적이고 냉혹한 경쟁사회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현대인의 비애를 이야기하고 싶다. 더불어 물질로 모든 것이 평가되는 사회의 비애마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슬픔은 나누면 약점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질투가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결국 현실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상대에게 터놓고 말하지도, 이해해달라고 요청해보지도 못한다. 극단적으로 은둔형 외톨이로 살아가는 사람의 숫자만 10만 명을 넘어선지 오래이다. 집계되는 숫자를 넘는 몇 배의 사람들이 타인과 관계를 맺고 마주하기를 거부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공감한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 모른다. 사실 겉으로만 보면 상대의 말을 열심히 잘 들어주면서 적절한 타이밍에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감의 사전적 의미만 찾아보아도 감정, 느낌, 기분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잘 들어주는 것이 단순히 한쪽 귀로 듣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상대를 향한 무한한 신뢰라는 것이다. 그가 하고 있는 이야기가 나에게 얼마만큼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지가 중요하다. 무엇보다 가정을 들여다보자. 아버지가 돈 벌어다주는 기계 정도로만 여기게 된 가정이 많다고 한다. 현실이 가져다준 불행이다.     


하지만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일하는 아버지는 자녀들과는커녕 아내와도 이야기를 나누기 쉽지 않다. 주말에는 소파와 한 몸이 되어 무의식중에 TV만 틀어놓고 하루 종일 잠들어버리는 아버지. 이렇게 삶이 계속되면 영원히 가족과는 대화를 나눌 수도, 서로에 대해 공감할 수도 없다. 결국 아버지는 가족을 원망하고, 남은 가족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끔씩 영화나 드라마에서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아버지를 보며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자녀들의 속마음을 보곤 한다. 섬뜩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상대보다 무조건 잘해야 승진을 하게 되고,
연봉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정말 ‘무조건’ 잘해야 하다 보니 공감이라는 부분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된다.
서로에게, 아니 상대에게 마음의 생채기만 깊게 남기게 된다.
학교 역시 다르지 않다.
내가 1등을 하려면 2, 3등
심지어 꼴찌까지 존재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세상은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말해도, 경쟁사회인데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고 비아냥거릴지라도 잠깐 손해 보는 셈 치고 타인의 마음에 손을 뻗어보는 것은 어떨까. 공감은 실제로 ‘타인을 향해 뻗는 두 번째 손’일지 모른다. 따스한 온기로 직접 잡아주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그만큼 비슷한 감동을 느끼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기에 진정성이 가득 담긴 작은 행동 하나가 큰 변화를 몰고 올 수 있다. 수많은 위인들이 세상을 빛내기에 앞서 삶에 빛이 되어준 몇몇 인물들에게 큰 감사를 하곤 한다. 아버지, 어머니, 형, 누나, 동생, 선생님, 친구, 이웃 등.     


그들이 뭔가 보답을 바라거나 자신이 손해 볼 텐데 왜 굳이 이런 것을 해야 하나 하는 마음으로 공감해주고 경청해준 것은 아닐 것이다. 작은 마음 하나하나가 모여 큰마음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특히나 공감을 이야기할 때는 경청이 중요하다. 들어주는 것의 힘!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는 쉬지 않고 말할 수 있어도 남의 말을 들어주는 것은 쉽지 않다. 두 개의 귀는 항상 열려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잘 들어주어야 한다는 세상의 이치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한다. 그렇기에 공감과 경청에 능한 사람이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는 것이다.     


그래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이런, 너무 자로 반듯하게 잰 듯 모든 것을 바라보는 것은 아닌지. 세상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로 넘쳐난다. 인간은 지극히 이익 중심으로만 나아갈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사실이니까. 내가 당장 굶어서 쓰러지더라도 더 오랫동안 굶어서 목숨을 잃을 것만 같은 사람에게 한 조각 남은 마지막 빵을 건넬 수 있는 존재이니까.



스토리로 맹자 읽기


‘처음부터 악인은 아니었을 테니…’      


孟子曰: 水信無分於東西 無分於上下乎. 

맹자왈: 수신무분어동서 무분어상하호.      


人性之善也 猶水之就下也, 

인성지선야 유수지취하야,      


人無有不善 水無有不下. 

인무유불선 수무유불하.                


- 뜻풀이 -
맹자가 말했다. “물이 동서를 구분해서 흐르는 것은 아니지만 위아래는 뚜 렷이 구분하여 흐르지 않는가? 물이 아래로 흐르듯이 인간의 본성은 선하 도록 되어 있으니,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를 수밖에 없듯이 사람의 본성도 선할 수밖에 없다.” 
— <고자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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