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엉망진창이지만, 내일은 나답게
주르륵 주르륵. 어느 상점 앞 처마는 비를 피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아직까지 처마라는 표현을 써도 무리가 되지 않을 그런 상점이었다. OO슈퍼. ‘아직까지 슈퍼가 존재하다니. 인사동에나 있으면 딱 어울릴 분위기인데. 건너편 XX편의점이 있는데도 생존해 있는 게 대단해.’ 하지만 할인도 되고 2+1을 지나 1+1에, 적립까지 가능한 편의점 앞에는 서지 못했다. 처마가 없었기 때문이다. 매장 안은 고객천국인데 매장 밖은 이렇게나 고객에게 냉담하다니 싶었다.
8월 초의 하늘은 역시나 변덕스럽다. 늘 갈팡질팡하는 내 마음 못지않은 변덕이어라. 후텁지근한 날씨가 하루 종일 이어지는 듯하다가 땅바닥에서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것이 무섭게 얼른 빗방울이 폭우처럼 쏟아진다. 100미터를 인간 총알 속도로 달리는 우사인 볼트처럼 시원하게도 바닥에 내려 꽂는다. 주르륵 주르륵은 후두둑 후두둑으로 바뀐 지 오래이다.
그런데 5분이나 지났을까. 언제 그랬냐는 듯 비는 야속하게 저 멀리 도망가 버리고, 양산 들고 나온 새색시마냥 햇볕이 들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건물마다 숨어 있다가 튀어나온 좀비 떼들처럼 모두가 스멀스멀 길가를 채우기 시작했다. 이제는 처마에서 벗어났으니 감사의 마음으로 슈퍼에서 음료수라도 하나 사면 되었을 텐데,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갈 때 마음이 다른 인간의 본성 때문인지 지척의 편의점에서 2+1으로 파는 탄산음료를 산다. ‘아,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던가. 인간은 이렇게나 간사한 동물인 것을. 어차피 2+1은 하나 말고는 제대로 마시지도 못하는데 굳이 왜 이런 바보 같은 선택을 하는 건인지.’
알면서도 늘 당한다. 마음의 문을 밀치고 들어오는 합법적 사기꾼을 이겨내지 못하는 나 스스로를 탓할 뿐이다. 갑자기 체격이 우락부락한 분들이 터지기 일보 직전의 민소매 티셔츠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편의점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온다. 그리 크지 않은 편의점인지라 두 사람이 지나가기에도 빠듯하다 못해 불가능할 듯싶었다. 그냥 피해 다녀야 했다.
저러한 체격들은 무엇을 사러오는 것일까. 역시나 싶었다. 샐러드, 삶은 계란, 그리고 프로틴바. 교과서를 들여다보고 있는 심정이었다. 어차피 다 아는 것이긴 하지만 볼 때마다 새롭다. 몸매는 운동도 중요하지만 식단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숱하게 운동책을 들여다보고, 유튜브를 시청하고, 헬스클럽 코치들에게 물어봤으면서도 참 안 길러지지 않는 습관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평일 운동을 거르고 있었다. 헬스클럽도 자주 이용하지 못해 요가매트도 사고, 푸시업바도 사고 하면서 나름 홈트레이닝을 해보겠다고 스스로에게 부던히 깐족거렸다. ‘유튜브 보고, 책 보고, <맨즈헬스> 같은 잡지 보고 그러면 돈도 아끼고 시간도 아끼고 그럴 수 있겠네.’ 물론 시중에는 홈트레이닝을 위한 책들이 수두룩했다. 건강 코너에는 흠트레이닝 운동을 위한 다양한 방법의 책들이 우락부락한 몸매 못지않은 자태로 일렬종대로 서 있었다. 아니다 일렬횡대이던가. 여하튼 그렇게 서 있었다.
나는 운동을 좋아하지만 미쳐 있지는 않나봅니다
오늘도 일이 꽤 있었다. 작가라고 해서, 뮤지션이라고 해서 대낮에는 놀고 밤에만 글을 쓰거나 곡을 연습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저녁형 인간이거나 심야형 인간이 되지 못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꽤나 오랫동안 직장인으로 살지 않았던가. 그러다 보니 그러한 방식이 몸에 습관처럼 배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방식이 편했다. 하루키처럼 나도 정시에 러닝을 하고, 밥을 먹고, 책상 앞에 앉는 것처럼 규칙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역시나 저녁에는 더없이 피곤하다. 신체시간도 즉각 눈치를 챈다. ‘낮에 일을 많이 하셨으니, 저녁에는 충분한 휴식이 필요합니다.’ 비가 오기 하루 전부터 관절염이 도진다는 인간 기상관측소인 할머니, 할아버지들 못지않은 정확성을 자랑한다. 수백 억 기상 관측 슈퍼컴퓨터 갖다버리고 전국에 할머니, 할아버지들 100명만 모시면 날씨 웬만큼은 파악할 수 있다고 외치는 그러한 정확성 말이다.
그러니 나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준다. ‘오늘 고생했으니 내일부터 홈트 해도 상관없어. 충분히 열심히 하루를 보냈잖아.’ 눈앞에 요가매트도 보이고 푸시업바도 보이는데 그렇게 스스로에게 변명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리고 땀을 흘리면 피곤한 몸을 이끌고 또 샤워를 해야 하는 것도 스트레스이다. ‘내가 샤워하는 기계도 아니고 몇 번이나 샤워하면 너무 피곤해. 정말 피곤해. 매우 피곤해.’
오늘의 홈트도 결국 물 건너가는 것일까. 편의점 우락부락이들을 보고서 마음 다 잡고 스스로에게 파이팅을 100번은 외쳤을 듯한데 왜 나는 이렇게 다시금 지극히 현실적인 보통 인간으로 변해버린 것일까. 사실 나는 변한 것이 아니라 그냥 보통 인간이다. 하기 싫은 것은 정말 하고 싶지 않은 그런 보통이다. 뭘 굳이 다른 변명을 하겠는가.
그러면서 스스로를 다시금 달래본다. ‘살 좀 찌면 어때. 회사 내 부장들처럼 올챙이배는 아직 아니니까 괜찮아.’ 와우, 스스로에게 이렇게나 커다란 위로의 선물을 건넨다. 천국에 계신 신께서도 이처럼 너그럽게 나를 이해해주시진 못하실 것이다. 두 번째로 다시금 나를 다독여본다. ‘내일부터 하지 뭐. 오늘은 피곤하니까 쉬고, 내일은 집에 일찍 올 테니 그때 시작하지.’ 과연 될까? 저녁 먹고 나서 노곤해지면 유튜브를 보다가 책을 읽다가 고양이 세수 찔끔하다가 샤워는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나를 발견하고서 다시금 이렇게 구시렁거릴지도 모른다. ‘괜히 홈트 한다고 다짐했나. 그냥 헬스클럽이나 다시 끊을 걸 말이다. 돈 아까워서라도 나갈 건데.’ 이렇게 나를 합리화한다. 우와, 나는 정말 변명에 관해서는 최고의 현실 심리 전문가라 인정해줘도 문제없을 것이다. 학위만 없을뿐더러. 변명과 자기합리화가 거의 예술의 경지에 다다른다.
사실 한창 홈트 열풍일 때도 돈 아낄 겸 시간 절약할 겸 하는 일타쌍피, 일석이조,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이건 아닌가?) 뭐 그러한 생각으로 기본 장비들도 샀었다. 역시나 운동은 장비빨 아니던가. 그런데 집에서 운동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았다. 옷은 파라다이스급으로 여유롭게 입고 있으니 천근만근 몸이 늘어지고 움직임 자체가 더없이 둔해졌다. 울랄라를 외치는 짱구마냥 다른 걸 하는 것이 더 재미있기도 했다. ‘운동은 왠 운동. 이 늦은 시각에.’
결국 굿바이 홈트를 외칠 수밖에 없었다. 작심삼일이라고 할 것도 없다. 시작조차 하지 않았으니. 아, 나는 홈트와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란 말인가. 정말로 잊고 싶은 마음이다. 그렇게 나의 홈트 결심은 해보지도 못한 채 언제나 다짐만 하다가 끝난다. 그런데 그러고 나서도 나를 지극히 합리화한다. ‘그래, 난 홈트랑을 거리가 멀어. 내일은 꼭 헬스클럽 가서 등록해야지. 1년 회원권이 싸니까 그걸로 끊어서 제대로 운동해야지.’
솔직히 고백하자면 1년 회원권, 전부 다 알차게 쓰지는 못했다. 기간이 많이 남아 있다 보니 역시나 나를 합리화하고, 나를 다시금 다독인다. 헬스클럽이라도 제대로 나가려면 그때 어쩌다 마주친 우락부락이들이라도 만나야겠다. 뭔가 화끈하게 나를 돌아서게 할 계기라도 찾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그러다가 나는 헬스클럽 등록 데스크에 앉아 있고 서류를 작성했으며 카드값은 게눈 감추듯 빛의 속도로 빠져나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