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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광걸 Apr 14. 2020

지구촌 빈곤의 현장에서

서문

 2006년 여름 나는 파키스탄의 라호르(Lahore)에 있었다. 타임지가 그해 선정한 세계 가볼만한 10곳, 그중 한 곳이 라호르에 위치한 카페였다. 그 카페는 구불구불하게 꼬아진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한 층씩 올라갈 때마다 차 마시는 공간으로 이어졌고, 맨 꼭대기 층에는 하늘이 보이는 옥상이었다. 

 ‘뭐 이런 곳이 타임지에 선정될 만한 정도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실내는 옹기종기한 분위기였고, 창밖으로는 천년이 넘는 황갈색의 거대한 모스크의 일부가 보였다. 창밖이라고 해서 유리창이나 창문이 있는 것은 아니고 그저 덩그러니 빈창이었다. 이슬람 사원의 망루가 눈앞에 보이는 곳이어서 느껴지는 정취는 좀 남달랐다. 그 정취가 타임지 기자에게 어떤 영감을 주어서 세계 핫 스폿(hot spot) 10곳 중 한 곳으로 선정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만약 저녁이라면 초승달이 걸린 망루를 볼 수 있을 터이고, 이슬람 국가들의 국기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그 모습을 실제 현장에서 목도할 수도 있을 터였다.     

라호르 모스크의 저녁 풍광(파키스탄)

 라호르는 유적이 깊은 고대 도시이다. 칭기즈칸의 후예들이 한 동안 지배했던 무굴제국의 중심 도시 중 하나였다. 펀자브 주의 주도로서 인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이 천년의 도시가 아열대 지역임을 일깨워주는 듯, 섭씨 40도가 넘는 기온에 땡볕은 쨍쨍 내려 쪄 살갗이 아플 정도였다. 차도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와 함께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기후 충격에 지쳐 허겁지겁 빨려 들 듯 들어간 곳이 그 카페였다. 대낮이어서 이었을까, 그 카페는 한산했다.      

파키스탄 라호르는 펀잡주에 있다(라호르)

 해외 개발원조사업을 추진하면서도 그 나라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장소를 일정 중에 넣는 것도 동행한 전문가들에 대한 배려이자, 개발원조 활동가들이 갖추어야 할 소양 이라고 생각했다. 그날도 쓰레기가 산처럼 무더기로 쌓여있고 악취가 진동하는 쓰레기 처리장을 방문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동행한 환경연구원의 전문가는 우리나라 상암동의 올림픽 공원이 바로 오늘 아침에 본 라호르 쓰레기 적치장과 같은 곳이었다고 말한다. 개도국들은 쌍전 벽해 한 상암동 올림픽 공원의 모습에서 우리나라의 폐기물 처리기술을 배우고 싶어 한다고 했다.     

인간이 만든 것, 도시는 항상 완전하지 않다.(아프리카 어느 사진작가)

 파키스탄 중앙정부가 외교 채널을 통해 이곳 라호르 도시에서 나오는 각종 고체 폐기물을 친환경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매립장과 처리시설을 건립할 수 있도록 지원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라호르 부시장은 그날 저녁 한국의 전문가 일행을 위해 만찬을 내겠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우리는 그가 정한 만찬 시간이 저녁 9시라는 것을 알고, 조금은 황당했다. 왜냐하면 며칠간 현지 방문을 위해 아침부터 차량 이동 등 일정이 빡빡했고, 낮에 더위로 지쳐있었기 때문이었다. 9시까지 저녁식사를 하지 않고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에 차라리 점심을 내지, 하는 생각이 스쳤다. 드레스코드에 맞춰 오라는 말에 한편으로는 현지 식사에 대한 기대에 들떠 있었다.     


 전문가들은 카페에 앉아 사업 현장에 대해 자신들의 식견과 판단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다.  나는 서울에서 함께 떠나온 전문가들과 함께 고체폐기물 처리장 건립의 종합 계획에 관해 협의를 계속하였다. 그리고 앞으로의 일정과 다음날 파키스탄 측과 협의를 위해 필요한 사항, 그리고 당장의 만찬 행사에서 부시장과 어떤 말을 나눌 지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메모하고 있었다. 나의 시선은 창문으로 향했고, 특별한 생각 없이 길가를 보게 되었다.     

 창밖 넘어서 보이는 일상은 흔한 풍경이었다. 낡은 차와 신형 도요타 SUV가 달리는 차도, 정리되지 않고 오래된 낡은 모습들, 그런데 로터리로 접어드는 오르막길에 짐을 한 가득 싣고 가는 수레가 눈에 들어왔다. 그 짐수레는 매우 천천히 움직여 오르막을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 수레를 끄는 사람이 허리가 꾸부정하고 바싹 마른 노인이라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순간, 나는 충격에 잠시 ‘멍’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에 매우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우리와 다른 삶의 방식과 지혜는 때로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앙코르왓트)

 더운 지방에도 저렇게 근면히 일하고 있구나, 그런데 이 나라는 왜 이렇게 가난하지?, 누구의 책임인가?, 그 노인의 개인적 문제일까?, 집안 대대로의 문제일까?, 사회적 문제일까?, 정치인들의 부정부패 때문일까?, 미국의 경제제재 때문일까?, 이 나라 경제학자들과 관료들의 처방은 무엇일까? 등등...     

 그리고, 내가 하는 개발원조 사업이 진정 가난한 사람들의 빈곤을 해결해 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고, 그것이 이후 13년 넘게 내 직업의 화두가 될 줄은 그때는 미처 몰랐다. 그리고 명확한 해법이 아니라, 나 스스로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대답을 찾는 것조차도 얼마나 어렵고, 지난한 일인지 미처 몰랐다.     


 캠브리지 대학 교수인 제러드 다이아몬드 박사가 파푸아 뉴기니에서 얄리라는 사람으로부터 운명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25년이 지나서 그 대답으로 집필한 책이 바로 <총 균 쇠>이다. 그의 지인이었던 얄리는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당신네 백인들은 그렇게 많은 화물을 발전시켜 뉴기니까지 가져왔는데, 어째서 우리 흑인들은 그런 화물들을 만들지 못한 겁니까?”

바보밥 나무는 우리에게 무언의 말을 건넨다 (가나 북부)

 이름 모를 라호르의 한 노인이 힘겹게 내딛는 한걸음, 한걸음의 노동은 내게는 얄리의 질문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더욱 강하게 내 뇌리에 각인되었다. ‘국가는 어떻게 해야 부강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내게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삶의 근본적인 질문 이상으로, 쉽게 답할 수 없는 무게를 가진 화두가 되었다.      

아르빌 시내 고가도로 건설,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 시절 지원했다 (이라크 북부)

 그때로부터 13년이 지난, 그리고 내가 개발원조 분야에서 종사한 지 3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그나마 어렴풋이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아니 정리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책은 라호르에서 영감처럼 받았던 ‘빈곤과 국가’라는 화두를 해결하기 위한 고민과 사색의 여정이고, 현장의 르포이기도 하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스스로 팽팽한 긴장감을 갖고 쓰려했다. 개발현장에서의 개인적이고 미시적인 경험들이 일반화의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이 한줄기였다면, 또 다른 한 줄기는 보통사람들이 쉽게 경험하지 못하는 빈곤과 개발원조 현장의 생생한 경험을 가치 있게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반화의 오류를 회피하면서 실증주의에 기초해야 한다는 생각, 주관과 객관을 넘나드는 통찰력 사이에서 나의 기록이 흥미 있고 생각할 거리를 주는 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아프리카 가나 사람들, 그리고 남태평양의 파푸아 뉴기니 사람들, 필리핀 사람들, 이라크의 쿠르드 사람들, 그밖에 내가 만났던 지구촌 사람들의 대부분은 1960년대만 해도 우리보다 훨씬 잘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보다 더 영향력이 있었고 인정받던 나라였다. 그러나 부모세대가 잘못한 까닭에 자손들이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국제사회에서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우리도 얼마 전까지 그러했으니 남의 일이라고 치부해서는 안 된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의 자그마한 공장에서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일하는 그들 모습에서 나는 과거 우리의 자화상이 함께 떠오른다. 그리고 지구촌의 빈곤은 우리 대한민국에게 내리는 ‘항상 깨어있으라’는 죽비(竹蓖)이자, 엄한 경고이며, 채찍질일 수 있다. 그간 대한민국이 이룩해온 경제적 발전과 사회적 성취에 자랑스러워하되 겸손해 하자

아르빌 북부 어느 담벼락, '태권도'라는 글자는 쓴걸까? 그린걸까?

 지금까지 나의 직업적 화두에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등불처럼 안내해준 책과 다양한 글, 그리고 내가 만났던 사람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하고 싶다. 여기까지 도달한 나의 생각은 앞으로 쓰는 글을 디딤돌로 계속 전진하려 한다. 많은 질책과 응원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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