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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광걸 Jun 04. 2020

빅 픽쳐는 누가 그리는가?

-원조산업(Aid Industry)은 어디서부터?

 영화 <풀몬티(full monty)>는 영국의 대처수상 시절 실업자로 내몰린 6명의 아저씨들이 돈을 벌기 위해 ‘홀딱 벗는(full monty)’ 스트립쇼를 한다는 사회 고발성의 블랙 코미디 영화다. 영국에서는 <쥬라기 공원>의 기록을 깼을 정도로 흥행에도 성공했다. 우리나라의 양극화 문제를 극명하게 보여준 영화 <기생충>은 유럽의 오스카상, 미국의 아카데미 상을 휩쓸며 세계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풀몬티가 상영된 지 20여년이 지난 해인 2019년 영화 <기생충>이 제기하는 양극화 문제는 더 이상 풀몬티에서처럼 ‘낭만적(?)’이지가 않다. 

 영화 <기생충>은 빈부의 양극단에 처해있는 가정들을 대비하고 있지만, 이 영화가 전 세계적으로 선풍을 끄는 이유는 양극화 문제가 더 이상 특정 국가,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시스템의 문제라는 데에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 아닐까? 2015년 9월 전 세계는 한 아이의 사망 사진에 공분을 느꼈다. 3살난 시리아 난민 아이의 시신이 터키 해변가에 홀로 떠내려 온 사진이었다. 죽음과 맞바꾼 ‘고향으로부터의 탈출, 엑소더스’였다. 난민문제는 테러, 양극화 문제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양극화는 테러를 키우는 숙주이고, 테러를 피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난민의 길을 택하기 때문이다. 테러, 난민, 양극화는 비극의 트라이앵글이다.      


 오늘날 세계경제는 어떻게 형성되었고 작동되고 있는가? 개도국의 우등생, 대한민국은 우리만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는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1997년 IMF의 위기를 겪으면서 미국화폐인 달러의 가치를 새삼스러이 깨닫게 되었다. 미국 달러는 언제부터 다른 나라 경제의 운명을 가를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나?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신흥 대국으로 급성장하였다. 그것은 유럽을 중심으로 전 세계가 두번에 걸쳐 전쟁의 도가니에 빠져있는 동안, 막바지까지 중립을 지키던 미국이 당시 전황의 균형을 깨면서 최종 승전국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신생국이었던 미국은 세계 최대의 채권국으로 떠올랐고 영국을 대신하여 세계 금융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국제관계에서 어부지리(漁父之利)의 고사를 떠오르게 하는 사례는 인류역사에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미국은 국제관계의 조정자로서 다양한 국제기구를 출범시키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다. 예를 들어 전쟁으로 피폐해진 유럽지역의 재건과 부흥을 위해 IBRD(국제재건개발은행)를 출범시켰고, 빈곤국에 돈을 빌려주는 세계은행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어 미국은 국제무역의 활성화를 위한 통화문제를 해결하고, 한 나라의 통화정책에 문제가 다른 나라로 불똥이 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영국, 프랑스 등과 함께 IMF를 만들었다. 이어 세계 무역질서를 재편하기 위해 GATT와 WTO 체제를 구축하였다. 전후 대폭으로 확대되어온 무역을 뒷받침하기 위해 상품무역의 대가로 치러야 하는 금(gold)을 대신하여 종이 지폐인 미국의 달러가 이를 대체할 수 있도록 금본위체제를 폐기하고 달러로 대체하는 국제시스템을 구축하였다. 이때 미국의 달러는 금 보유량에 비례하여 발행될 것으로 국제사회는 기대하였다. 그러나 닉슨 행정부는 달러를 금으로 바꿔줄 수 없다는 금 불태환 선언을 하였다. 이어서 사우디아라비아에 석유의 수출대금을 달러로만 받게 함으로써 페트로 달러(petro-dollar) 체제를 구축하였다.     


 이처럼 세계 무역질서와 화폐경제 시스템을 구축해온 사람들은 소위 서양의 선진국들이다. 그들이 세계 무역 질서의 빅 픽쳐(Big Picture)를 그려온 것이다. 우리나라가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면서 이제 선진국에 진입했다고 기뻐했던 것도 이런 세계 경제 질서 형성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데 있었다. 그렇다고 세계질서 형성이 국제기구나 지역기구 혹은 공식적인 양자 관계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고, 때로는 비공식적인 양자 관계에서 결정되기도 한다. 그래서 국제정세 파악과 이에 대처하는 외교가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조선말 이에 대한 뼈저린 반면교사의 역사를 갖고 있다. 개발원조는 한 국가의 중요한 전략적 수단이지만, 이를 제대로 인식하고 활용하고 있는지, 진정 의문이 든다.      


 세계 경제 질서는 그 태동 이래로 꾸준히 변화했다. 정확히 말하면 선진국들이 주도하는 경제 질서와 정책 기조가 변경되어 왔다. 그 이면에 선진국들의 이해관계가 깊이 투영되어 있다. 새로운 조류에 적응하지 못하면 약소국들은 적지 않은 피해를 보게 된다. 개도국이 아무리 빈곤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더라도 강대국과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순간 물거품이 되곤한다. 「세계의 절반은 왜 굶주리는가」에서 쟝 지글러는 부르키나파소의 혁신정치가인 토마스 상카라(Thomas Sankara)의 죽음과 프랑스 정부와의 갈등을 설득력있게 묘사하고 있다. 개도국의 경제사회 개발을 위한 노력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지정학적인 한계를 잘 인식하고 수시로 급변하는 국제사회의 조류를 잘 활용해야 한다. 이것이 ‘한강의 기적’을 이룬 비결중 하나다. 우리나라가 이룬 경제발전과 민주화에 관해 여러 가지 설명이 있고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도 있지만, 우리나라 경제개발이 성공한 데는 유능하고 헌신적인 공무원 집단과 효율적인 시스템이 한몫했으며, 민주주의 정착에는 야당과 시민사회의 끊임없는 감시와 비판적 시각을 제공한 공을 부인할 수 없다.      


 캠브리지 대학의 장하준 교수의 명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7가지」에는 선진국들이 실제 경제발전에 성공해온 성공경로와 그들이 후진국에게 말하는 성공을 위한 웅변이 얼마나 다른지 역사적 현장에 있는 듯이 자세하고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다. 큰 그림을 그려온 ‘그들’은 짐짓 모른 채 진실을 숨기고 어떻게 하면 자신들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고 이익을 극대화할 것인지에 대해 집중하고 있다. 자유주의와 시장경제주의를 말하면서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에서 끝없이 경쟁할 것을 요구하고 이미 쟁취한 독과점적 지위를 지속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이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은 비단 주류 시장경제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2004년 쓰나미가 태국, 스리랑카 등 동남아시아를 습격했다. 전 세계가 해저 지진으로 인한 해일 피해의 심각성을 새삼스러이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당시 코이카의 재난복구를 담당하는 부서의 담당자로서 피해현장을 방문하였다. 스리랑카의 쓰나미 피해 복구를 지원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스리랑카 측과 협의하고 적정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기 위하여서였다. 우리를 맞이한 카운터파트는 스리랑카의 기획재정을 담당하는 부서의 과장이었다. 재난복구를 위해 당장에 필요한 국내외 재원을 동원하고 이를 배분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부처가 앞장서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스리랑카 재정부의 담당과장은 우리에게 커다랗고 두툼한 재난복구 마스터플랜 책자에서 3장을 찢어 주는 것이었다. A3크기의 각 장에는 피해지역과 필요한 복구사업의 개요, 소요 경비규모, 사업기간 등이 담겨 있었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빠른 시기에 이런 복구계획이 나올 수 있지?’하고 놀래는 순간, 청사진 아래에 명기된 USAID의 로고에 다시 한번 놀랐다. 미국의 원조기관인 USAID가 이미 스리랑카 전국을 커버하는 쓰나미 복구계획을 수립해 주었던 것이다. 그 복구계획을 담은 청사진에는 미국출신의 개발경제학자, 사회학자, 보건학자 등 관련 학자들과 다양한 단체들이 협업을 통해 수립됐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었다.     


 아마도 스리랑카측은 자신의 국가개발계획 중에 우선순위가 있는 부분을 USAID 측과 협의하여 반영했으리라 짐작했지만, 미국의 폭넓고 깊은 전문성에 놀랐고 USAID의 네트워킹에 감탄했다. 스리랑카 담당과장에게 USAID는 어떤 프로그램을 제공하기로 했느냐고 물었더니, 교육과 보건과 같은 소프트웨어 부문이라고 했다. 우리는 원조경쟁에서 이미 상당 부분 뒤처져 있었다. 우리나라는 원조를 준다는 시혜적인 시각에서 보다 구체적인 성과를 나타낼 수 있는 프로젝트를 선호했다. 이런 태도는 결국 우리 업체의 발목을 잡는 결과로 이어지곤 했다.      

 스리랑카 측으로부터 받아든 프로젝트는 그 후 우리 업체들에 의해 수년에 걸쳐 시행되었다. 마하나마 교량 개보수사업, 발레체나이 홍수피해방지를 위한 배수시설 설치사업, 그리고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은 함바토타 행정도시 건립사업 등이 그것이다. 무상원조로는 함바토타 국제회의장을 건립하는 사업을 추진하였고, 그 외 행정단지 조성사업은 차관사업으로 진행되었다. 당시 만해도 300만 불이 대개 무상원조로 추진하던 평균치였으나, 동 사업은 평균치의 두 배가 넘었다. 콜롬보로부터 멀었음에도 채택한 이유는 스리랑카측이 당시 집권자의 출신지역이라는 이유를 들어 적극 추천하였던 까닭이었다. 관계자로부터 전해 들은 후일담에 의하면 함바토타 회의장 건축 도중에 암반 지반이 나타나 사업 기간이 연장되었고 예산도 애초보다 훨씬 많이 소요되었다.      


 2017년 7월경 신문을 통해 알게 된 것은 함바토타 항구의 운영권이 스리랑카 정부로부터 중국으로 넘어갔다는 보도였다.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의 하나로 함바토타 항구가 선택된 것이었다. 무엇인지 모를 아쉬움이 마음속에 불쑥 올라왔다. 우리나라의 컨설팅 업계가 미국처럼은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의 비교우위를 살릴 수 있는 원조 컨설팅 부문이 있을 터인데..." 하는 아쉬움이 밀려 온다. 보다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그저 편향적으로 흘러온 일방통행식(스스로 혹은 위로부터)의 원조가 아쉽기만 하다. 우리는 다양한 개발 경험에 기초하여 이런 경험과 지식을 종합하여 하나의 솔루션을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이 아직도 안되는 걸까? 우리의 개발경험과 국제적 개발지식을 패키지화하여 국제 개발 컨설팅으로 시스템화하는 것으로 4조원에 달하는 원조산업(Aid Industry)을 설계해야 하지 아닐까? 지금도 보여주기식의 가시적 산출물에 집착하고, 행사에 방점을 찍는 테이프커팅 원조를 지속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의 원조는 여전히 이미 누군가 그려놓은 큰 그림위에 덧칠이나 하는 수준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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