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푸아뉴기니의 수도는 항구에 접해 있는 포트모르비스(Port Moresby)이다. 남반구에 위치해서 우리나라와는 계절이 정반대이고, 인도네시아와는 국경선이 직선으로 나 있는 곳이다. 온몸에 진흙을 바르고 전투에 나서는 머드맨(mudman)과 같은 호전적인 전사, 그리고 식인의 풍습이 남아있다는 풍문이 있는 곳이다. 이렇게 위험한 곳에 한국인 수녀님들이 실업계 고등학교를 운영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어찌 먼 이곳까지 와서 피부와 언어가 다른 사람들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활동을 하고 계실까? 찾아가 봤다.
산등성이 밑자락에 울타리가 쳐져있는 다소 황량해 보이는 공터에 자그마한 교사(校舍)와 수녀님들의 숙소가 자리잡고 있었다. 학교밖 언덕을 따라 올라가면 마치 달동네처럼 빈민촌마을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 곳이었다. 카리타스 소속 수녀님 4~5명이 실업계 학교 프로그램을 운영중이었다. 가정형편 등의 문제로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아이들을 모아 실용적인 교육을 하고 있었다. 그 아이들을 방치할 경우 강도를 하는 무리로 변하곤 해서 현지에서는 이들을 라스칼(rascal), 악한이라고 했다. 학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시내 다른 학교보다 선생님들이 우수하다고 소문이 났고, 시내 유지의 자녀들이 입학하기 위해 별도로 연락이 오기도 했다. 정식 고등학교로 인증받으면서 입학 경쟁률과 학교의 명성은 더욱 높아갔다. 카리타스 수녀님들은 한사람 한사람 모든 학생들에게 애정을 쏟으며 특별한 공동체를 만들어냈다.
사하라 사막을 따라 아프리카를 횡단하는 사막화된 땅, 그 지역대를 사헬(Sahel)이라 부른다. 부르키나파소는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이남에 있는, 사막화가 진행되는 사헬지역에 있다. 수도인 와가두구(Ouagadougou)는 사막에서 불어오는 북동풍으로 매우 건조했다. 물이 부족한 만큼 전기도 귀한 도시였다. 전력문제는 서아프리카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문제이어서 지역내 전력 공동체를 설치하여 전력 매매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ECOWAS)는 산하에 특별 전문기구로 서아프리카전력풀(WAPP)을 설치했다. ECOWAS 사무국을 방문한 때는 2006년 경이었다. 사무국장은 신장이 2미터에 가까운 거구의 신사였다. 함께 차를 마시는데 마치 ‘어린왕자’속에 나오는 거대한 바오밥 나무아래에서 전설 속의 추장과 이야기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가나에 사는 한국교민인 김만복씨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10여년전 그가 가나 외교부에 일하는 동안 김만복이라는 한국교민의 도움으로 한국을 다녀온 적이 있다고 했다. 지금은 고인이된 김만복씨는 라스팔마스 등 대서양에서 참치 원양어선으로 큰 돈을 벌었다고 한다. 아크라시에 인접한 항구도시인 테마(Tema)에 정착하여 한국인 촌을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인근 아프리카 국가에서 장관직에 있는 지인들은 해외출장을 갈 때면 종종 찾아와 부족한 출장비를 보충했다고 한다. 그의 재력은 엄청났고 주변 한인들이 성공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고 한다. 지금도 아크라 시내에는 김만복씨가 기증한 골프장이 두 군데가 있고 이중 하나는 가나 정부에 기증했다. 이를 기념하듯이 그의 기념비와 흉상이 세워져 있다. 가나 한인사회는 참 따뜻한 느낌이 드는 훈훈한 교민사회였다. 중추절을 맞아 함께 정을 나누던 훈훈한 분위기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날 청명한 하늘에 걸린 보름달은 정겹고 따뜻했다.
중국 통계국에서 근무하던 한국계 중국인인 정운양이라는 분을 만난 때는 2003년 북경에서 였다. 그는 고향이 경상북도라고 했다. 어릴 때 부친을 따라 온 가족이 중국으로 건너왔다고 한다. 한국말을 훨씬 유창하게 하고 중국말, 뿌퉁화(普通話)는 본토 중국인 발음과 다소 달랐다. 그는 한국의 통계기법, 특히 농업통계에 대한 기술이전을 받는데 앞장섰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농촌에 살며 경작과 목축을 하기 때문에 농업통계는 매우 중요한 국가정책 사업이었다. 불규칙한 산출고와 증가하는 곡물 수요량과의 균형을 잡도록 농정을 펼치는데에는 정확한 통계가 중요했다. 그는 종종 한국의 원조사업인 통계기술 이전이 매우 효과적이어서 주룽지 총리가 FAO 총회에서 극찬한 사실이 있다며 자랑스러워 하고, 자신의 업적이라고 자랑했다.
그는 한국사람들이 보건에 있어 매우 우수한 민족이라며, 한국 어머니들의 생활의 지혜가 한족보다 월등하다고 했다. 그는 김치, 된장과 같은 발효음식은 매우 뛰어난 기술로서 이전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던 시대에도 조선족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 이유라고 했다. 그는 국적은 중국이었지만, 말과 골수는 한국사람이었다. 그의 여유로운 웃음과 낙천적인 성품과 자긍심이 높은 기상은 때묻지 않은 한국인의 전형을 보는 느낌을 주었다.
그와 함께 단동으로 출장을 간 일이 있었다. 단동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신의주와 마주보는 곳이다. 6.25 전쟁중 폭파된 압록강 철교, 그 밑 북한 수역에 북한 선박이 정박해 있었다. 이부머리에 작달마한 북한 병사는 웃통을 벗고 세수를 하고 있었다. 다가오는 우리 선박을 보고 쏘아붙이는 눈길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안광은 남달랐다. 정 선생은 북녘쪽 벌거숭이 산을 가르키며 ‘산하가 다 메말랐어...’라고 했다. 그때가 용천역 폭발사고가 있은 지 3달 가량이 지난 후였다. 2004년 4월 남포로 향하던 화물열차가 용천역에서 폭발했다. 역주변으로 반경 500m 모든 건물이 폐허가 될 정도였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열차에 타고 있던 시리아과학연구센터(SSRC) 소속 연구원 12명 전원 사망했고, 화생방 방호복을 착용한 군인들이 잔해를 수거하고 오염방지 약품을 살포했다. 북한이 이란과 시리아와 협력하여 핵 원자로 기술을 이전 중이었고, 이를 탐지한 이스라엘 정보기관(Mossad)이 열차 폭파를 공작했다고 하는 설이 유력하다.
장미회라는 이름을 내가 처음 들은 때는 2000년 이었다. 국내 민간단체들은 이미 해외에 나가 현지에서 의료봉사, 지역개발 활동을 수행했는데, 이들의 활동을 보조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시작한 때였다. 그중 장미회(薔薇會)는 이름부터 특이했다. 1965년 미국 로빈슨 선교사와 유재춘 목사에 의해서 국내 활동을 시작했는데, 우리나라 뇌전증 환자를 위한 목적이 있었다. 가시를 가진 장미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듯이 육체의 가시를 가진 뇌전증인도 잘 치료하면 건강한 사회인으로 복귀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가 담긴 명칭이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학급에 간질로 아픈 친구들이 종종 있었고, 다들 천벌을 받은 병이라고 뒤에서 수근대곤 했다. 그런데, 1960년대 이후 활발히 진행된 역학조사 결과 대부분 간질은 조절이 가능하며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정상 생활을 하는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장미회는 박애정신에 기반을 두고 네팔에서 의료활동을 전개했다. 우리나라가 못살던 시절 받았던 외국의 도움을 이제는 다시 갚기위한 일이었다. 산골마을 언덕배기에 세운 학교에서 인근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고 의료봉사 활동을 했다. 장미회는 네팔에서 조그마한 활동으로 시작하였으나, 나중에 코이카의 의료 프로젝트를 직접 수행하며 활동 폭을 넓혔다. 그 핵심에 김명호 박사님이 계셨다. 네팔 박타푸르지역에서 의료봉사와 의술을 가르치던 김명호 박사님은 지긋하신 나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열악한 현지에서 열정적으로 봉사하셨다. 그리고 의료인으로서 빈곤한 지역에 나가 노후에 봉사하는 모습은 소위 ‘코이카를 다닌다’는 내게 열정과 겸손함을 무언중 가르쳐 주었다. 후일 내가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보건대학 교수께서 김 박사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고는 더욱 존경의 마음이 일었다. 지금은 지방 어느 양로원에 계신다는 말을 들으니 웬지 인생의 덧없음이 느껴진다. 부디 건강하시기를 손꼽아 빈다.
우리나라는 최근 세계에서 인정받는 사람들이 많이 배출되고 있다. 대중적 스타덤을 갖고 있는 베트남의 박항서 축구감독, 손흥민 축구선수, 김연아 피겨스케이터, 미국 LPGA를 휩쓸고 있는 한국의 젊은 골퍼들은 참으로 대단하다. 이들은 그 영광을 위해 참기 힘든 극기훈련을 견디어 냈다. 피와 땀이 일구어낸 결과는 참 아름다웁다. 한편 연예인과 같이 대중적 인기는 없을지 모르지만, 존경하고 흠모할 수 있는 어른들이 우리 주변에 의외로 많다. 남들이 선호하지 않는 음지에서 봉사하고 열정으로 문제를 해결해주는 따뜻한 심성의 소유자들이 바로 우리 사회를 끌고 가는 분들이 아닐까? 내가 미처 소개하지 못한 분들이 더 많다. 언론은 소위 ‘장사’가 되지 않기 때문인지 이런 분들에 대해 언론이 주목하지 않지만, 우리는 이런 분들을 좀더 많이 알고 싶다.
우리나라에 이태석 신부를 기리는 혹은 국제적으로 그의 이름을 내건 다양한 사회활동과 원조 프로그램이 왜 없는지 모르겠다. 우리 한국을 바라보는 세계인들을 향해 우리는 어떤 책임감을 가져야 할까? 어떤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까? 이제 우리사회는 갈등을 조장하고 분열을 부추키는 일은 접고 보다 성숙한 사회로 발돋음해야 나아가야 한다.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 데에만 우리나라 국민총생산의 1/4가량이 소모되고 있다고 한다. 애써 농사지어 추수한 쌀의 25%가 썩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우리만의 세계에 빠져 있을 것이 아니라, 우리를 바라보는 세계가 인식하고 인류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다.
보편적 인류애를 실천했거나 희망을 줄 수 있는 한국인을 발굴하고 알린다면 선순환의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 그런 사회의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우리 모두의 각성이 필요하다. 어떤 이유에서건 고향을 떠나 이국 땅에서 보란 듯이 성공하고 남모르게 선행을 베푸는 사람들, 험지에서 사회적 약자를 보살피고 키우는 일을 하시는 사람들, 자신이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정체성을 잃지 않는 사람들, 우리 주변에는 자랑스러운 한국인들이 많이 있다. 이제 한국인은 세계에 기여하는 길을 생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