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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광걸 May 24. 2020

유럽에서 한달간 살아보면 어떨까?

 나는 직업상 해외 근무가 잦았다. 어떤 사람은 부러워할지 모르겠다, “좋겠다. 해외여행을 다니는 거네.”라면서... 그렇다 처음엔 나도 그런 생각에 들떴다. 그런데 말라리아, 댕기열, 폭염에다 전기가 수시로 들어오지 않고, 어떤 때는 전국적으로 블랙아웃(blackout) 상황이 펼쳐지는 험지에서 생활해야 한다면 어떨까? 오지 탐험여행과는 분명 다른 느낌이 들 것이다.     


 2008년 4월 초 미얀마의 대표 도시 양곤은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되었다. 나르기스라는 사이클론이 미얀마 새벽을 강타해서 약 120만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거의 100여 년 만에 처음 겪는 규모라고 했다. 그 속도가 120MPH, 즉 시속 190킬로미터의 폭풍우였으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강도였다. 폭풍우가 예년과 다르게 아드리안 해안에 접하고 있는 이라와디 지역에 들이닥친 것이다. 미처 준비하지 못했기에 피해가 더욱 컸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시내를 푸르게 덮고 있던 키 큰 아름드리 거목들이 맥없이 여기저기 나가 떨어져 있었다. 도로 한복판에 서로 부둥켜 안 듯 어지럽게 쌓여 있는 나무도 있었다. 그 모습은 처참했다. 자연이 스스로를 자해한 느낌이었다. 

나르기스호 싸이클론으로 기와장이 날아간 양곤시내 아파트

 당시 초등학교 1,4학년인 두 딸들은 이사 온 지 한 달 만에 인생 최대의 사건을 엄마와 함께 겪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도시는 지옥이었다. 15층 아파트에 물도 나오지 않고, 전기스토브도 쓰지 못했다. 희미한 촛불에 의지해서 온 집 안의 물건을 찾아 다녔다.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해 계단으로 물을 길어 올려야 했다. 그런데 하필 그때 가장인 나는 지방 출장 중이었다. 지금도 그 때 일을 생각하면 아내와 두 딸에게 미안했던 마음의 상처가 석양빛 그림자처럼 길게 드리워진다.      


 아프리카는 헐벗음과 궁핍, 맹수들이 뛰노는 사파리를 연상케 한다. 서부 아프리카는 유엔 등 국제사회가 빈곤 퇴치를 위해 중점적으로 노력을 기울이는 지역이기도 하다. 근래 유명세를 타고 있는 예능인 샘 오취리의 나라, 가나도 서부 아프리카에 위치해 있다. 2010년 새천년개발목표(MDG)의 이행을 점검하기 위해 전 세계 지도자들이 우리나라 부산에 모여 회의를 가졌던 적이 있다. 그 직전의 회의가 가나의 수도 아크라(Acrra)에서 열렸었다. 당시 유명한 아크라 행동계획(Accra Action Agenda)이 발표되고 세계 빈곤 퇴치를 위한 행동강령이 발표되기도 했던 곳이다. 

 그 곳으로 식구들과 함께 떠난 때는 2012년이다. 영국 런던에서 올림픽이 개최되던 해였다. 그런데 항공 일정상 영국을 경유해야 했고 2일간 더 체류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호텔은 풀 부킹이었고 가격은 엄두를 못 낼 정도였다.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숙박료가 2~3배 폭등했던 것이다. 다행히도 우리는 한인 민박집을 숙소로 잡을 수 있었다. 올림픽 경기 관람은 언감생심(心)이었다. 빈곤의 대명사, 아프리카로 들어가는 시험대였다고나 할까? 모든 게 풍요 속의 빈곤이었다. 그때 초라한 마음은 오히려 나만의 느낌이었는지 모른다. 그래도 좋았던 것은 새가 지저귀는 인근 공원에서 영국 사람들이 반려견을 데리고 산책하는 평화로운 모습과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른 아침에 신선하고 깨끗한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곳이었다. 투명한 햇살이 따뜻하게 얼굴을 비추었다. 이런 기억들은 '유럽에서 한 달간 살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들게 했다.

     

하늘이 보이는 창은 꿈을 꾸게 한다

 아프리카 가나에 도착한 이후 나는 두 딸아이의 학교 진학과 등하교 문제, 흑인사회에 처음 정착하는 문제로 문화충격(culture shock)을 겪었다. 그러다 한 달여 만에 과로와 저항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말라리아에 걸렸다. 파란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나는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남편을 보며 아내는 얼마나 불안한 마음이었을까. 그 다음 해 본부 회의 차 잠시 귀국해 건강검진을 받았다. 얼마 후 아크라 사무실에 있는 내게 이메일로 검진 결과가 통보되었다. 머릿속에 물혹이 있다. 커지게 되면 시야가 좁아지고 심하면 시력을 잃을 수도 있다, 라는 의사의 진단이었다. 남편을 따라 개도국에서 생활하며 마음고생이 심했던 탓인지 아내는 갑상선암 진단을 받았고, 건강체질이어서 쉽게 지칠 줄 모르던 아내는 수술 후 무척이나 피곤해했다. 그러다 갱년기인 오십 줄에 접어들었다. 큰딸의 대입을 준비하고 작은딸의 사춘기를 함께 겪어야 했다. 업무에 대한 열정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해온 내게 어느 덧 인생의 이모작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내는 가끔 해외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한다. 그중에서 가장 행복했던 기억으로 얼굴이 밝아지고 목소리가 다소 들뜨는 곳은 짧은 기간 머물렀던 경유지들이다. 런던 복스빌역 근처에 있던 작은 공원, 이스탄불의 멋진 소피아 성당과 호르무즈해협에 위치한 크고 작은 카페들, 암스테르담 강가에 위치한 안나의 집, 방콕에서 치앙마아리가는 침대열차 등...



 '유럽 한달 살아보기'를 한다면, 먼저 동․서독 통일의 현장을 가 볼 것이다. 아마도 그들의 인내와 지혜를 배울 것이다. 홀로코스트의 위령탑을 가 볼 것이다. 희생자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할 것이다. 비엔나 어느 카페에서 식구들과 함께 아인슈페너 한 잔을 마시고, 클림트의 작품 <키스>를 감상하며, 오스트리아 제국의 멸망에 대해서 배워 볼 것이다. 아름답게 수놓인 각종 조각품들을 도슨트의 설명을 들으며 감상하고, 트램을 타고 시내를 굽이굽이 다니며 차창 밖 풍경과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볼 것이다. 프라하의 야경을 감상하며 걷다가, 그리 작지도 크지도 않은 배를 탈 것이다. 운이 좋으면 검은 하늘에 무지개를 그리는 불꽃놀이 쇼를 아내와 포도주를 건배하면서 볼 것이다. 옆에서 끊이지 않는 두 딸들의 수다와 깔깔대는 높은 음표자리의 웃음소리를 귀와 가슴에 깊이 새길 것이다. 항상 신께 깊이 감사해하고, 어느 공동체라도 의미있는 보탬이 되는 그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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