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나라들의 도시는 대부분 치안이 불안하다. 도시에서 치안이 불안하다는 사실은 거주민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행동을 제약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경제발전에 필요한 국내저축을 보충할 수 있는 외국인의 투자를 유치하기 어렵다. 설혹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더라도 자본회수를 보장하기 어려우니 현지 정보에 취약한 외국인으로서는 막대한 자본 진출을 꺼린다. 자본의 속성상 당연하다. 국가 재정이 허약하니 사회기반시설에 대한 투자가 빈약하다. 악순환 속에 빈곤의 늪은 깊어진다.
분주한 시내 (다카)
선진국 도시에서 생활하던 외국인이 빈곤국에서 생활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애로사항이 많고 불편하다. 2014년도의 미얀마, 그리고 2017년도의 이라크 아르빌 지역에는 서울에서 보기 쉬운 맥도널드 햄버거 혹은 스타벅스 커피점이 없다. 토머스 L. 프리드먼(Thomas L. Friedman)은 그의 저서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에서 ‘맥도널드 가게가 있는 나라에서는 중산층이 형성되는 까닭에 전쟁의 위험이 감소한다’고 했다. 물론 유고사태로 프리드먼의 주장은 일부 타격을 받았다. 그렇지만 미얀마는 군부가 물러나고 민정으로 이양된 후인 2017년 맥도널드와 스타벅스 커피점이 개장됐다. 그리고 미국의 군사적 지원을 받으며 IS와 전쟁 중인 이라크 아르빌(Erbil)에는 개점되지 않았으니, 그의 통찰은 일정부분 유효하다고 해야 할까?
나이키이고 싶은...(아르빌)
외국인으로서 먹거리를 현지 조달할 때 싱싱한 열대과일, 채소, 그리고 방사해서 키운 계란을 구하려면 현지 시장을 가야 한다. 현지인과 말을 주고받으며 어느 정도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라도 간단한 현지어를 배우는 것이 좋다. 사정이 이러하니 현지인 여성을 가정부 즉, 메이드(maid)로 채용하여 도움을 받곤 한다. 메이드들의 연령대는 이십 대에서 오십 대까지 다양하다. 대부분 시골에서 상경했거나 혹은 도시에서 어렵게 살며 가족의 생활을 책임지는 사람들이다.
대개 지인들의 소개받아 인연을 맺게되는 메이드들과의 인연은 특별하다. 왜냐하면, 자연스럽게 그들과 일상생활을 공유하기 때문이다.장보는 것 외에도 식사할 때, 차를 마시며 휴식을 취할 때에도 생활 일부를 그들과 함께 한다. 오랜만에 외식할 경우, 주말에 차량으로 이동할 때도 외국인에게 위험한 지역을 알려주거나 혹은 현지 생활의 꿀팁을 알려주는 사람은 메이드와 운전기사이다. 그들을 통해 현지인들의 생활과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이렇듯 신변안전과 생활편의의 상당 부분을 그들에게 의지하기 때문에 떠나온 후에도 오래 기억에 남는다.
북경(北京)에 있을 때 연길지방 출신의 조선족 동포 아주머니가 우리 가족을 도와주었다. 2003년 큰 딸이 유치원에 다닐 나이였고, 메이드는 나이가 60대를 바라보고 있어서 어린 두 딸을 손주처럼 귀여워했다. 반년 정도가 흘러서 설을 맞아 고향에 갈 때가 되었다. 일주일간의 휴가를 내어 북경역에서 기차를 타고 고향인 연길로 향했다. 2주 정도가 지난 후 돌아올 날이 됐지만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종종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도시 생활이 힘들어 돌아오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어오던 터였다. ‘그래도 연락 한번 없이 그렇게 인연을 끊을 분이 아닌데….’, 하는 생각에 좀 더 기다리자고 애 엄마와 얘기를 나누었다. 새로운 사람을 맞이한다 해도 서로가 적응해야 하고 함께 생활한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북경의 첫 나들이(북경)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 전화가 왔다. 방금 고향에 도착했다고 한다. 사연인즉, 열차를 타고 가는 도중에 사스(SARS) 의심 환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그러자 열차가 외딴 곳에 도착해서 일주일 정도를 꼼짝없이 잡혀 있었다는 것이었다. 전화기도 압수당해서 아무에게도 연락할 수 없었다고 했다. 모든 승객이 허스레한 창고들이 줄지어 선 곳에 나누어져 검사결과가 나올 때까지 감금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북경에서 사스 의심 환자가 나오면 해당 구역은 출입을 완전 통제하고 정해진 곳으로만 출입이 가능했던 것이 생각났다. 통제사회는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주머니 역시 우리와 연락할 방법이 없어, ‘혹시 일자리를 잃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했다고 한다.
중국 우한(무한)에서 발생한 코로나 팬데믹(pandemic) 상황을 접하면서 사스(SARS)이상 가는 통제가 있으리라 짐작했다. 2003년 사스와 2008년 북경올림픽을 통해 중국의 보건위생 환경은 몰라보게 좋아졌다. 그러나 전염병을 최초로 고발한 의사들은 잊혀졌다. 사스의 심각성을 폭로한 해방군 301병원의 장옌융(蔣彦永) 교수와 코로나 발병을 최초로 폭로한 리원량(李文亮) 의사가 그들이다. 아마도 공산당이 휘슬 블로우어(whistle blower)의 등장을 두려워 했기 때문이리라. 요번 코로나19사태로 인해 우리는 시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질병 통제와 인권, 민주주의 수호라는 두 가치가 이율배반(trade-off)적인 관계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궁핍의 피해자들은 이래저래 마음이 편안치 못하다. 권력, 강제력과 같은 거역할 수 없는 그림자에 위축된 마음으로 살아가고, 채 인식하지도 못하는 압박감에 스스로 속박당하고 있다. 그들이 사회 고발자로 혹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될 때 마음의 빗장을 풀고 궁핍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을까? 노벨경제학자인 아마르티아 센(Amartya K. Sen)은 빈곤이 단순히 돈이 없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개발은 인간이 누리는 진정한 자유를 확대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강변의 빈민촌(지구촌의 어느곳)
미얀마에 있는 동안 우리 가족을 도와준 메이드는 시골 출신으로 30세 초반의 젊은 여성이었다. 당시 현지 사정을 생각하면 노처녀였지만, 메이리(Mayli)는 나이와 달리 무척이나 수줍음을 타서 10년 이상은 어리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손재주가 뛰어났고 기억력도 비상했다. 특히 한국 음식을 조리하는 방법에 대해 매우 관심이 많았다. 한 번만이라도 알려주면 제대로 맛을 내었다. 나는 그녀의 음식 솜씨와 기억력을 보면서 미얀마가 저력 있는 나라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마도 식당을 차렸다면 지금쯤 그녀는 단골손님으로 붐비는 맛집 사장이 되었을 것이리라.
고마운 손(미얀마)
하루는 메이리가 한식 조리법을 그려놓은 종이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집사람으로부터 들었다. 빈곤과 꿈, 삶에 대해 나는 다시 곰곰이 생각했다. 당시 미얀마가 여성들에게 보다 열린 사회였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충분한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였다면, 그리고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는 용기를 꺾지 않는 사회 분위기였다면 어땠을까? 메이리는 좁은 골방에서 홀로 무엇을 꿈꾸었을까? 재능이 남달랐지만 기회가 주어지지 못한 참 아까운 젊은이였다. 그런데 어디 메이리뿐 이겠는가, 개도국에는 재능이 번뜩이는 사람들이 참 많다. 궁핍의 피해자들은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기회조차 제대로 얻지 못한다. 궁핍은 인간이 더욱 더 성장할 기회를 가로막는다.
필리핀은 1970년대만 해도 아시아의 맹주였다. 국빈방문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마르코스(Ferdinand E. E. Marcos) 대통령과 환담을 위해 수십 분을 기다려야 했고, 공항으로 이어진 고속도로를 달리며 대한민국에 이런 도로를 놓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고 한다. 필리핀은 그 후 정치인들의 잘못된 국정 운영과 부정부패로 인해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1996년 초에 필리핀대학(UP)에서 만난 박사과정의 이지적인 여학생은 자신의 꿈은 외국으로 나가는 것이라고 했다. 필리핀에서는 7대 패밀리에 끼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푸념했다. 대기업, 쇼핑몰은 물론이고 가수, 연예인들 대부분이 7대 가문 출신이라는 것이다. 필리핀 사람들은 영어를 잘한다. 자신들의 말인 타갈로그(tagalog)어가 있지만, 일반인들도 영어신문을 읽고 영어로 말하는 데 불편함을 못 느끼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필리핀 여성, 즉 필리피나(Philippina)들은 전 세계로 나가 간호사와 가정부로 일하고 있다. 그렇게 해외로 파견나간 필리핀 출신의 근로자는 540만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물과 먹거리를 짊어지고 가는 여인(아프리카 어느 나라)
내가 이라크 아르빌에서 만났던 델리아(Delia)는 20대 딸이 있는 40대 중반의 필리핀 여성이었다. 한국 음식을 곧잘 했는데, 현지 진출한 한국 건설사에서 일했다고 한다. 그 건설사가 철수하면서 일 잘하고 영어소통이 되는 델리아를 한국 사람들에게 소개해주었다 한다. 그녀는 고향을 떠나 중동지역에서 일한 지 거의 10년이 되었다. 필리핀은 90% 이상이 가톨릭 신자인데, 타 종교에 매우 배타적인 이슬람 국가에서 생활하는 것이 매우 불편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리핀 신문에는 종종 해외에 나가 일하는 근로자들의 학대사례가 보도되곤 한다. 특히 종교적으로 배타적인 중동지역에서 가정부로 일하는 필리피나가 학대당한 일이 보도되어 두 국가 간 외교 문제로 비화하기도 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필리핀을 떠나와, 고향 일로일로(Iloilo)에 있는 딸과 카톡(Kakaotalk)으로 통화하는 델리아를 발견하면, 빈곤에 시달리던 60~70년대 우리나라 사람들이 떠오른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해외에 나가면 홀대당하기 쉽다. 일반국민이든 공무원이든 매한가지이다. 60~70년대 우리나라 외교관들의 비망록을 보면 빈국의 설움이 절절히 묻어난다.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이역만리 타국에서 광부로, 간호사로 어렵고 힘들게 일해 가족을 부양하고 국가 공동체 발전에 기여하고자 구슬땀을 흘렸던 역사적 경험이 우리에게 생생히 남아있다. 일자리를 찾아 용케도 해외 근로자로 나갔지만, 어눌한 독일어, 영어로 인해 자신의 의사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서 어떤 때는 웃음거리가 되었을지 모를 우리 아버지, 할머니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대통령궁 옆 빈민촌(아순시온)
궁핍의 피해자들은 해외에 나가면 보이지 않는 편견과 멸시를 받는다. 궁핍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제와 오늘이 따로 있지 않다. 어떤 나라에 대한 편협한 선입관은 한 개인을 인간으로서가 아닌, 그 나라의 빈곤과 무지를 상징하는 대표로 인식한다. 우리나라는 한 세대 만에 이룩한 고속 압축 성장으로 단기간에 빈곤으로부터 탈피했다. 한국 사람을 보는 시선이 짧은 시간에 급격히 바뀌었다. 김치는 혐오식품에서 건강식품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드라마, 노래, 화장품 등은 한류라는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경제 규모에 비해 내수가 약하고, 수출 비중이 높은 까닭에 외부충격에 상당히 취약한 구조를 안고 있다. 한때 풍요롭게 살았던, 그러나 취약한 경제구조를 가진 나라가 한순간에 빈곤과 치안 부재의 나락에 떨어진 사례가 지구 역사상에 한둘이 아니다. 우리가 과거와 형식에 매달려 갈등과 분쟁에 휘말린다면, 이는 후세에게 큰 죄를 짓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조선말의 역사가 그러하지 않은가. 자신들의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다면, 역사의 비극은 되풀이된다. 우리와 자손들의 미래를 역사에서 엿볼 수 있다. 지구촌 궁핍의 피해자에게 우리 역사와 자화상을 비추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