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은 인류 역사이래 함께 해 온 사회적 난제(wicked problem)다. 빈곤을 다루는 학자들은 대개 일정 수준이하의 절대적 빈곤과 남과 비교하여 느끼는 상대적 빈곤을 기준으로 대책을 제시하곤 한다. 근래 지구적 문제중 하나가 양극화 문제이다. 양극화는 상대적 빈곤이 너무 현격해 사회에 위협이 되고 있기 때문에 특히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런데 개인의 삶을 추적해 보면 선진국, 후진국 할 것없이 공통적으로 겪는 빈곤이 하나 더 있다. 개인이 과거와 비교하여 급격히 더 빈곤해진 상황에 처해지는 경우다. 이것은 개인의 심리에 미치는 영향이 절대적이고 사회 공동체 형성에 적지 않은 걸림돌이 된다. 이런 빈곤에 떨어진 사람은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자신의 처지를 적극 말하지 않는다. ‘침묵의 빈곤(poverty of silence)’이다. 얼핏 보면 잘 살아가는 것 처럼 보인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파고속에 심각해져온 양극화와 함께 반드시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침묵의 빈곤’이다. 침묵의 빈곤감은 무기력과 함께 분노를 동반하는 까닭에 사회가 귀기울여야 한다.
2000년 새천년개발목표(MDGs) 체제하에서 주요한 키워드는 하루 1불 미만의 절대빈곤층을 절반으로 줄이자는 것이었다. 중국의 경제 약진으로 인해 세계 빈곤층이 대폭 감소했지만,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지역의 빈곤층은 오히려 늘어났다. 지구상에 ‘밑바닥 생활을 하고 있는 10억 인구(bottom billion)’을 대상으로 빈곤문제에 관해 혁명적인 대안을 제시한 폴 콜리어(Paul Collier)교수는 절대적 빈곤에 관해 다루었다. 일반 개도국으로 불리는 나라와 달리 아프리카에 있는 말라위, 시에라레온, 에티오피아는 물론, 아이티, 아프가니스탄, 방글라데시, 미얀마, 북한 등에 거주하고 있는 국민들이 4가지 덫, 즉 ‘분쟁’, ‘천연자원’, ‘나쁜 통치’, ‘나쁜 이웃을 둔 내륙국가’라고 하는 빈곤의 덫에 걸려 있다고 했다. 필요한 경우 군사력을 개입해서 세계경제의 주변부로 밀려나고 있는 절대빈곤 10억 인구를 구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빈곤의 악순환’에 빠져드는 민초들의 삶은 절망적이다. 폴 교수는 대학시절 인연으로 니아살랜드라는 나라를 방문하는 개인적 경험을 통해 절대빈곤을 간접적으로 체험했다. 그 나라는 후에 국가명칭을 말라위로 바꾸었지만, 생활은 35년전보다 나아진 것이 없었다. ‘만일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2003년 북경에는 코이카 사무소가 있었다. 운전기사는 북경 토박이 출신, 즉 라오베이찡런(老北京人)이었다. 그에게는 북경대 체육대학에 다니는 딸이 있었고, 자신이 북경 토박이라는 것에 매우 자부심이 강했다. 지방사람이 북경에 주거하려면 까다로운 절차 등으로 인해 어려웠다. 북경에 산다는 것을 다소 특권으로 여겼다. 그때만해도 법적으로 자녀를 하나만 낳을 수 있어서 자녀에 대한 애정과 열정은 우리네보다 더하면 더할 것이다. 그래서 어린 손자를 샤오황띠(小皇帝)라고 한다. 부모와 양가 조부모댁을 포함하면 6사람이 한 아이를 왕처럼 떠받들고 보살피니 이런 칭호가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 한 자녀 원칙은 2015년 4월부터 폐기되었지만, 그전에도 예외 규정이 있어서 재력이 있는 사람은 외국에 나가 출산하고 들어오곤 했다. 헤이쯔(黑子)라고하여 부모가 출생신고를 하지 못해 주민증이 없이 지내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라오리(老李)는 종종 북경이 예전보다 살기 어려워졌다고 했다. 전에는 모두 다 가난하고 어려웠는데, 언제부터인지 빈부차가 많이 생겨 지방사람들이 북경에 들어와 자신들보다도 잘 산다는 것이었다. 남과 비교하여 자신이 가난하다고 느끼는 빈곤감, 상대적 빈곤은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며 사회에 대한 불만이 쌓인다.
우리나라 40대 초반, 그리고 그의 부모 세대인 60대 중후반은 어쩌면 위와 같은 절대적 빈곤과 상대적 빈곤을 모두 경험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시절 어느날 하루아침에 회사 구조조정으로 인해 일자리를 잃거나 파산하여 길거리에 나앉아야 했다. 그때 대학입학을 앞둔 고3 학생은 아버지의 실직으로 인해 엄청난 힘든 시기를 보내야했을 것이다. 불과 몇 개월 전만하더라도 부모와 함께 외식을 즐기며 행복한 시절을 보냈던 것이 마치 꿈같이 느껴졌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빈곤과 박탈의 감정, ‘침묵의 빈곤(poverty of silence)’은 무기력과 분노를 동반한다. 만약 재수생으로 대학을 준비하고 있다가 학비를 낼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경우에는 비록 절대적 빈곤 수준은 아니더라도 혹은, 상대적 빈곤계층이 아니더라도 그 정신적 충격은 엄청났을 것이다. 그 충격은 ‘국가가 나를 보호해 줄 수 있나?’라는 의문을 들게 했을 것이다.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동네 마당은 물론 안방까지 들어온 신자유주의는 그 사회 구성원들에게 빈곤을 강요했다. 국가는 마치 무능력자인양, 세월호의 학생을 구하지 못했고, 천안함에서 순직한 군인을 남의 일처럼 여기려 했다.
영화 <기생충>이 세계적인 명화로 인정받고 국민들의 공감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사회와 지구촌의 양극화만을 이야기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서울대 가짜 재학증서를 들고 과외선생 면접을 보러 나가는 아들에게 배우 송강호는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라며 웃는다. 그리고 사건이 터진후에 아들이 묻는다.
"아빠가 갖고 있다는 생각이 뭐예요?"
"무계획." 그리고 배우 송강호는 계획이 없이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이로움을 설명한다. 무계획은 무기력에서 나오고, 무기력은 계속된 실패에 기인한다. 송강호도 사업에 계속 실패했다. 대만 카스테라 가게 등 골목상권에 투자했다가 계속 실패를 맛보고는 반지하 방에서 살고 있다.
벼룩은 자신의 키에 수십배에 달하는 높이를 뛴다. 그러나 병 속에 넣고 뚜껑을 닿아두면, 뚜껑에 계속해서 받혀, 나중에는 뚜껑을 열어 놓아도 병을 넘지 못한다고 한다. 코끼리도 어릴 때부터 자그마한 쇠고리에 발목을 채워 놓으면, 커서는 충분히 깨부술 약한 고리임에도 불구하고 쇠고리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다. 이 모두가 무기력이 훈련된 결과이다. 실패를 강요하는 사회, 그 속에 사는 현대인들, IMF를 겪은 한국사람들에게 무의식중에 훈련된 무기력의 일면이 보인다. 침묵의 빈곤은 무기력속에 피어난 분노의 감정이 분출할 때는 활화산처럼 폭발한다. 마치<기생충>의 송강호가 그랬던 것 처럼... 그가 지하 방에서 외부와 부단히 소통하고자 하는 몸부림은 '침묵의 빈곤(poverty of silence)'이라는 덫에서 벗어나려는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들린다.
개인의 역사적 심리에 기한 빈곤감은 사회적 안전망이 제대로 구비되지 못한 개발도상국 시민들에게는 더욱 크다. 이라크 바그다드(Baghdad)에서 만난 청소부 소싼은 수입이 변변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소비욕구를 억제하지 못했다. 아들을 하나 둔 그녀는 전쟁통에 남편을 잃은 전쟁과부였다. 20대 초반에 남편을 만나 제법 여유로운 생활을 했다 한다. 전쟁전에 산유국인 이라크는 국민들에게 적지않은 돈을 지급했다. 지금은 남편이름으로 나오던 국가 연금도 재정문제로 일부만 지급된다고 했다. 그녀는 가끔 사무직 직원과 격한 갈등을 벌이곤 했는데, 숨은 이유는 이전과 확연히 달라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서였다. 너무 깊은 수렁텅이에 빠졌다고 생각해 새로운 꿈을 갖는 것을 어렵게 느꼈다.
개도국은 대부분 위험에 대비할 수 있는 보험제도가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다. 건강보험이나, 금융 서비스와 정부의 사회적 안전망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 혹시라도 예상치 못한 위험이 발생하면 다시 빈곤의 늪으로 빠지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이라크에 사는 시민들은 대부분 비슷한 경험을 했으리라. 돈이 많은 사람들은 두바이 등 인근 중동국가에서 산다고 했다. 바그다드, 아르빌에 남아있는 사람들도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고 싶어하고, 나이키와 같은 브랜드의 스포츠 용품을 입고 싶어한다. 여건이 허락하지 않으니 대리 소비욕을 충족하기 위해 짝퉁 브랜드가 나돈다.
파푸아뉴기니에 부임하여 처음으로 사무소 운전수를 선발할 때였다. 존(John)은 한눈에 보기에도 운전을 직업으로 할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존은 솔로몬 아일랜드(Solomon Island)에서 작은 공장을 했다고 한다. 내전이 일어나 가산을 모두 버리고 황급히 빠져 나왔다. 그는 아들과 단둘이 살고 있었는데, 전쟁통에 아내를 잃었다고 했다. 그의 박탈감과 느끼는 빈곤감은 그저 상대적 빈곤이나 절대적 빈곤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격차는 마치 크레바스(crevasse)처럼 그 깊은 늪의 깊이를 알 수 없다.
개발도상국가에 두뇌유입이 어려운 이유도 다시 빈곤의 늪으로 빠지기 쉬운 고국으로 돌아가기 싫기 때문이다. 1970년대 미국에서 공부한 우수한 인재들이 우리나라로 돌아와 국가 재건과 경제사회 발전에 기여한 것은 당시 정부의 혁신적인 대우조건도 일조를 했을 것이다. 개인의 과거 역사적 빈곤의 감정을 잊지 않았지만, 그보다는 앞으로의 비전과 희망, 그리고 애국심이 또한 작용했으리라. 그러니 우리 사회가 함께 잘살 수 있는 공동체로서 지속적으로 발전하며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절대적 빈곤층을 위한 사회안전망을 구축하고, 상대적 빈곤을 완화하기 위한 재분배 정책을 효과적으로 실행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개인의 역사적 빈곤감을 벗어날 수 있게 재기와 도전을 높이 평가하고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는 사회분위기와 지원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야 한다. 그래야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풍요로움의 그늘, 침묵의 빈곤과 양극화가 극복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