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가나(Ghana)와 인도차이나반도에 있는 미얀마(Myanmar)는 모두 평균기온이 높고, 계절은 건기와 우기로 나뉜다. 비가 적은 건기에는 서늘하기도 하지만, 비가 많은 우기에는 무척이나 덥다. 가나는 대서양을, 미얀마는 인도양을 접하고 있어서 대체로 습하다. 그러나 가나의 수도 아크라(Accra)에서 내륙에 있는 고대도시인 타말레(Tamale) 정도만 올라가도 기후가 건조하여 코안이 바싹 마른다. 사하라 사막 지역에 가까이 왔다는 뜻이다.
말라리아 감염지역(WHO)
두 나라의 공통점은 말라리아 감염지역이라는 점이다. 말라리아는 평생 면역이 생기지않는 재발성 질병(recurrent disease)이고, 후유증이 심하다. 말라리아는 에볼라나 코로나-19와 같은 바이러스성 전염병이 아니다. 말라리아 모기가 우리 몸을 물면 모기 침샘에 있던 말라리아 원충이 혈액으로 침입한다. 원충은 사람의 간으로 들어가 잠복하며 성장하다가 일정 단계가 되면 혈액의 적혈구를 파괴하기 시작한다. 이때 우리 몸은 발열, 오한, 두통과 같은 증상이 나타난다. 말라리아 모기에 물렸더라도 신체 면역력이 강한 상태라면 그래도 치명상을 피해갈 수 있다.
국제기구와의 협업(타말레, 가나)
가나는 영어가 공용어인 까닭에 개발 NGO들이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다. 우리나라 민간단체들도 교통편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적지않게 활동하고 있다. 대개 직항편이 있는 미국에 적을 두거나 혹은 단기간 활동하는 형태이다. 그 중 어느 한국 NGO 단체가 파견한 청년이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죽음의 문턱에 까지 갔던 사례가 있었다. 그 청년활동가는 말라리아에 감염된줄 모르고 있다가 어느날 아침 혼수상태가 되었다. 그를 발견한 현지 동료가 시내에 있는 군인병원에 옮겼고 말라리아임을 확진받았다. 그런데, 현지 동료는 현금이 없었다. 현지 시스템은 병원 진료후 약은 별도로 사야했기에 또 다시 몇시간 동안 투약을 하지 못했다. 그의 상태는 급속히 악화되었다. 이후 가나에서는 치료가 불가능하여 남아공화국으로 이송해야 할 정도가 되었다.
가나 병원수가(아크라)
문제는 후송 항공편 요금만 3억원 가량이 소요되었는데, 파견 단체는 SOS와 같은 후송 보험에 가입하지 않았던 것이다. 부모들은 안절부절이었다. 미국 유학까지 보낸 젊은 아들을 잃게 될 처지였다. 코이카 의료전문가로 나와있던 닥터 한이라는 전문의가 도움을 줄 일이 없을까하여 병원을 방문하고 그의 상태를 가까이 관찰했다. 닥터 한은 모든 장기가 그렇게까지 급속도로 악화되는 것은 처음 보았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그 청년은 가까스로 후송되어 특별치료를 받은 덕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말라리아는 실기(失期)하면 정말 끔찍한 병이다.
프랑스 원조기관인 AFD(Agence Française de Développement)의 가나 사무소 브루노(Bruno Leclerc) 소장은 내게 최근에 일어난 일이라며, 비극적인 사례를 얘기해 주었다. 그는 가나에서 활동 중인 원조기관장들의 모임인, 공여국 회의를 주관하는 입장이었고, 나는 새로 부임하여 그에게 많은 것을 물으며 현지사정을 알아가는 중이었다. 마침 그의 사무소는 필자가 출퇴근하는 길목에 있었고, 사전에 전화를 하면 흔쾌히 맞아 주었다. 그가 얘기한 농업전문가는 아프리카 출장을 수십번이나 다니며 현지 경험이 풍부하다고 했다. 아크라에서 컨설팅을 끝내고 베냉으로 출장가 있던 중 말라리아 증상이 나타났다. 귀국 일정중 부르키나파소를 들렸는데 갑자기 쇼크가 와서 바로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말라리아 유충이 뇌로 들어가 감염을 일으키는 예외적인 상황이 발생했던 것이다. 증상을 자각한지 일주일도 채 않되는 기간이었다.
단독파 시장(베냉)
아프리카에서 항공편도 흔하고 지리적으로도 가까운 프랑스였다. 그러할진대 우리나라 전문가들을 생각하면 끔찍했다. 그 말을 듣기 전에는 전문가들이 가나에서 활동하고 출국할 때 말라리아 검사를 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만일에 대비하여 서울에 말라리아 비상약품과 진단키트를 예비용으로 보냈다. 귀국 후 발병하는 사례가 간혹 있었기에 말라리아 약을 출국 선물로 드렸다. 말라리아 초기증상은 출장 여독과 비슷해서 투약 시기를 놓치기 쉬웠다. 국내 1,2차 병원에서 말라리아로 진단받고 약을 처방받기 까지는 며칠이 소요되어 제때 투약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는 이미 말라리아 박멸을 선언한 까닭에 열대성 말라리아 약은 몇몇 특정병원에서만 구할 수 있었다. 동부와 서부 아프리카 지역에서 약효가 있는 말라리아 약도 제각각이었다.
우리나라 농업 전문가도 말라리아로 인해 귀국 후 한 달만에 사망했다는 전갈이 들려왔다. 그 분은 우리나라 공기관에 농업전문가로 일하다 퇴사한 분이었다. 은퇴후 노년에 봉사활동을 한다는 생각으로 가나 현지에 파견되기를 희망했다고 한다. 파견 분야에 전문가이셨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였는지 주변과 연락이 거의 없던 상황이었다. 처음 현지에 정착하려면 수많은 예상치 못한 일들로 과로하기 마련이다. 그 전문가도 한국에서 일하는 것처럼 ‘빨리빨리’ 주말에 휴식도 취하지 못한 채 열심히 일하셨다고 한다. 잠시 귀국했던 그는 말라리아 증상을 여독으로 오인하고 제때 치료를 못했다. 말라리아가 간을 숙주삼아 성장하다가 적혈구를 파괴할 단계에서는 우리 몸이 급속히 악화된다. 말라리아 발병이 의심될 때 바로 약을 먹으면 치료할 수 있다. 하루이틀이라도 때를 놓치면 매우 어려운 상태로 진전되는 참 무서운 병이다.
말라리아 모기(the Conversation)
파푸아뉴기니(PNG, Papua New Guini)의 수도 포트모르비스(Portmoresby)에서 만났던 선교사 부부는 초면에도 선한 심성이 전해지는 성실한 분들이었다. 내륙 고산지대의 어느 마을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마을마다 종족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다. PNG는 약 800여족의 종족이 약 700여개에 달하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며 원시부락 공동체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 곳이다. 계속 새로운 종족과 언어가 발견되고 있기에 정확한 통계를 낼 수 없다. 선교사 부부가 하는 일은 성경을 현지어로 번역하는 일이다. 같은 종족이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마을인 ‘빌리지’에서 원주민들과 함께 살면서 언어와 풍습을 배운다고 했다. 언어는 있지만 문자가 없어서 그들의 언어를 문자화하고 성경을 번역하는 일은 평생의 과업이다. 그해 호주 선교사 한분이 현지어로 번역한 성경책을 안고 찍은 사진 기사가 신문에 보도된 적이 있다. 평생의 과업을 완수하고 60세가 넘어 귀향한다는 보도였다.
김 목사 부인은 가장 힘든 일이 자녀 교육, 그리고 말라리아라고 했다. 김 목사는 수차례 말라리아에 걸린 후 언어장애까지 생긴 적이 있다고 했다. 선교사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어찌 되겠는가. 그때도 말이 어눌해서 기도말씀을 김목사 부인이 대신했다. 말라리아에 걸리면 아프기도 하지만 무기력해지고, 그후로 저항력을 유지하기 위해 과로하지 않는다고 한다. 한국에서처럼 ‘빨리빨리’ 일을 추진하는 방식은 말라리아 감염을 일으키는 현지 풍토에 맞지 않는다. 열대사람들이 게으르고 느리다는 인식은 열대 기후와 현지 풍토에 순응해 살아온 현지인들의 생존의 지혜를 몰각한 무지의 탓일 수 있다. 선교사 부부는 싱가포르에서 현지적응 훈련을 몇 개월간 받고 아이들과 함께 사역의 길을 걷기 시작한지 10년이 넘었다. 지금 목사 부부는 은퇴하였을 것이다. 그곳에 계속 살고 있을지 아니면 한국으로 돌아왔는지 모르겠으나, 그와 가족의 희생과 업적이 그가 평생 사역한 사람들 가슴에 길이 기억되었으면 한다.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아프리카 속담, 가나 해변)
해외 여행이 많이 보편화되면서 현지에서 발생할지 모르는 만일의 사태를 간과하는 무책임한 모습을 종종 발견한다. 세계화는 곧 지역화에서 시작한다. 방문하려는 지역에 관해 잘 알아야 풍토병, 문화충격, 향수병을 극복할 수 있고, 현지인들과 잘 지낼 수 있다. 말라리아는 모기를 매개체로 전염되므로 모기에 물리지 않으면 피할 수 있겠지만, 막상 말라리아 발병지를 돌아다니게 되면 예방책이 마땅치 않다. 해외여행이나 해외 출장간다는 기분에 들떠 현지에서의 위험을 간과하면 바로 응징하는 것이 자연이다. 자연 앞에서 그리고, 생명이 걸린 상황에서는 겸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