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를 열은 포르투갈은 인도항로를 개척함으로써 세계제국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중동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동양의 물품을 인도항로를 개척함으로써 막대한 부를 누렸다. 처음에는 포르투갈과 교역에 관심이 없던 인도사람들의 마음을 돌리게 한 것은 다름아닌 총과 대포였다. 이른바 ‘대항해시대’는 식민지 경영을 일삼은 제국주의의 전초병 역할을 했다. 아프리카 대륙의 서쪽에 있는 가나(Ghana)는 유럽인들이 뱃길로 접근하기 쉬운 위치에 있었다. 황금을 많이 얻을 수 있는 기니아만(Gulf of Guinea)을 ‘골드코스트(gold coast)’, 가나와 국경선을 접하고 있는 국가인 코트디브와르(cote d’ivore)는 상아해변 즉, ‘아이보리 코스트(ivory coast)’로 불렀다.
2009년 7월 가나는 전세계의 이목을 받았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인 오바마 대통령이 아버지의 나라인 케냐를 대신하여 가나를 방문했다. 아프리카에서는 드물게 평화적인 선거로 정권교체를 이룩한 국가가 가나였다. 무엇보다도 17세기 아프리카 최대의 노예무역 시장이었던 가나, 그 중에서도 노예성의 원형이 보존된 케이프코스트 성(Cape Coast Castle)은 흑인 대통령으로서는 당연히 방문할 만 한 곳이고, 역사적 의의와 메세지를 담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어린 두 딸을 포함하여 가족과 함께 노예성을 방문한 오바마 대통령은 담담하게 말했다.
“노예제도는 홀로코스트(holocaust)에 비유할 만큼 끔찍한 역사다.”
“후손들에게 역사적 교훈으로 가르쳐야 한다”
가나정부는 오바마 대통령과 미셸 영부인이 함께 지하감옥의 문벽에 방문기념패를 새겨 넣도록 준비했다. 수백년전 노예로 잡혀온 흑인들은 ‘돌아올 수 없는 문(Door of No Return)’ 밖을 나서면 영원히 고향과 가족들과 생이별을 해야했다. 수백년이 지난 후 살아 돌아온 자손들은 그 문의 바깥쪽에 ‘귀환의 문(Door of Return)’이라는 문패를 붙여 놓았다. 오바마는 “아프리카의 후손인 내 어린 두 딸이 한때는 ‘돌아올 수 없는 문’을 걸어 다닌 오늘을 잊지 않을 것”이라며, 인간의 악행과 과욕이 역사의 거울에 남아 어떻게 자신들을 부끄럽게 비추는지 일깨워줬다. 그 문의 반대편에는 노예성의 정문으로 대리석에 아래 문구가 새겨있었다.
“영원한 기억속에
우리 선조들의 비통함이 스며 있는.
죽은 이들은 평화로이 안식할 것을.
돌아온 자들은 자신들의 뿌리를 찾을 것을.
인간이 다시는 인간성에 반하는 그와 같은 불의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우리, 살아있는 자들은, 이것을 지켜나갈 것을 맹세한다.”
노예성은 성 전체가 하얀색으로 칠해져 있다. 파란 바다를 배경으로 새하얗게 둘러싸인 성은 마치 무슨 동화 같은 분위기를 연상케 하지만, 노예들의 검은 피부색과 대비되어 노예들의 탈출이나 외부로부터의 구출작전에 대비하기 위한 보호색(?)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 지하에는 노예로 잡혀온 흑인들을 강제 수용했던 지하감옥(dungeon)이 있다. 좁은 굴을 따라 내려간 곳은 노예들이 처음 잡혀 왔을 때 수용하던 감방이었다. 그러나 사실 감방이라 할 수도 없었다. 숨이 턱 막혀왔다.
‘인간이 이처럼 잔혹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처절한 느낌이 들었다. 그곳은 인간의 지옥이었다. 영화 <빠삐용, Papillon>이 머리를 스쳐갔다. 죄인도 아닌 사람을 감금한 점에서 비슷했다. 악마섬(île du Diable)에 있었던 기아나(Guyane) 감옥은 1953년 폐쇄될 때까지 100년간 수많은 사람을 정치범이라는 프레임에 엮어 그들의 자유와 목숨을 앗았다. 그래도 <빠삐용>에 나오는 죽음의 교도소는 오히려 인간적이었다.
바닥은 다소 질퍽질퍽했고, 비스듬한 땅바닥에는 작지 않은 고랑들이 밭 전(田)모양으로 패어 있었다. 별도의 화장실이 없어서 노예들은 구석에 대소변을 보았고 위에서 물을 내려주어야 밖으로 오물을 배출했다고 한다. 잡혀온 노예들이 많을 때에는 바닥에 제대로 눕지도 못했다고 한다. 이 곳에 잡혀온 흑인들은 먹거리를 위해 사냥 나왔거나, 남에게 빚을 많이 져서 혹은 부족간 전쟁에 패해 백인 혹은 흑인들에게 붙잡혀 졸지에 노예처지가 된 것이었다. 이런 노예 성이 아프리카 서해안에 수 십 개가 있었으며, 약 천만 명의 흑인들이 노예로 팔려 나갔다.
섭씨 40도씨가 넘는 바깥날씨와 달리 감방시설은 서늘했다. 방 한가운데 서서 자그마한 돌 틈으로 보이는 해변가를 보니, 흑인들의 억울하고 분통해하는 원한이 전해져 오는 듯했다. 노예로 잡혀온 첫날에 발작하듯이 저항하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그들의 힘은 엄청났지만, 체계적이고 잔혹한 시스템에 그들은 결국 이곳에서 미쳐 죽거나 자포자기해야 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무기력증에 빠지고 저항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게 동물처럼 억류되었다가 어느 정도 길들여지면 지상에 있는 감방으로 옮겨졌으나 발목에는 여전히 쇠사슬이 채워져 있었다.
길게는 한 달정도 억류되어 있다가 햇볕을 보는 때는 바로 ‘돌아올 수 없는 문(Door of No Return)’으로 나서는 날이다. ‘돌아올 수 없는 문’은 해변가로 이어져 정박한 배로 연결되었다. 포승 줄에 묶인 채로 다시는 살아 돌아오지 못할,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를 곳으로 떠난 것이다.
성의 맨 윗 층에 오르기 위해서는 회오리 모양의 계단을 거쳐 올라가야 했다. 그 곳에는 멋진 바다 풍광이 한 폭의 그림처럼 창문 밖으로 펼쳐지는 방이 있었고, 이곳에는 당시 성주와 그의 부인이 살았다고 한다. 당시 신부는 ‘지하에 있는 노예들의 삶이 곧 지옥이고, 맨 위층에 있는 부인의 삶이 천국에서의 삶’이라며, ‘회개하고 성경의 말씀을 따르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성직자들조차도 흑인을 사람으로 보지 않은 듯하다. 그 젊은 부인은 말라리아에 걸려 죽어 고향에 가지도 못한 채 성내 묘지에 묻혔다.
노예성은 삼각무역(triangular trade)의 중심축이기도 했다. 케이프코스트 성 내부 자그마하게 꾸며놓은 기록관에는 노예를 중심으로 한 당시의 삼각무역을 설명하고 있다. 아프리카인 들의 노예에 관한 역사인식을 엿볼 수 있는 설명문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었다.
‘유럽인들은 아프리카로 공산품을 가져왔고 그 대가로 ‘잡혀온 사람들(captives)’을 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플랜테이션 농장에 데리고 갔다.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수확한 농산물은 유럽으로 가져갔고, 이러한 순환은 계속되었다. 공산품과 황금, 총과 노예를 매개로 한 무역은 대서양을 접하고 있는 대륙, 즉 아프리카, 유럽, 남북 아메리카에 있는 유럽의 식민지들이었다. 거의 400여 년에 걸쳐 대서양 무역은 아프리카에서 미국 대륙으로 대규모의 인구 이동에 불을 지폈다. 서구 유럽과 미국 대륙의 막대한 부와 공업적 생산력은 일정부분 이러한 삼각무역의 막대한 이익에 기초하고 있다.’
기실 유럽은 노예를 매개로 한 삼각무역*을 통해 막대한 은화와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즉,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얻어 그 대가로 아프리카인들에게는 유럽의 총, 술, 옷감, 담배, 비즈(색유리로 만든 장식품) 등을 건네 주었다. 특히 총은 더 많은 노예를 확보하는데 유리하게 활용되었다. 유럽인들은 노예로 끌려온 흑인들을 아메리카 대륙의 노예시장에서 팔아 그 대가로 아메리카 대륙에서 은(silver)을 얻을 수 있었다. 은(silver)이외에도 플랜테이션 농법을 통해 수확한 커피, 설탕, 옥수수, 토마토 등으로 수입품은 다양해졌다. 노예의 대부분은 플랜테이션(Plantation) 농장에 팔려가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미국 독립전쟁 당시 노예를 반대했던 곳은 면화를 집단적으로 생산하던 남부였다. 영화 <버틀러:대통령의 집사>는 미국 대통령 8명을 모신, 34년간 백악관 집사로서 일했던 유진 앨런(Eugene Allen)의 삶에 기초해서 흑인노예들이 겪었던 삶의 비애를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19세기 제국주의 시절 이러한 무역형태는 영국, 인도와 청 나라를 잇는 삼각무역으로 발전했고, 이런 형식의 삼각무역을 통해 영국은 청나라로 흘러 들어간 은을 회수할 수 있었다. 즉, 영국은 체계적으로 청나라에 아편을 수출하고 은화를 획득하는데 성공했고, 아편이 매개가 된 삼각무역은 결국 전쟁으로 비화되어 영국은 홍콩을 100년간 조차할 수 있었다. 삼각무역은 서구인들이 오늘날의 부를 축적할 수 있는 물적 토대를 마련해준 시스템이었다.
*이런 삼각무역은 증기선이 탄생하기 전에 바람과 해류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대형 범선이 유행하던 시기에 탄생했다. 대항해시대를 연 포르투갈이 세 지역 간의 무역을 사용하였으며, 제국주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노예성의 주인도 바뀌었다. 포르투갈이 1482년에 의해 세워진 성으로 사하라 이남지역에 가장 오래된 유럽의 건축물이다. 이후 스웨덴, 덴마크, 네덜란드를 거치면서 증.개축이 이어져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