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원조를 대가없이 남을 도와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기에 해외원조를 반대하거나 원조의 필요성과 효과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원조를 찬성하는 사람도 막상 지원액을 말하는 단계에 이르면 뒤로 물러나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정책 결정자조차 원조가 일방적이라고 생각하여 정책적 판단을 그르치기도 한다. ODA를 포함한 해외원조 활동이 국가 전략사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성급히 그 국가 전략적 수단을 축소하거나 제거할 필요는 없다. ODA 해외 사무소는 여러 여건에 따라 설치 폐쇄될 수 있겠지만, 대표적인 오해가 중국사무소의 폐쇄라 할 수 있다. 당시 중국은 일인당 GNP 수준이 미화 4,000불을 넘나들던 때였다. 급격히 성장하던 때였지만 국제기구 기준으로 보아도 저중소득국가(LMIC)로 DAC 기준상으로도 ODA를 받는 국가군에 포함돼 있었다. 여전히 도농 간의 격차가 심하여 현지에서의 수요도 컸다.
일본의 JICA 사무소는 2020년 현재도 북경에 사무소를 존치하여 활동 중이며, 환경오염, 전염병, 식량문제에 관해 협력해 오고 있다. 2016년까지는 중국에 대한 신규 지원사업을 발굴하는 등 교류를 지속하고 있다. 중국이 빈곤국에 원조를 제공하는 ‘떠오르는 공여국(emerging donor state)’으로 등장하자 이 부문에 관해서 새로운 사업을 발굴하는 등 교류를 지속하고 있다. 미국조차도 태국에 소재한 USAID의 아시아 지역사무소를 통해 전염병 예방 등 3개 부문의 사업을 전략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특히 티베트의 문화유산 보존과 그들의 생계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은 잘 살기 때문에 원조를 중단해야 한다’는 발상 속에는 그 어떤 심려원모(深慮遠謀)도 찾아볼 수 없다. 우리나라 정부는 중국이라는 거국(巨國)과 인접하고 있는, 분단된 반도 국가로서 어떤 국가전략을 갖고 있을까? 그중 ODA, 공적개발원조는 어떤 수단으로 인식하고 지속 가능한 역할을 하고 있을까? 예컨대 북한 이탈 주민은 주변국가들과 국제사회가 초미의 관심을 두고 있는 난민(refugee)이다. 이들을 지원하는 민간단체의 활동은 인도주의적 측면에서, 그리고 그 활동을 수행하는 한국 국민을 보호한다는 면에서 ODA는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가? 이들 활동을 후원하는 한국 국민은 ODA가 갖고 있는 전략적 활용가치를 이야기하고 있는가?
중국과의 협력사업 내용을 보면 우리에게 오히려 도움이 되는 사업이 대부분이어서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윈윈(win-win) 사업들이었다. 꽃피는 봄이 오면서 찾아오는 불청객은 다름 아닌 황사다. 중국내륙으로부터 불어오는 황사를 관측하기 위하여 우리나라는 중국에 황사 관측과 예측을 위한 시스템을 제공하고 중국 측은 황사 실측 및 예측자료를 실시간으로 우리나라 기상청과 공유하는 사업이었다. 대련, 내몽고, 그리고 멀리 신장성 우루무치(Ürümqi)은 물론 대련 등지로부터 불어오는 황사 정보를 최소한 5~6시간 이상 일찍 파악함으로써 우리나라는 사전에 황사 피해에 대비할 수 있었다. 고도의 정밀성을 요구하는 반도체 생산품의 오류를 줄여 수천억 원 이상의 피해를 예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우리 기업은 우리나라 기상청으로부터 이러한 산업민감성 기상정보를 무료로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 내에서도 공공기관 등은 중국기상청(CMA)로부터 기상정보를 유상으로 구매해야 했다.
봉사단원 파견사업의 경우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다른나라보다 중국에 파견되는 것을 무척 선호했다. 자비로 중국에 유학을 가는 친구들도 있을 정도로 중국에 대한 인기는 급부상했다. 중국 정부 측이 숙소 등을 부담해서 개인 유학경비보다 봉사단원 파견경비가 국가적으로도 더욱 저렴했다. 무엇보다도 꽌씨(關係) 사회인 중국에서 중국 성(城) 정부의 지도층급과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중국에서도 가장 낙후된 서부지역의 칭하이성(靑海省)에서 20대 여성 봉사단원이 유치원에 파견되어 일했던 기억이 새롭다. 처음의 우려와 달리 그녀는 그곳에서 외국인 선생님으로 현지인들로부터 매우 귀하게 대접받고 있었다. 중국 공산당은 요직으로 앉히기 전 지방에서 근무하도록 하는 인사원칙이 있어서 후진타오(Hu Jintao) 전 주석도 칭하이성에서 근무했던 이력이 있다. 한 나라의 공기관에서 일하는 기회를 얻는 것은 개인은 물론 국가적으로도 분명 매력이다. 봉사단원들은 중국 대도시뿐 아니라 각급 성의 주요 도시에 파견된 까닭에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계속 파견되었다면 지금쯤 각 지역 전문가로서 성장했을 것이다.
중국측과의 주요한 사업중 하나는 나무를 심는 조림사업으로서 사막화 방지와 황사예방을 목적으로 하였다. 우리나라 산림청과 중국 임업청 간의 사업을 도와주는 역할을 했다. 하루는 우리나라 수출업체가 포장한 목재에서 해충이 발견되어 전량 회수해야 할 처지였다. 톈진 항에 도착한 컨테이너들은 별도 구역에 특별 관리중이었다. 이에 대해 전문적 판단을 내리는 기관은 다름 아닌 중국의 임업청이었다. 그간 한·중 조림사업을 통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오던 우리나라 대사관은 임업청과 부단히 회의를 가졌고, 매우 예외적으로 원할하게 처리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포장재를 납품한 국내 중소업체는 파산하는 등 재난적 상황에 빠졌을지 모를 일이다.
원조에 대한 철학이 미흡하기에 원조의 전략과 도구가 탄탄히 연계되지 못하고 빈약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다만, 이러한 전략 부재와 엉성함을 인식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 더욱 심각한 일이다. 만약 ‘원조는 공여국의 국익에 부합하면 안 된다’는 인식을 한다면, 그는 허공에 집을 짓는 몽상가일 것이다. 그리고 그 몽상가의 인식 공간은 어쩌면 놀랍게도 무지로 꽉찬 아집, 사익 나아가 권력의 이익이 자리를 꿰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미 비슷한 사례를 경험했다. (만약 우리네 이익에만 충실하면 된다는 사람은 ‘왜 원조해야 하는가’를 보시기를 권한다) 우리에게 국익이란 무엇일까? 대한민국이 추구해야 할 국가의 이익은 무엇인가? 지금부터라도 이에 대한 거대 담론을 시민사회부터 형성해 나가야 한다.
필리핀은 1970년대만해도 아시아의 견고한 미들파워(middle power)였다. 우리나라보다 부유했고 하늘로 띄운 고속도로를 운영해서 고 박정희 대통령이 경부 고속도로를 구상하게된 한 동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필리핀은 국운이 기울며 인프라에 대한 보수작업과 재투자가 이뤄지지 못해 현재는 많은 나라로부터 원조를 받고 있다. 필리핀 건설교통부를 찾아가니 우리를 맞이하며 필리핀 도로상황에 관해 전문적으로 설명해주는 사람은 다름아닌 일본 사람이었다. 그분은 일본에서 토목, 교통분야를 공부하고 해외활동을 하고 싶어 일본의 원조기관인 JICA를 통해 필리핀에 도로전문가로 파견나와 활동한 지 20년이 넘는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필리핀 정부는 공무원의 순환보직으로 인해 떨어지는 전문성을 일본인 JICA 전문가를 통해 보완하고 있었다. 서로가 상호 보완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는 마닐라의 도로 구석구석을 이해하고 있었다. 언제 건설되었고, 무슨 문제가 있는지 줄줄 꿰고 있었다. 우리가 방문하려던 곳은 우리나라 여행객들도 많이 찾는 보라카이(Boracay) 섬, 그곳으로 가는 도로 일부를 개선해주는 사업이었다. 그는 각 섬의 주요 도로의 문제점을 다 파악하고 있었다. 그가 필리핀의 도로상황에 관해 얼마나 깊고 방대하게 알고 있는 지는 일본 건설기업의 필리핀 진출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고, 해외 리스크를 사전에 피해갈 것이다.
필리핀은 1960년대에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쌀 연구소인 국제미곡연구소(IRRI, International Rice Research Institute)를 설치하여 쌀에 관한 연구를 체계적으로 해왔고, 우리나라 통일벼 탄생에 이바지하기도 했다. 통일벼의 탄생은 베이비붐으로 인구가 팽창해 가는 한국민에게 식량자급을 가능하게 한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어느해 필리핀 정부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은 대한민국 원조사업중 하나가 미곡종합처리장(RPC, Rice Processing Complex) 사업이었다. 방앗간에서 하던 도정뿐 아니라 건조, 도정, 가공, 포장과 부산물 처리까지를 일관된 과정으로 처리하는 시설이 RPC이다. 이 시설에 몇몇 장비를 더하면 벼가 논에서부터 쌀 포대로 넣어지기까지의 과정이 한번에 통합적으로 처리가 가능하다.
필리핀 그 지역의 농가는 우리가 RPC 사업을 하기 전까지 재래식 방식으로 볍씨를 말리고 낱알을 털어 수확하곤 했다. 낱알을 햇살에 말리는 도중에 새떼가 먹어 치우거나, 쌀이 깨져 상품화하지 못하는 등 손실율이 30%에 달하였다. 이 RPC 사업이 성공하자 기존과 같은 양의 수곡으로도 식량이 30%가 증산된 결과가 얻었다. 지역민의 수입도 대폭 상승했다. 필리핀 정부의 전국적인 RPC 도입 필요계획에 관해 궁금해하던 우리나라 업체는 이 사업을 통해 필리핀 정부의 전국적인 확대 구상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RPC 건설은 포화상태가 되었고 수출을 모색하던 때였다. 서로서로 필요하던 때였다. RPC 시설을 납품하는 업체 대표는 필리핀 중앙정부 담당과장을 만나 명함을 주고받은 것만으로도 큰 수익이라며 기뻐했다. 외국의 중소업체가 정부의 고위급 인사와 미팅을 가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기회라는 것이다.
베트남은 중국과 같은 사회주의 기치 아래 계획경제를 실시해오던 통제사회였다. 베트남을 원조하는 것은 미래의 북한을 지원하는 것이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산업 부문과 그 기술 수준, 전반적인 생활 수요를 구체적으로 가늠할 수 있다. 베트남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려는 하노이~호찌민 간 철도 고속화 사업은 1,700km가 넘는 장거리 철도건설사업이다. 기존 철도는 시속 60km 정도로서 북한과 유사한 협궤인 까닭에 시속 200km와 같은 고속으로 운영하려면 철도의 폭을 넓히고 노선도 새로이 설계해야 한다. 고속철도건설을 위한 타당성 조사를 시행하고, 마스터플랜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엔지니어링 업체는 무상원조 자금을 활용하여 사전 타당성조사(pre-feasibility study)를 추진할 수 있었다. 이는 해당 업체에게 해외 진출을 위한 기회이자, 베트남에게는 물론 한반도의 남북철도 연결을 준비하는 계기가 된다. 관련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기술과 노하우가 녹슬지 않게 보존하고 실력을 벼를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할 수 있다. 현재 한 업체는 문을 닫았고, 한 업체는 남북경협 소식에 주가가 널뛰기를 하고 있다. 그때 활동하던 전문가들은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해외원조를 통하여 서로서로 도울 수 있는 윈윈(win-win) 협력구조를 만들어 가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얕은 이해타산에 좌우되지 않고 속깊고 일관된 철학에 기반하여 다양한 의견과 현실적인 경험을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선순환 구조는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이면서 우리와 이웃하고 있는 피붙이, 북한과의 관계에서도 가능하다. 북한은 현재 우리와 현격한 경제 수준의 차이를 보인다. 그래서 상호 보완적인 부분이 있음에 주목하는 목소리도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의 경제 수준과 기술 역량에 부합하는 산업이 남한의 사양산업(declining industry)과 겹친다면 그 사양산업을 존치하는 것이 장래 국익에 부합한다. 국제적 수요가 있고 전통적인 가치가 있다면 유행은 다시 돌아와 알찬 산업이 될 수도 있다. 우리나라는 인구 규모가 크지 않아 내수시장이 작다. 국내 수요가 받쳐주지 못하는 이런 사업이 만약 개도국 원조사업을 통해 전문가들이 지속해서 활동하고 기술을 전수할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이 또한 통일을 준비하는 활동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