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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십대 회상, 그리고 추억 속의 지리산 ㅡ

지금도 흐른다 883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지금도 흐른다 883


ㅡ 내 이십대 회상, 그리고 추억 속의 지리산 ㅡ


대학시절 야학활동을 함께했던 오랜 친구가 지리산을 다녀왔다며 SNS에 글을 올렸다.


그 글이 내 오래된 추억 속 기억의 문을 두드렸다.


순수했던 이십대 초반, 야학의 밤공기와 지리산 자락을 함께 걸었던 그 시절의 숨결이

마흔다섯 해의 세월을 넘어 다시 내 마음속에 피어올랐다.


고등학교 시절의 나는 조용하고 순한 학생이었다. 술도, 담배도 몰랐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서자 세상의 맛을 알게 되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날쌔다’는 말이 내게 꼭 맞았다.


그 무렵 나는 담양에서 광주로 통학했다.


친구소개로 ‘담양야간중학교’라는 야학에 참여하게 되었다.

'담양동초등학교' 빈 교실 두 칸을 빌려 배움의 기회를 놓친 청소년 들에게 다시 배움 길을 열어주는 곳이었다. 대학생 선생들이 모여 만든 작은 학교였다.


나는 당시는 공대생이었기에 수학을 맡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던 과목을 그토록 열심히 가르쳤다.


당시 나에겐 거창한 이념도, 봉사 정신도 없었다. 그저 선후배들과 어울리는 즐거움 그 뜨거운 젊은 열기에 이끌렸을 뿐이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은 내 정신의 황금기였다. 기쁨과 슬픔, 사랑과 상실이 한데 얽혀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술이 함께 했었다.

그 시절이 그런 시절이었다.


그중엔 가장 가슴 아픈 사건이 지금도 그 응어리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


나보다 한 살 위 형이 있었다.


키 크고 단정한 외모에 묵직한 리더십을 지닌 혀이었다.

당시 영화배우 남궁원을 닮은 참으로 의젓한 형이었다.


그는 야학의 교감이었고 선후배 모두의 중심이었다.


1980년 1월, 살을 에는 겨울 어느 날이었다.


그 형은 나를 데리고 전남대 상대 강의실로 갔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막걸리 한잔 하자”는 말에 따라나섰을 뿐이었다.


그곳에는 짧은 머리의 남학생들과 여학생 몇이 앉아 있었다. 잠시 후 누군가가 열변을 토했다.


‘12·12 사태’, ‘전두환’, ‘김대중’ 이라는 단어가 오갔다. 그때의 나는 막걸리 생각뿐이었다. 그 모임의 성격을 전혀 몰랐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 지하운동권 모임이었을 것이다.


얼마 후, 그 형은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그 이유는 아직 내 안에서도 끝내 풀지 못한 채, 그리고 사연은 소설 한 권 분량 으로 남아있다.


그의 죽음은 내 청춘의 한 장을 깊게 갈랐다.


그 형이 그렇게 가지않았다면, 어쩌면 내 인생 궤적도 크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나도 당시에는 한 열정 했는데 엄청난(?)투사로 변했을 지도...


야학의 밤은 언제나 따뜻했다.


새내기 대학생들 서툰 가르침 속에서도 학생들 눈빛은 늘 반짝 였다.


우리 야학선생 선후배끼리는 마치 한 지붕 아래 사는 가족처럼 항상 함께 였다. 그리고 그 정은 술과 웃음 속에서 더욱 깊어갔다.


그 넘의 사랑때문에 울기도 하고...


그 시절의 기억 속에는 언제나 지리산이 있다.


대학교 1학년 가을, 야학 선생 열댓 명이 함께 떠난 3박 4일의 지리산 종주. 그 일행 중심에는 그 형이 있었다.


지리산은 거대했고 너그러웠다.

끝없이 이어지는 능선 아래로 구름이 흘렀고, 우리의 숨결은

그 산의 바람 속에 섞여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 산이 훗날 내 기억 속 가장 따뜻한 풍경으로 남을 줄은.


그 시절엔 사진이 귀했다.

카메라를 빌리고, 필름을 넣고, 현상을 기다렸다. 사진이 나오면 친구들과 둘러앉아 웃고 떠들며

그날의 추억을 다시 꺼내 보곤 했다.


나는 사진 찍기를 좋아했다.

세 권의 앨범을 만들어 사진마다 짧은 글을 붙여두었다. 그러나 어느 이사 날, 그 소중한 앨범들이 사라졌다. 그 허전함은 마치

내 젊은 날을 통째로 잃은 듯했다.


세월이 흘러 친구를 통해 당시 지리산 사진 한 장을 다시 얻었다.

(첫 번째 사진)


그 속의 나는 내가 아닌 듯 어딘가 숨어 있었다. 오래 전 그 사진을 sns에 올리고 '초롱초롱 박철홍을 찾아라'며 상당한(?) 상품을 걸고 올린적도 있다. 아무도 못 찾았다.

상품만 굳었다. 다시 내지는 않는다. 이미 아는 사람들이 꽤 되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다음 해, 나는 후배들을 이끌고 다시 지리산에 올랐다.

그때의 사진은 남아 있지 않다.

기억 속에만 남았다.


1981년 군에 입대하고, 1984년 제대했을 때 야학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1985년 선후배들과 ‘담양대학인연합회’를 만들었다. 내가 초대 회장을 맡았다.


얼마 전, 그 시절 한 후배를 35년 만에 다시 만났다. 풋풋하던 대학 새내기가 이제는 중년의 얼굴로 내 앞에 서 있었다. 그 녀석은 휴대폰 속 사진을 보여주었다.

35년 전, 지리산을 종주하던 우리의 모습이었다.(두 번째 사진)


그 순간,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그때의 나는 젊었고 산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지금까지 지리산 종주만 열 번이 넘었다. 잃어버린 앨범만 아니었다면, 그 모든 순간이 지금도 손끝에 닿을 텐데.


이제는 남들의 사진 속에서만

그 시절의 나를 다시 만난다.


야학의 불빛,

지리산의 새벽,

그리고 초롱초롱 빛나던

내 청춘을...


그 모든 것은 아직 내 안에서 조용히 살아 있다.


ㅡ 초롱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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