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초롱초롱 박철홍의 지금도 흐른다! 914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지금도 흐른다! 914

ㅡ ‘제주 4.3',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ㅡ


며칠 전, 한강작가 <작별하지 않는다(We Do Not Part)>가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소설 부문에서 수상작으로 선정됐다는 기사를 보았다.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은 퓰리처상, 전미도서상과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문학상으로, 한국어 원작 소설에 이 상이 주어진 건 처음이다.


수상작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 이라는 우리 현대사의 비극을 인간의 존엄과 기억, 서사로 승화시킨 작품이라며 고통스러운 역사를 시적으로 풀어내며 깊은 울림을 주었다”라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가 <제주 4·3 사건 추념일>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 역시 무심히 지나쳤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왜 '제주 4.3 사건'은 아직도 우리에게 낯선가?


‘제주 4.3 사건’이라는 이름은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그러나 이 사건을 ‘항쟁’이라 부르는 순간 사회는 여전히 갈라진다.


누군가는 그것을 제주도민들 정당한 저항으로 보고, 누군가는 여전히 빨갱이들 위험한 반란으로 인식한다.


이처럼 명칭 하나조차 합의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 사건이 아직 역사적으로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나는 대학 시절 '광주항쟁'을 직접 겪었다.


광주는 오랜 논쟁 끝에

<국가폭력에 맞선 민주화운동>이라는 사회적 합의에 도달했다.

희생자에 대한 예우와 기억 역시 제도적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직접 겪은 광주시민들은 여전히 '광주항쟁'이라 부른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광주항쟁도 진상조사 등 여러 문제가 아직도 완전하지는 않다. 계속 진행 중이다.


하지만 '제주 4.3'은 다르다.

진상규명은 상당 부분 이루어졌음 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다.


왜일까?


제주 4.3 출발점은 분명하다.


시작은 1947년 3·1절 기념행사에서 경찰이 질서유지를 하던 중, 경찰이 탄 말에 어린 학생이 치이면서 비롯되었다.


경찰의 미흡한 대응은 기념일에 참석한 시민들 분노를 불러일으켜 시위군중은 경찰서 앞까지 몰려가 항의시위를 벌였다. 그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총격사건이 발생해 민간인이 6명이나 사망하고 많은 부상자들이 생겨 제주 지역사회 분노가 폭발했던 것이다.


그리고 1년 동안 총파업을 비롯한 여러 시민단체 항의가 이어지던 가운데, 1948년 4월 3일 ‘남로당’ 계열 무장대가 5·10 총선 반대하며 봉기를 일으켰다.


당시 한반도는 미군정시기였지만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앞두고 이미 5·10 총선일정이 확정 상태였다.


이 두 사실은 모두 부정할 수 없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이승만 정부는 제주에 대한 강경 토벌 진압작전을 실시한다.


이 과정에서 군과 경찰, 그리고

'서북청년회' 등 반공단체가 결합하며 대규모 제주 민간인들의 희생이 발생했다.


여기서 우리는 냉정하게 봐야 한다.


무장봉기가 있었다는 사실과 그 이후 벌어진 대규모 민간인 학살은 동일한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제주 4.3 핵심은 단순히 “봉기가 있었느냐”가 아니라, 그 진압 과정에서 <어디까지가 정당한 공권력이었고, 어디서부터 통제되지 않은 폭력이었는가>에 있다.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이 사건을 단순한 ‘반란진압’으로만 볼 수 없다.


물론 이 사건은 단순하지 않다.


미군정기 혼란, 좌우이념 대립 남로당 무장대 공격과 보복, 국가 권력 강경대응 등 이 모든 요소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따라서 '제주 4.3'을 한 문장으로 규정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이 있다.


3만 명이 넘는 제주도민이 이념과 무관하게 희생되었다는 점이다.


이 지점에서 이 사건은 단순한 이념충돌을 넘어 국가와 사회가 감당해야 할 비극이 된다.


'김영삼문민정부시절'과 '역사바로세우기' 가 끝난 김대중정부시절 까지도 제주주민 들은 진상규명과 경찰 감시, 연행, 연좌제 중단 등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여러 곳에 보낼 정도였다.


1999년 12월 16일,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2000년부터 시행되었다.


비록 특별법이 처음 제정되었을 때부터 세세한 내용까지 살피는 완벽한 법안이 아니었지만, 2000년대 이후 진상규명 논의는 더욱 활발해졌다.


2002년 참여정부 들어서 노무현 대통령이 처음으로 4.3 기념식에 참석하여 추도사를 낭독하여 그 기념식에 참석한 유족들뿐만 아니라 제주도민을 흠뻑 울렸다.


제주도민들 한이 얼마나 깊었으면 대통령 추도사에 그리 눈물을 뿌렸겠는가?


이후 문재인 대통령도 기념식에 참석했지만 윤석열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았다.


하지만 보수정권 박근혜 정부는 2014년에 4.3일을 국가추념일로 지정했다.


박근혜정부 때 국가추념일 지정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진보ㆍ보수 이념을 넘어, 국가가 이 비극을 공동역사로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왜 우리는 이 사건을 두고,

‘사건’과 ‘항쟁’ 사이에서 여전히 망설이고 있는가?


‘항쟁’이란 말에는 저항 정당성을 담고 싶어 하는 의지가 있다.


반면 ‘사건’이라는 말에는 섣부른 규정을 피하려는 신중함이 담겨 있다.


내 개인적으로는 항쟁을 선택하고 싶지만, 역사 글을 쓰는 입장으로는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고는 보지 않는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이 이름들이 왜 충돌하는지를 이해하는 일이다.


제주 4.3은 끝난 역사가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계속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 의미는 어쩜 단순하다.


빨갱이들 소탕이라는 명분으로 국가공권력에 의한 과잉진압 및 조직적 민간인 희생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이 사건을 이념의 도구가 아니라 사람의 역사로 바라보는 것이다.


'제주 4.3'에 대해서는 더 깊은 이야기가 많지만 지난 내가 써놓은 <해방전후사 역사 글>에 자세히 정리해 놨으니 참고하시기 바란다.


ㅡ 초롱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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