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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환 May 30. 2020

행복을 부르는 약속 메뉴판

행복을 부르는 약속 메뉴판

아들이 535,200원을 벌었다. 매일 저녁이면 무언에 의식이라도 된 양 몽당연필을 집어 들고 끄적끄적 메뉴판의 흰 여백을 채운다.    

  

아빠 오늘 약속을 잘 지켜서 3,600원 모았어요.

밥 두 끼 먹어서 1,000원

마음의 소리 한 권 읽어서 1,500원

뽀송이 밥하고 물 줘서 100원

동신 아파트 할머니, 의정부 할머니 전화해서 500원

아 그리고 오늘 인사도 잘 했어요. 500원 맞죠.

모두 더하면 3,600원          

와 신난다. 벌써 50만원이 넘었어요, 100만원까지도 금새 가겠네.   

    

기억을 거슬러 두 달전에 일이다. 초등생 아들은 돌아오는 12월 생일선물로 스마트폰을 받고 싶어 했다. 그 때부터다. 아빠 12월 5일에 스마트폰 사 줄꺼죠. 꼭 갤럭시 20 이어야 돼요. 이렇게 하루도 빠짐없이 짜증을 부르는 물음이 이어졌다.

      

약속의 다짐을 매일 묻는 건 어떤 이유에서일까.

스마트폰을 너무 갖고 싶었던 아들은 이렇게라도 묻고 또 물어 확인 받고 싶었나보다.

기왕 사주겠다고 한 것이니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문제는 신형 스마트폰을 사달라는 거였다. 100만원을 훌쩍 넘는 가격에 두루마리 화장지가 물을 머금듯 부담감도 부풀어 올랐다.  

   

짜증 섞인 말투로 묻는 말에만 심드렁히 대꾸하던 어느 날.  

아이를 앞에 앉혀 놓고 말을 꺼냈다.

선물 빨리 갖고 싶지. 시무룩한 표정으로 아들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럼요. 12월 5일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시간이 거북이처럼 너무 느려요.

아빠 생각인데 이러면 어떨까?

스마트폰이 꼭 신형이 아니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안돼요. S20 아니면 안 살래요. 100배로 확대되는 카메라 기능이 꼭 있어야해요.

아빠 생각인데. 아이들이 쓰기에는 너무 비싼 듯 싶어서 그래. 100만원이 훨씬 넘거든.

그래도 약속했으니 사주셔야죠.

기분 좋은 마음으로 말을 건넸지만 이렇다 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을 무렵.

옹달샘물이 흘러나오듯 생각이 샘솟았다. 하얀색 이면지에 연필을 굴려가며 삐뚤빼뚤한 표와 내용을 채웠다.   

    

민준아 봐봐. 아빠 생각을 적어봤는데.

약속 메뉴판. 이게 먼데요.

사고 싶은 스마트폰 가격이 비싸서 부담스럽잖아.

그러니 민준이가 100만을 모으면 나머지 비용은 아빠가 채워주는거야.

아니 제가 돈을 어떻게 벌어요. 말도 안돼.

먼저 약속 메뉴판에 평소 지킬 수 있는 약속들을 정리해 보는거야.

그리고 매일 잘 지켜준 약속은 정해 놓은 금액으로 저금을 하는 거지.

그렇게 100만원이 모이면 나머지 비용을 더해 핸드폰을 사면 어떨까.     

잠시 약속 메뉴판을 살피던 아들이 이윽고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오늘부터 바로 할래요.”        

이렇게 80일이 흘렀다. 아침저녁으로 약속 메뉴판을 살피며 흐뭇해하는 아들. 나 역시 먼 발치에서 그 흐뭇함을 바라봄이 일상에 행복이 되었다.     

약속메뉴판을 보며 하루를 되새는 아들. 아! 오늘은 할머니한테 전화를 못했네. 내일은 전화 드려야겠어요. 일요일에는 대청소 하는 거 어때요. 청소하면 집도 깨끗해지고 기분도 좋아지고, 500원도 벌잖아요.


아이가 행복해졌다. 자신의 힘으로 돈을 모으고, 기쁨으로 채워가는 일상은 희망과 즐거움이 되었다. 약속메뉴판에 적힌 535,200원 속에는 우리 가족의 삶과 기쁨, 소통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겼다. 가족은 이렇게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를 한데 버무려 행복을 차곡차곡 쌓아간다.     

 

아들은 더 이상 선물을 기다리며 보채지 않는다. 그 선물은 기다림만이 아닌 하루하루의 소중한 약속을 지켜가는 삶속에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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