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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환 Jun 16. 2020

75세 아버님께 드리는 상장

75세 아버님께 드리는 상장

아버님(장인어른)은 식육 장인이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독일에서는 육가공 장인을 일컬어 식육 마이스터, 최고 전문가로 인정한다. 독일에 다녀왔거나. 마이스터 과정을 이수한 적도 없는 평범한 정육점 사장님. 가족에겐 그런 아버님이 마이스터와 다름없다.

    

오래전 사극에 한 장면을 떠올려본다. 무릎 꿇은 죄인을 바라보며 막걸리를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연신 뿜어대는 한 사람. 헝클어진 머리에 시뻘건 얼굴. 살수 장단에 맞춰 죄수 주위를 빙빙 어슬렁거리는 망나니 손에는 큰 칼 한 자루가 쥐였다.     


뛰어난 도축 기술과 육가공으로 조선의 식문화를 바꿔놓은 전문 도축업. 흰 백(白), 고무래 정(丁), 우리는 그들을 백정이라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백정의 직업이 다양했단다. 악기 연주와 재주를 부렸던 창우 백정, 버드나무로 바구니를 만드는 고리백정, 가죽신을 만드는 갖바치, 살수라 하여 사형을 집행했던 망나니까지.

    

아버님은 혈기왕성한 20대 시절부터 정육점 일을 해오셨다. 삶에 터전인 그곳은 큰 덩어리의 정육을 나누고, 잘라, 썰기를 반복하는 노동의 공간이었다. 설이나, 추석 명절 때면 구름처럼 몰려드는 손님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적지 않은 연세에 수십 킬로 고기 덩어리를 올리고 내리며 되풀이되던 고된 노동. 기나긴 세월 아버님의 몸은 지나온 노동의 흔적들로 채워졌다. 이 모든 고통을 감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가족의 삶을 생각하는 마음뿐이지 않았을까.   

  

1년 365일 하루도 쉬지 않고 가게로 나서는 아버님. 하루를 쉬면 찾아온 손님이 발걸음을 돌린다는 말씀 한 마디를 남기고는 오늘도 가게로 향하신다.     


늦은 저녁 막걸리 한 사발을 꿀꺽꿀꺽 들이키는 즐거움에 낙을 삼고, 가끔씩 기분이 좋을 때면 젊은 시절 정육점과 살아온 이야기꽃을 피운다. 아버님은 지금도 정육점 일이 좋으시단다. 이 나이에 다른 친구들은 일거리가 없어 삶에 허전함을 느끼는데, 매일 출근할 수 있고, 한결같이 찾아주는 손님들을 만나는 일이 너무도 즐거울 수밖에 없다는 아버님.   

  

문득 엉뚱한 상상이 뭉게구름처럼 솟아올랐다. 아버님이 살아생전 삶에 노고를 인정받아 상을  받아보신 적이 있을까. 그렇지. 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하며 사랑해주신 아버님께 상장을 드리는 거다.

   

5월 8일 어버이날. 여느 때처럼 가족이 모여 한상 음식과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담소를 나눴다. 분위기가 파할 무렵. 준비한 봉투와 상장을 보여드렸다. 무심코 바라보시던 아버님은 이게 뭐냐며 물으셨다. 평생 가족과 함께 해주신 고마움을 담았습니다. 아버님 상장 처음 받아보시죠.  

   

이내 상장을 마주 들고는 천천히 읽어 내렸다. 2020년 5월 8일 가족협동조합 미해와 머스마들 이사장 드림. 아버님의 쑥스러운 미소와 함께 눈가에 작은 이슬이 맺혔다. 한평생 처음 받아 보신 상에 이렇게 좋아하실 줄 알았으면 진작 드렸을 것을.     


요즘 아이들은 어린이집이나 학교에서 매번 상을 받아온다. 꼬마 과학자상, 독서상, 관찰상, 나눔 문화상, 줄넘기상 등 상이 넘쳐나는 시대. 아이들은 집안 여기저기에 걸린 상장이 대수롭지 않은가 보다. 아버님이 살아온 과거에는 배움에 앞서 가족의 생계와 삶이 전부였다. 어쩌면 너무나도 생소한 이것이 아버님께 감동을 드렸을지도 모르겠다.     


돌아오는 길에 못다 한 마음을 담았더라면 좋았을 걸. 아쉬움이 남았다.

다음번 상장을 드릴 때는 이런 마음을 전하면 어떨까.

오십 년 한결같은 정육 인생. 누군가의 삶에 피가 되고 살이 되려고 고된 일을 업으로 삼아오신 아버님 애쓰셨습니다. 가족의 인연을 맺어 행복합니다. 그리고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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