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에도 속도가 있다
요즘 아내의 마음을 사로잡은 녀석이 생겼다. 백옥처럼 새하얀 살결에 자기 몸보다 몇 배나 더 큰 커다란 껍질, 기다란 더듬이를 움직이다가 혹여나 겁이라도 먹으면 순식간에 몸속으로 두 눈을 감춰버리는 녀석의 정체는 바로 백와 달팽이다.
며칠 전 집에 돌아와 곤충 채집통 한편에 자리를 튼 녀석을 마주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집 앞 화단에 홀로 앉아 외로이 방황하던 녀석을 발견했단다. 그 쓸쓸함을 달래려 집으로 데려온 엄지손가락만 한 백와 달팽이는 그렇게 새 식구가 됐다.
그때부터 아내의 달팽이 사랑이 시작됐다. 새 식구를 돌보기 위해 신선한 상추와 양배추를 넣어주고, 등껍질을 단단하게 해 준다며 삶은 계란 껍데기를 발라줬다. 보금자리 흙을 살포시 깔아주던 아내는 달팽이가 예쁘다며 연신 함박웃음을 지었다.
문득 녀석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얼까 궁금했다. 느릿느릿 몸을 더듬어가며 그 작은 채집통을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녀석은 깊지 않은 땅속을 파헤쳐 몸을 숨기기도, 때론 촉촉한 수분이 배어 있는 흙더미에 몸을 맡기기도 했다. 가만히 보면 볼수록 어찌 저리 느릴까. 강아지풀 술렁거리듯 세월아 네월아 먹이로 넣어준 양배추 한편에 올라앉아 한입 베어 물고 야금야금 소리 없이 움직이니 말이다.
언제 다 먹을까 싶던 양배추가 느릿느릿한 시간의 흐름을 타고 조금씩 사라졌다. 자세히 살피니 채집통이 작아 보이지 않았다. 느려 터진 삶. 그럼에도 구석구석을 오가며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그렇게 채워가는 달팽이에겐 어쩌면 그곳은 우주고 삶에 전부일 수도 있겠다.
잠시 달팽이의 눈이 스쳐 지나며 내게 말하는 듯 보였다. 집이 넓지 않으면 어떤가. 느릿느릿 더딘 삶을 살면 어떤가. 그 작은 공간에서 하나하나의 채취와 흔적을 새기는 삶을 살아가도 될 것을.
자기보다 몇 배나 무거운 집을 이고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달팽이에겐 느릿느릿 느림에도 나름에 속도가 있다. 빠름이 미덕인 세상에서 가끔은 느리게 살아보는 것. 천천히 걸으며 보아도 세상에는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보다 보지 못하는 더 많은 것이 있다. 서둘러 간다고 더 많은 것을 보는 것도, 더 잘 보는 것도 아닐 터. 삶은 느린 호흡으로 자세히 보아야 하는 것이다.
무거운 짐을 이고 이곳저곳을 누비는 달팽이에 삶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겠다. 느림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달팽이가 진정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아내가 달팽이를 사랑한 이유는 느림의 속도에 심취해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동경한 것은 아닐지.
달팽이가 예쁜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