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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발 빨랐던 우리집! 지금이라면 얼마나 좋아!

by 초마

내가 초등 4학년 겨울, 우리 가족은 모두 모여서 같이 살게 되었다.


아빠는 내가 어릴 적 엄청난 원양어선의 선장이었고, 엄마는 아빠가 타던 큰 원양어선을 관리하는 본사의 관리팀에서 일을 했었다. 내가 어릴 적 아빠는 대서양을 넘나들며 엄청나게 큰 참치를 잡는 배의 선장이라 1,2년에 한 번씩 집에 들렀고, 얼마 있지 않아서 다시 배를 타고 나가셨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빠의 배는 선원들이 200명 정도 되는 큰 배였고 한번 출하하면 하역지였던 일본으로 돌아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엄마는 일을 하느라 서울에 머물렀고, 우리는 부산에 있는 이모집에서 내가 초등 4학년까지 자랐었다.


동생과 내가 커가면서 엄마와 아빠는 이제는 가족이 모두 모여 살기로 했고, 우리는 그렇게 내가 초등 4학년이 되던 겨울 서울로 올라왔다. 우리의 서울의 첫 집을 생각하면 참 엄마와 아빠의 선택이 기가 막혔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때의 선택이 지금으로서 누구보다 아쉬울 뿐이다.


우리의 서울의 첫 집은 바로 개포동 한신 아파트였다.

바로 앞에는 그 당시에 허허벌판이었고, 우리는 겨울마다 벌판에 물을 뿌려서 만든 임시 썰매장에서 썰매를 즐기며 놀기도 했다. 그 썰매장이었던 벌판이 지금은 타워팰리스로 바뀌어진 것을 생각하면, 엄마와 아빠가 정말 장소 선정을 누구보다 잘한 것 같다. 단지 장소만 말이다.


그때의 이 아파트는 복도식 아파트였고, 지금보다도 훨씬 더 매서운 추위에 겨울이면 문이 얼어서 열리지 않아서 경비아저씨가 뜨거운 물을 현관 손잡이에 부어주어야 문이 열렸다. 동생과 나는 겨울 방학이었기에 엄마 아빠와 하루 종일 신나게 놀 수 있다고 좋아했다가 말았던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외에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웃고 울고 했던 추억들은 3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파노라마처럼 영화필름처럼 내 기억 속에서 스쳐 지나간다.


안녕, 우리의 첫 번째 집!




판교에 위치한 회사에서 강남 쪽에 있는 거래처를 갈 때마다 지나치는 길이 이 길이다. 이 길을 오가면서 사실 아직까지 있다는 것이 내심 좋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참 오래되었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다녔던 구룡초등학교 앞 주공아파트는 이미 재개발이 되어서 예전의 모습을 상상조차 되지 않는 대규모의 아파트 단지가 되었으니 말이다. 사실 그 옆의 은마아파트도 아직도 재개발이 마무리되지 않았으니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이렇게 우리의 서울 첫 동네는 개포동이었다. 그리고 이사 간 동네는 바로 잠원동이다. 그곳에서는 내가 분당으로 이사오기 전인 고등학교 2학년까지 살았으니 5년여를 그곳에서 살았던 또 다른 추억 가득한 곳이다.

한강잠원부지가 근처에 있었고, 지금의 신사동 샤로수길은 걸어서 갈 수 있었던 동네였으니, 그 당시의 엄마와 아빠의 선택은 또 한 번 옳았음이다.


나중에 들었던 이야기지만, 아빠는 집주인이 그 당시 돈으로 50만원을 안 깎아줘서 집을 사지 않았다고 했다. 우리가 그때 사지 않았던 집은 그 당시 대림아파트였고, 신동초등학교와 동생이 중학생이 되던 해 즘에 새로 개교한 신동중학교가 바로 길건너에 있는 초품아였다. 지금은 이미 재개발이 끝난 지 오래라 아파트 층수만큼이나 집값이 높이 뛰어버린 집이다.


안녕! 우리의 두 번째 집!!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가족이 모두 함께 살았던 집은 바로 분당 양지마을이다.

엄마와 아빠는 잠원동의 집을 계약하지 않고, 신도시 분당에 당첨되어 우리는 양지마을로 이사를 했다. 그 당시 나는 고등학교 2학년 겨울이었고, 서울에서 시골로 이사 간다는 생각에 학교에서 집에 가는 내내 울면서 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1992년 겨울의 분당은 버스가 많지 않았고, 대부분 양재역까지만 오는 버스였다. 나는 바로 고3이 되었기에 전학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평일에는 엄마와 아빠가 나를 새벽에 학교에 차로 데려다주고, 저녁이면 야자가 끝나는 시간에 데리러 오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시골로 이사했다는 반항 아닌 반항을 부려볼 셈으로 차에서 집에 가는 내내 잠만 자고 했다. 지금 분당의 양지마을 집값시세를 그때 조금이라도 알았더라면 내가 엄마 아빠에게 그렇게 서운하다 말했을까?


내가 대학 1학년이 되고, 찬란했던 햇살과 따스함을 끌어안고 아빠는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렇게 우리의 세 번째 집도 함께 떠나갔다.


안녕! 우리의 마지막 세 번째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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