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San Gimignano
피렌체를 떠나 본격적으로 토스카나 여행을 시작했다. 초여름의 토스카나 풍경은 차에서 보기에도 아름답고 넓은 들판 덕분에 시야가 시원하게 트여 좋았다. 하지만 그건 이동할 때의 이야기다. 토스카나의 작은 마을들은 대부분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어서 캠핑카를 두고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언덕 위로 긴 직사각형 모양의 탑들이 솟아 있어 멀리서는 마치 요새처럼 보이는 산지미냐노(San Gimignano)에 도착한 날은 더군다나 정말이지 무더운 날이었다.
심지어 나흘째 씻지도 못해 온몸이 끈적이는 상태로 더위와 피로에 시달렸던 터라, 언덕 아래 주차를 하고 걸어 올라가는데 첫걸음부터 너무 힘들었다. 시선을 들기가 힘들 정도로 햇빛이 강해 몸이 금세 뜨겁게 달궈지고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지열도 뜨겁고 무거울 정도로 습한 공기에 바람 한 점이 없었다. 피로가 쌓인 다리는 천근만근 무겁고 며칠 동안 땀에 찌든 몸은 찝찝하고.. 왜 여기까지 와서 극기훈련을 하고 있는 거지, 이게 맞나? 하는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날씨가 생각보다 일찍 더워진 데다 여기까지 왔으니 이건 봐야 한다는 강박이 더해져 언젠가부터 우리 여행의 취지에 맞지 않게 너무 강행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산지미냐노를 다 둘러볼 기력도 없으면서 우리는 그날 31km 떨어진 볼테라(Volterra)에도 갈 계획이었다. 이게 맞는 걸까? 무리해서 많은 것을 보는 게 우리 여행의 목적이 아니었는데도 어느새 더 많은 것을 보기 위한 강행군을 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우리는 볼테라를 포기하고 바로 캠핑장으로 가서 하루 쉬기로 결정했다. 물론 언제 다시 토스카나에 올지도 모르고, 온다고 해도 이런 작은 마을들을 찾아갈 기회가 없을 거라는 생각에 아쉬움이 남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봐야 할 곳이 끝이 없을 터였다. 우리는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하루 쉬어 갈 곳으로 남편이 고른 캠핑장은 네덜란드 할아버지가 운영하시는 올리브 농장이었다. 일반 캠핑장보다 저렴한 가격에 농장 부지 안에서 캠핑을 하며 샤워실과 수영장도 이용할 수 있는 곳이다. 이런 곳을 찾아내다니! 그냥 쉬기만 해도 좋을 텐데 토스카나의 올리브 농장이라니 너무 좋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도착해서 문을 여니 커다란 래브라도 레트리버가 주인 아저씨보다도 먼저 나와 우리를 반겨 줬다.
차에서 내려 넉살 좋은 강아지를 실컷 만져 주고 있으니 주인 할아버지가 나오셨다. 전화로 예약했던 사항을 확인하고 간단한 설명을 들은 후 확정! 곧바로 하루 묵을 준비를 시작했다. 어디든 캠핑카를 오래 주차할 때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수평을 확인하고 필요한 곳에 발판을 대는 것이다. 캠핑카 안에서 밥을 해 먹고 잠을 자야 하니 그게 가장 기본이다. 타이어 아래 발판을 넣어 수평을 제대로 맞춘 후에야 전기를 연결하고 창문을 열고 테이블 아래 넣어 뒀던 쿨러를 복도로 꺼낸다.
이번에도 평소처럼 수평을 맞춘 후 이제 전기를 연결하려는데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생겼다. 우리가 쓰는 전선의 플러그와 농장의 콘센트가 맞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변환 콘센트를 따로 가지고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전기를 사용 못 할 위기였다. 충전할 게 많아서 전기를 꼭 써야 했던 우리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은 토스카나 들판 한복판에 있는 언덕 위였으니까. 혹시 몰라 남편이 주인 할아버지께 사정을 말씀드리니 흔쾌히 차로 가게에 데려다주겠다고 하셔서 남편은 주인 할아버지와 함께 가고 넓은 올리브 농장에 나 혼자 남게 됐다.
어느새 강아지도 사라지고 없어서 땀을 흘리며 캠핑카 안을 청소하다가 문득 이곳에 수영장이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청소를 마친 뒤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수영장이 있을 법한 쪽으로 조금 걸어가 보니 꽤 그럴 듯한 수영장이 있었다. 근처를 둘러 보니 찬물이 나오는 야외샤워장이 있어서 수영복을 입은 채로 씻고 바로 수영장으로 입수했다. 샤워도 하고 목까지 오는 깊고 시원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한결 살 것 같았다. 주변으로는 은빛이 도는 올리브 잎이 무성해 아름다웠다.
그렇게 많은 올리브나무에 둘러싸이기는 처음이었다. 사방 어디를 봐도 올리브나무가 보였다. 심지어 그 사이에 수영장이 있고 다른 사람도 없다니! 날씨가 흐려져 햇빛은 있다 없다 했지만 날이 워낙 더워 수영하기 좋았다. 혼자 여유롭게 수영장을 즐기고 있으니 남편이 변환 콘센트를 사서 돌아왔다. 전기를 연결하고 온 남편에게 수영장을 양보하고 선베드에 누워 올리브나무들을 둘러봤다.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내가 마음 깊이 원했던 것은 결국 좋은 것을 많이 보는 것도 아니고 그저 평화로움과 여유를 만끽하는 이런 시간이었음을 다시금 깨달았다.
캠핑장에는 살가운 성격의 래브라도 외에 길냥이 가족도 살고 있었다. 이 농장에 얹혀 살고 있으니 더부살이냥이라고 하는 게 정확할 것 같은데, 주인 할아버지는 이 고양이들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지만 언젠가부터 밥을 주고 있다고 하셨다. 덕분에 고양이 가족은 통통하니 건강해 보여서 마음이 놓였는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피부병이 있어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약을 먹으면 금방 좋아질 피부병인데.. 잠시 머물다 떠나는 사람으로서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어 안타까운 마음으로, 사람 손길을 좋아하는 녀석들을 그저 오래 만져 줬다.
고양이 가족과 헤어지고 산책 겸 구경 삼아 농장을 걸어 다녀 보니 이곳에는 올리브 나무뿐만 아니라 크고 오래된 무화과 나무도 몇 그루 있고 좀 더 걸어 나가니 포도밭도 있었다. 탁 트인 곳에 서니 토스카나 특유의 낮은 언덕들과 들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여행 잡지에 나올 정도로 풍경이 아름다웠던 것도 아니고 이런 산책이 특별한 경험도 아니었는데도, 평화로운 풍경을 여유롭게 바라보는 시간이 주는 만족감이 굉장히 커서 스스로도 놀랐다. 봐야 하는 것, 해야 하는 것, 남들이 좋다는 것을 하고 싶은 마음, 뭔가를 성취해야 한다는 마음들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마주할 수 있는 풍경이 있다는 것. 그리고 가끔은 이런 풍경을 마주하는 순간이 어떤 성취보다 큰 행복감을 주기도 한다는 것을, 나는 마음 깊이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산책길에서 돌아오면서 우리의 캠핑카 여행이 이런 풍경, 이런 순간을 마음에 쌓아가는 여정이 되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