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Firenze
피렌체에 도착한 날은 6월 12일 토요일이었다. 금요일에 엘바 섬을 나와 피옴비노의 무료 주차장에서 자고 곧장 피렌체로 왔다. 외곽의 넓은 유료 주차장에 도착한 것은 12시쯤, 머리 바로 위에서 내리쬐는 햇볕의 열기가 대단했다. 숨이 막힐 듯한 뜨거운 열기에 당황했지만 지체 없이 세탁물을 챙겨 트램을 탔다. 모처럼 피렌체에 왔지만 첫 번째로 할 일은 세탁, 더는 입을 옷이 없을 정도로 빨랫감이 쌓여서 커다란 가방 두 개를 꽉꽉 채워 가져갔다.
종점인 주차장에서 산타마리아노벨라역 앞까지는 20분이 걸린다. 트램에서 내렸더니 온 세상을 태울 듯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이 우리를 반겼다. 여기에 뜨겁게 달궈진 도로가 뿜어내는 지열까지 더해져 현기증이 날 정도였지만 더위를 피할 그늘 한 점 없었다. 일단은 코인세탁소에 가서 이 무거운 세탁물을 내려놔야 했다. 이쪽저쪽으로 길을 몇 번 건너 골목으로 들어가서 미리 알아봐 둔 코인세탁소에 도착했다. 고작해야 10분 정도 걸었을 텐데 날이 너무 더워서 이 정도 이동에도 진이 다 빠져버렸다.
어제까지 시원한 바닷가에 있었던 게 꿈이었나 싶게, 그날 피렌체는 도시 전체가 정말 타오르는 듯 뜨거웠다. 두꺼운 마스크까지 쓰고 있어 더 덥고 답답했다. 땀에 젖은 마스크를 벗어 던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세탁기에 세탁물을 집어넣고 작동시킨 후, 작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세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에어컨이 없는 세탁소 안도 시원하진 않았지만 정오의 뜨거운 햇볕과 지열을 피한 것만으로 살 것 같았다. 맙소사, 이게 6월 중순의 더위라니.
배가 너무 고픈데 세탁과 건조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말았다. 건조기를 돌렸는데도 눅눅하니 다 마르지 않아서 한 번 더 돌려야 했던 탓이다. 세탁물이 워낙 많기도 했지만 크고 두꺼운 비치 타월이 범인이었다. 오래 쓰겠다고 고르고 골라 산 비싼 타월인데 너무 크고 두꺼워 막상 캠핑 여행에서는 애물단지 신세다. 결국 한 시간 반이나 걸려 세탁과 건조를 마무리하고, 잘 마른 따끈한 옷과 수건들을 가방에 넣어 바리바리 들고는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갔다.
비 오듯 흐르는 땀을 닦으며 드디어 구글맵에서 봐 뒀던 한식집에 도착했는데, 우리가 들어서자 사장님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고.. 브레이크타임까지 20분 정도밖에 안 남았는데, 어떡하죠?” 하신다. 그 시간 안에 다 먹고 나가야 한다고.. 아 정말 되는 일이 없다. 그래도 차마 벼르고 별렀던 한식을 포기할 수 없어서 가장 빨리 되는 음식이 뭔지 물어 냉면과 불고기를 시켰다.
음식 나오는 데 10분, 먹는 데 5분, 거의 들이마시다시피 먹었다. 계산을 마치고 20분 안에 나오는 데 성공한 우리는 다시 광장으로 걸어가 트램을 타고 캠핑카로 돌아갔다. 땡볕에 세워져 있던 캠핑카 내부는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더웠다. 서둘러 세탁한 옷과 수건을 정리해 넣고 다시 또 트램을 타고 시내로 갔다. 날씨 앱에는 32도라고 나오는데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체감 온도가 높았다. 가로수도 없는 탓에 한낮에는 그늘 한 점 없이 끓는 기름 같은 뙤약볕을 그대로 맞으며 걸어야 했다. 설상가상 바람도 불지 않아서 한 걸음 한 걸음이 고통스러웠다. 피렌체를 너무 좋아하는데도 어제 떠나온 엘바 섬이 그리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피렌체는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다. 6년 반 전 남편과 이탈리아 시어머니 댁에 와 있을 때 차를 타고 당일여행으로 왔었는데, 그때는 흐리고 습하고 추운 겨울날이었다. 으슬으슬한 추위에 생리통까지 더해 그때도 고생이었지. 냉정과 열정 사이도 아니고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우리의 피렌체 여행!
그늘이 간절했던 우리는 일단 중앙시장(Mercato Centrale)으로 갔다. 천장이 높고 넓은 중앙시장 안에서 바깥의 뜨거운 열기를 잠시 피할 수 있었다. 코로나 때문인지 사람이 별로 없어서 더 쾌적했다. 남편은 시원한 생맥주 한 잔, 나는 주스를 얼린 것 같은 차가운 아이스크림으로 더위를 식히고 힘을 내어 두오모를 보러 갔다. 고등학생 때 <냉정과 열정 사이>를 읽은 후부터 늘 마음속에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았던 그곳, 피렌체의 두오모.
변함없는 두오모를 보니 비로소 피렌체에 다시 왔다는 실감이 났다. 조토의 종탑과 두오모 쿠폴라에는 올라가 봤기 때문에 다시 오르지 않고 두오모 광장을 한 바퀴 돌아 나와 베키오 다리를 건넜다.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석양을 보기 위해서였다. 지친 다리로 천천히 계단을 오르는 동안 뜨거웠던 해가 기울면서 공기가 점차 선선해지고, 나뭇잎 사이로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이곳은 나무가 많아 공기가 한결 상쾌했다. 거리에서는 한 그루도 보기 힘들던 나무가 이곳에 다 모여 있는 덕분이다. 미켈란젤로 언덕의 계단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피렌체의 전경과 노을을 즐기고 있었는데 다행히 빈 자리가 있어 얼른 앉았다.
구름이 하늘 전체에 옅게 퍼져 있어 노을이 특히 아름다운 날이었다. 계단 끝 뒷자리에 앉은 덕분에 바로 뒤에서 버스킹 밴드의 기타 연주와 노랫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면 눈앞에선 피렌체 도시 전체가 석양에 물들고 있었다.
넋 놓고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이윽고 해가 아르노 강으로 내려앉으면서 강물을 빛나는 주황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베키오 다리 아래로 빛의 강이 흐르는 듯했다. 그 광경에 감탄하다가 시선을 옮기면 오른편으로는 조토의 종탑과 거대한 두오모 쿠폴라가 주변 건물들과 함께 어두운 핑크빛으로 물들어가는 중이었다. 숨 쉬고 있는 공기마저 석양에 물든 것 같았던 마법 같은 순간. 그날의 모든 고생을 낭만으로 물들여 버리는 노을이었다.
다음 날에는 제대로 운동화와 가벼운 운동복을 갖추고 구시가지로 갔다. 중앙시장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해가 조금 기울어지기를 기다려 밖으로 나와 하루 종일 정처 없이 걸어 다녔다. 골목에 살짝 드리우는 그늘을 따라 걷다 보면 광장이 나오고 두오모가 나오고, 또 걷다 보면 어느 성당이 나오고 베키오 다리가 나오고, 아르노 강이 나왔다. 한여름 못지 않은 날씨에도 지칠 때까지 걷다가 너무 힘들 때는 그늘에 자리가 있는 바를 찾아 차가운 술을 한잔하고는 또다시 걸었던, 뜨거운 열기와 함께 거리의 정취를 흡수하듯 걷고 또 걸었던 그해 여름의 피렌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