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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레 Apr 28. 2023

모든 것이 좋았던

10. Isola d'Elba

  6월 7일, 이탈리아 북부를 뒤덮었던 비구름이 물러가고 드디어 날씨가 화창하게 갰다. 며칠 만에 맞이한 화창한 날씨에 우리는 엘바 섬(Isola d'Elba)에 가기로 결정했다. 엘바 섬은 나폴레옹의 유배지로 알려진 토스카나 주의 작고 아름다운 섬으로, 우리가 있던 마리나 디 빕보나의 해변에 서면 바다 너머로 실루엣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섬이기도 하다.


  캠핑카를 배에 싣고 섬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은 비용이 꽤 드는 일이지만, 며칠 동안 흐린 끝에 찾아온 모처럼의 맑은 날씨를 아쉽게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이제 여기서부터 내려가면 한동안 내륙으로만 이동해야 하는데 흐리고 바람 불 때 바닷가에 있다가 이렇게 좋은 날씨에 내륙으로 들어가는 건 너무 억울하니까. 그만큼 우리는 간절히, 화창한 날씨에 어울리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바다를 보고 싶었다. 그런데 마침 우리가 있는 마리나 디 빕보나에서 피옴비노 항구까지 차로 한 시간, 거기서 엘바 섬까지 배로 한 시간이니 두 시간이면 갈 수 있고, 때마침 월요일이어서 사람이 많아지는 주말 전까지 섬에 머물 시간이 충분했다. 게다가 애초에 마음 가는 대로 갈 수 있는 것이 캠핑카 여행의 매력인 것을.


  피옴비노 항구로 가는 한 시간 동안, 맑게 갠 하늘과 밝은 햇살에 여행 첫날처럼 마음이 설렜다. 이탈리아에서 배를 타는 것도, 캠핑카를 배에 싣는 것도 처음이라 설레고, 이 좋은 날씨에 아름다운 엘바 섬에 있을 생각을 하니 가는 내내 행복해서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항구에서는 먼저 출발하는 배에 자리가 남아서 기다리지 않고 바로 그 배에 탈 수 있는 행운까지 얻었다. 여행을 시작한 후 내내 일이 꼬이기만 했었는데 드디어 운이 따르는 걸까?


  엘바 섬으로 가는 배에서 내려다 본 바다는 빛나는 군청색이었다. 맑고 푸른 물색이 수없이 겹치고 겹쳐진, 진하고 맑고 깊은 색. 실크처럼 부드럽게 물결치는 수면에는 햇빛 파편들이 폭죽이 터지듯 반짝이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한편에서는 하얗고 통통한 갈매기들이 배를 타고 따라와 승객들이 던져 주는 과자를 훌쩍 날아올라 받아 먹었고, 아주 잠깐이었지만 돌고래가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그렇게 멀미를 느낄 새도 없이 엘바 섬에 도착했다.


  우리는 항구에 내려 바로 프록끼오(Procchio)라는 마을의 해변으로 갔다. 항구에서 가깝지만 작고 조용한 마을이었다. 거기에는 캠핑장도 있었지만 너무 비싸서 해변에서 가까운 무인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기계로 표를 뽑아서 이용하는 이런 주차장들은 보통 저렴한 데다 저녁 8시부터 아침 8시까지는 무료라서 이런 곳에서 자면 비용을 많이 절약할 수 있다. 다만 주차장에 캠핑카를 둘 때 주의할 점이 있는데, 안에서 음식을 해 먹거나 잠을 자는 건 괜찮지만 차의 면적을 넓히는 행위(문이나 들창을 열거나 차양막을 치거나 테이블이나 의자를 밖에 내어 놓는 등)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법을 모르거나 알고도 무시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날도 캠핑밴을 타고 온 네덜란드 커플이 뒷문을 열고 테이블까지 밖에 내놓은 채로 요리를 하다가 순찰을 돌던 경찰에게 걸려 주의를 받는 것을 봤다. 


  주차장을 나가서 레스토랑과 바를 지나 대로를 건너면 바로 해변이었다. 프록끼오 해변은 아담하고 감성적인 느낌의 해변이었고, 입자가 곱고 색이 진한 모래, 빛이 비치는 사이다병을 연상시키는 맑은 초록빛의 바다가 아름다웠다. 이곳은 모래가 부드럽고 바닥 경사가 거의 없다시피 완만하다. 한참을 들어가도 무릎 정도로 물이 얕아서 어린아이를 데려온 가족들이 많았다. 산들바람처럼 부드러운 파도가 밀려오는 해변에 앉아 물을 찰박이는 아기들, 조그만 튜브를 팔에 끼고 바다로 뛰어드는 아이들이 사랑스러웠다. 놀랍게도 한 달도 채 안 된 것 같은 갓난아기도 몇 명 보았다. 놀라워하는 것은 나뿐인 듯 너무나 자연스럽고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유럽 사람들은 자녀가 아주 어릴 때부터 바다에 데리고 오는데, 정말 갓 태어난 것 같은 아기들을 이 이후에도 꽤 보았다. 부모의 품에 안겨 평화롭게 잠든 채로, 따끈한 햇살과 파도소리로 바다를 접한 아기들은 한두 살 정도가 되면 부드럽게 파도가 밀려오는 모래사장에 앉아 꺄르르 웃으며 물과 모래의 감촉을 즐긴다. 부모의 팔에 의지해 물에 몸을 담그기도 하는데 무서워하는 아이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이들은 이렇게 바다를 사랑하는 아이로 자라나 팔에 작은 튜브를 감고 첨벙첨벙 바다로 뛰어든다. 언제 보아도 사랑스러운 장면이다.



  프록끼오의 주차장에서 보낸 두 번째 밤, 캠핑카 바로 바깥에서 들려오는 정체 모를 소리에 남편과 거의 동시에 잠에서 깼다. 이게 도대체 무슨 해괴한 소린가 하고 자세히 들어 보니 돼지 소리였다. 엄마 돼지의 묵직한 꿀꿀 소리와 아기 돼지들의 끙끙대는 듯한 귀여운 소리가 바로 지척에서 들렸다. 남편은 잘 모르겠다고 했지만 나는 어렸을 때 부모님이 축산업을 하셔서 확신할 수 있었다. 백 프로 확실하다며 걱정 말고 자라고 하고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꿈이었나 싶었는데, 밖으로 나가 보니 땅이 여기저기 파여 있는 게 멧돼지가 확실했다. 주차장 바로 옆은 주택가고, 앞에는 레스토랑이며 바가 있는데 밤이면 멧돼지가 돌아다닌다니, 너무 멋지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프록끼오가 정말 마음에 들었지만, 이틀 전 마리나 디 빕보나를 떠나기 전에 씻고는 쭉 씻지 못한 데다가 캠핑카의 물도 갈아야 해서 섬의 남쪽에 있는 저렴한 오토캠핑장으로 가기로 했다. 엘바 섬은 가로로 긴 모양의 작은 섬이라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은 차로 20분이면 되지만 섬 중앙에 있는 산을 몇 개 넘어야 한다.

출발을 앞둔 시간, 프록끼오 해변은 아침 해가 환하게 비치며 산 그림자가 걷히는 중이었다. 주차장을 나서면서, 전날 저녁 길가에 서서 하이킹 계획을 논의하던 이탈리아 어르신들을 떠올렸다. 머리가 하얗게 센 어르신들이 논의 중이었던 계획은 놀랍게도 밤새 산길을 걸어 섬의 반대편 산에서 일출을 보는 거였다. 노년에 오히려 혈기왕성하게 자전거를 타거나 달리기를 하는 이탈리아 어르신들을 종종 보곤 했지만, 밤새 산길을 걸어 섬을 가로질러 떠오르는 해를 보겠다는 그 계획은 진심으로 놀라웠다. 그리고 그만큼 낭만적이기도 했다. 모두 무사히 도착해서 환하게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셨기를.



  우리는 프록끼오의 주차장에서 출발해 섬을 세로로 반 가르듯 남쪽으로 내려왔다. 산을 넘고 공항에 있는 마트에 들러 장을 본 후 ‘마리나 디 캄포’(Marina di campo) 외곽에 있는 오토캠핑장에 왔다. 이곳도 흙바닥에 엉성한 담이 둘러진 허름한 곳이지만 오토캠핑장으로서의 기본적인 시설은 갖추고 있어서, 저렴한 가격에 머무르며 전기와 물을 제공받고 오수를 버릴 수 있다.


  우리 차는 최소 3~4일에 한 번은 오수와 화장실을 비우고 깨끗한 물을 채워야 하기 때문에 종종 이런 오토캠핑장에 들러야 한다. 그 김에 샤워도 한다. 이곳에선 엉성하게 가려진 공간에서 수영복을 입은 채로 찬물 샤워를 해야 했지만 샴푸와 비누를 써서 몸을 씻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캠핑 여행을 시작하고 이틀 못 씻는 것은 예삿일이라 익숙하지만 3일째부터는 몸의 불쾌감을 참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샤워를 마치고 개운한 몸으로 자전거를 타고 해변으로 갔다. 공항에서 가까워서 그런지 마리나 디 캄포는 프록끼오보다 크고 알록달록하고 상업적인 느낌이 났다. 예쁘게 꾸며진 집과 호텔이 많고, 도로와 인도가 잘 정돈되어 있고, 길 주변으로는 달큰한 향기가 나는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늘 자전거를 타고 다녔는데, 오토캠핑장에서 마을 중심가로 가는 길은 중간에 바다를 만나 해변을 따라 길게 이어진다. 마트에 갈 때도 해변에 갈 때도 늘 이 길로 다녔다. 왼편에는 하늘보다 더 맑은 하늘빛의 바다와 밝은 색 모래사장이, 오른편으로는 정원에 꽃나무가 심어진 귀여운 집들이 있고, 낮은 산 아래 아기자기한 마을 풍경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이 길을 나는 첫눈에 사랑하게 됐다.


  그리고 이곳 바다.. 이 물빛을 어떻게 묘사하면 좋을까? 더 좋은 표현을 찾으려고 고심해 봤지만 진로 소주병처럼 맑은 하늘색이라는 말 외에는 다른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 해변의 모래가 밝은 색이라 꽤 멀리까지 이런 투명한 하늘빛을 유지하는데, 발이 닿지 않는 깊이에서도 바닥의 모래가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맑았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바다였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바로 해변에 가고, 캠핑카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또 바로 해변으로 갔다. 저녁에는 마을로 가서 가게들을 구경하고 항구에 있는 바에서 붉어지는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며 와인이나 칵테일을 마셨다. 라이브밴드가 음악을 연주하고 손님들은 기분 좋게 취해 함께 노래하고, 모든 것이 완벽한 날들이었다.


  한 장소를 이틀 만에 이렇게 사랑하게 될 수 있을까? 앞으로 어디를 가든 어떤 풍경을 보게 되든 늘 마음 한구석으로 이곳을 그리워하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렇게, 이 세상에 사랑하는 장소가 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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