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Berceto
피아첸차에서 겨우 약을 사고 남쪽으로 한 시간 반 정도를 달려 내려왔다. 휴대폰 거치대는 중간에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러서 구입했다. 정가보다 훨씬 비싸게 사야 해서 속이 쓰렸지만 당장 내비게이션을 봐야 하니 구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해야 한다. 오늘의 목적지인 베르체토는 오래된 수도원이 있는 산속 작은 마을인데, 이곳이 목적이라기보다는 이곳에 마을에서 운영하는 저렴한 캠핑카 주차장이 있다고 해서 하룻밤 묵어 가기로 했다.
도착해 보니 이곳도 역시 관리하는 사람 없이 방치되어 있었다. 무료로 이용할 수 있어 우리에겐 좋은 일이지만 이럴 때마다 판데믹 상황을 실감하게 된다. 4개뿐인 콘센트는 먼저 온 차들이 모두 차지해서 전기는 포기하고 남은 자리에 주차했다. 차에서 내려 대충 주변을 둘러보니 특별한 것도 없고 흐린 날씨에 산중이라 춥기도 해서 다시 차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버리는 하루구나 싶어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차 안에서 계속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 밖에서 이탈리아어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여섯 살 정도 됐을까, 앳된 목소리의 여자아이가 “아빠, 여기 너무 예뻐! 오기 정말 잘했어! 너무 아름다워!”라고 소리 높여 외치고 있었다. 타닥타닥 발소리도 나고 목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는 걸 보니 신이 나서 뛰어다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나는 여전히 심드렁했다. ‘내가 아까 다 둘러봤는데 별것도 없던데 뭘..’ 아이의 흥분은 어린아이 특유의 호들갑이라 여겼다. 하지만 도대체 뭘 보고 그렇게 예쁘다는 건지 궁금하긴 해서 무심코 문을 열고 밖을 내다봤다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세상이 온통 주황빛이었다. 사방의 산과 들판을 금빛, 오렌지빛으로 물들이며 찬란하게 해가 지고 있었다. 꿈처럼 아름다운 노을이었다.
세상은 가끔 공들인 계획을 무참히 망치고 갖가지 불운과 고난을 선사하는 심술을 부리지만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의외의 선물을 안겨 주기도 한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선물은 더 큰 감동을 남기는 법이다. 뭉클한 마음으로 한참 동안 노을을 바라보다 캠핑카로 돌아왔다.
잠결에 바람 소리, 빗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푹 자고 아침에 일어나니 바람이 엄청 불고 있었고, 바닥에는 웬일인지 물이 흥건했다. 비가 샜나 해서 확인해 봤지만 천장에 그런 흔적은 없었다. 남편을 깨워 말했더니 단박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모터 문제일 거야..”
“모터 문제라니? 모터에 문제가 있어?”
“출발 전에 확인해 보니까 물이 새더라고.. 최대한 고쳤는데 안 되나 봐..”
아.. 그렇구나.. 모터도 고장난 상태였구나.. 이 망할 놈의 차는 정말 멀쩡한 데가 한 군데도 없던 거였다. 그저 어이가 없었다. 내가 말없이 바닥을 닦는 동안, 남편은 침대에서 내려와 소파를 들어냈다. 소파 판자 밑에 모터 칸이 있어서 모터를 살펴보려면 소파 쿠션을 다 들어내고 판자를 들어올려 열어야 했다. 열어 보니 그동안 꾸준히 물이 샜던 모양으로, 물이 샐까 봐 남편이 출발 전에 모터 아래에 받쳐 놨다는 낮은 대야에 물이 가득했다. 모터를 사용할 때마다 새어 나온 물이 모여 대야를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넘쳐 흐른 거였다. 물이 새는 것은 모터가 오래돼서 그런 거라 고칠 방법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임시방편으로 모터 아래에 대야를 다시 받쳤다. 이제 매일 소파를 들어내고 대야가 넘치기 전에 비우는 것으로 하루하루 버텨 보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모터 문제를 수습하고 부랴부랴 화장실에 갔는데, 이번에는 볼일을 보는 중에 난데없이 변기가 앞으로 확 쏠리면서 고꾸라질 뻔했다. 순간적으로 힘을 줘서 균형을 잡느라 다리에 쥐가 날 뻔했지만 어떻게든 다리 힘으로 버티면서 급히 볼일을 마저 보고 확인해 보니 좌변기를 고정해 두는 커다란 나사가 풀어진 거였다. 그동안 조금씩 풀어졌던 거겠지만 완전히 풀어진 타이밍이 참 기가 막혔다. 아무리 안 좋은 일은 몰아서 닥친다지만 이 타이밍에 변기까지 이럴 일인가 말이다. 게다가 고정 나사 세 개 중 두 개가 풀어졌는데 그 중 하나는 좁은 구석에 있어 아예 손도 닿지 않았다.
그제서야 우리는 차에 문제가 생겼을 때 대처할 만한 공구를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이 두 바보가 정말로 드라이버 하나도 챙겨오지 않았던 것이다. 손이 닿지 않는 나사는 포기하고 다른 하나를 남편이 손으로 최대한 조여서 흔들림이 좀 덜해졌다. 나사 세 개 중 두 개로만 고정해야 하는 데다가 꽉 조일 수도 없으니 주기적으로 다시 조여 주고 사용할 때마다 무게중심을 주의해야 한다. 이렇게 할 일이 또 하나 늘었다.여행이 시작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온갖 문제들이 연이어 터져 나오니 정말로 환장할 노릇이었다. 더 이상은 아무 일도 없으면 좋겠지만, 이런 낡은 캠핑카로 여행하면서 문제가 생기지 않기를 바랄 수는 없는 거지 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저 수습할 수 있는 문제들이기를, 오늘 한 것처럼 이래저래 어찌저찌 적당히 수습하면서 이 여행을 지속할 수 있기를 바랄 뿐.. 엉망진창이라도 어떻게든 여행을 이어가자, 우리는 조금은 비장한 마음으로 베르체토를 떠나 토스카나 주로 향했다.